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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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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호 Vol.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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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최용희

맺다 / 예술가의 초상
국립국악관현악단 최용희

그는 몸을 움직여 
리듬과 음을 만들어 내는 일의 보편성을 포착한다.





악기 연주는 사실 노동이다. 특히 여타 직업처럼 숭고한 직업 정신이 동반된 국립단체의 연주자는 단련을 통한 숙련이 중요한 기준이다. 거기에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면서, 기계적으로 소비되지 않겠다는 저항과 열정도 필요하다.
국립국악관현악단원 최용희는 특히 국악관현악이 독백으로 말할 수 없는 시대의 연주임을 증언한다. 올해 30주년을 맞는 이 단체의 1995년 창단 멤버인 가야금 연주자로 음악의 권위를 분산시키며 그걸 자연스럽게 나누는, 겸손의 매력을 갖췄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최용희는 “지난 30년은 감사하고 놀라운 일로 가득했다”고 벅차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지향한 태도와 맞물린다. “어쩌다 소설을 쓰기 위한 자질을 마침 약간 갖고 있었고, 행운의 덕도 있었고, 또한 약간 고집스러운(좋게 말하면 일관된) 성품 덕도 있어서 35년 여를 이렇게 직업 소설가로서 글을 쓰고 있네요. 그리고 그 사실은 아직도 저를 놀라게 합니다. 매우 크게 놀라요.”
최용희는 ‘직업 연주가’로서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전범을 보여 주며, 물 흐르듯 살아왔다. 튀지 않고 한눈팔지 않으면서, 무엇보다 예술적으로 생산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왔다.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동시대 음악을 재창조하는 국악관현악은 국악의 현대화, 대중화의 선봉이다. 악기를 개량하고 연주법을 개발하기도 하는 실험성과 도전 정신 그리고 특히 이를 가능케 하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용희는 발군이다. 벼락같은 영감을 받아 거침없이 내달리는 연주자도 좋다. 하지만 정확하고 성실한 연주를 찾아내기 위해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고 또 시도하는 처절한 일상의 일에 충실한 연주자는 더 훌륭하다. 후자에 가까운 최용희는 몸을 움직여 리듬과 음을 만들어 내는 일의 보편성을 포착한다. 무엇보다 국내에 스며들 듯 지경을 넓힌, 국악관현악의 역사와 궤도를 같이 그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출신인 그녀는 1987년에 창단한 첫 민간 국악관현악단인 ‘중앙국악관현악단’ 창립 멤버다. 이후 국악관현악과 관련한 첫 문을 계속해서 열어 왔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연주회 전엔 12현에서 22현으로 늘어난 개량 가야금을 연주하기 위해 밤을 새우며 연습했다. “12현과 22현은 전혀 다른 악기였어요. 악단에서 선생을 모시다 배우면서 계속 공부해 나갔죠. 시행착오를 겪고 이렇게 저렇게 고생하다 보니까 어느 날 조금씩 편안해지더라고요.”

사과 농사를 짓던 충북 충주 가문 출신인 최용희는 음악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부모와 같이 자던 어린 시절 저 건넛방에서 증조할아버지가 읊던 시조를 자장가 삼아 까무룩 잠들었다. 부친은 레슨 한번 받지 않고 성악과에 입학하기도 했다. 이런 집안 내력을 이어받은 최용희는 어릴 때 학교에서 단체로 노래 부를 일이 있으면, 솔로 파트를 도맡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음악 선생님을 꿈꿨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 생긴 가야금반이 전환점이 됐다. 고민이나 계기도 없이 그녀의 마음이 무조건 가야금에 쏠렸다. 자신도 “당시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했다. 실력을 인정받았고, 선생님은 가야금으로 대학입시를 치르자고 했다. 하지만 부친은 반대했다. 선생님이 편지를 써 부친을 설득했고, 결국 가야금을 하는 것으로 허락을 받아 냈다. 
하지만 뒤늦게 시작한 터라, 일찌감치 가야금을 만진 이들과 경쟁에선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1983년 중앙대학교가 음악대학을 만들던 해에 아슬아슬하게 붙었다. 
<새봄음악회> 솔로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대학 생활 내내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놀아도 연습실에서 버틴 끝에 결국엔 장학생으로 수석 졸업했다. 




대학 생활 중 변곡점은 그녀가 2학년이던 때 박범훈 전 중앙대학교 총장(국립국악관현악단 초대 예술감독)이 당시 교수로 부임하면서 만들어졌다. 박 전 총장은 “국악관현악이 ‘미래의 음악’”이라고 자신할 만큼 국악관현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잘 알았고, 최용희는 그가 창단한 중앙국악관현악단 창단 멤버로 입단해 실력을 다졌다. 하지만 당시 민간 국악관현악단의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다. 다들 음악이 좋아서 큰 욕심 내지 않고 끈끈함으로 버텼다. 인근 시장에서 채소를 사다가 같이 쌈을 싸 먹는 것만으로도 진수성찬이었다. 당시 윤문식·김성녀가 출연하던 MBC <마당놀이> 지방 순회공연에 함께하며 울고 웃은 것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됐다.
그러다 서른 살에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단원이 되면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다. 올해 육순이 된 최용희는 악단 30주년에 입단 30주년을 맞은 뒤 정년 퇴임한다. 소명 의식을 갖고, 일상을 꿋꿋하게 지켜 온 이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행운이자 축복이다. 
“가야금은 어느 악기보다 악보에 콩나물이 빼곡해요. 25현이라면 더 심하죠. 전조되는 부분에선 헷갈리지 않게 색칠도 해 놓고 별표도 그려 놓고 해요. 악보가 아주 찬란하죠. 노년에 접어들어서 하기엔 불리한 악기입니다.” 그럼에도 올해 말 정년 퇴임 이후의 삶은 아직 상상이 안 된다고 했다. “전 이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이거든요. 30년 동안 정말 열심히 했는데 한 번도 지루하거나, 지겨운 적이 없었어요.”

고고한 예술가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왔다. 육순의 또 다른 말로는 이순耳順이 있다.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를 뜻한다. 그렇다면 최용희의 마음은 항상 이순理順이었다. 몸담았던 곳에선 모두 창단 멤버로 항상 선배였는데, 그녀는 이미 후배 말을 잘 들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모든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 ‘사리가 정당할:理順’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최용희는 단체 활동에도 물 흐르듯 스며들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을 떠나기 전 해보고 싶은 레퍼토리는 따로 없다고 했다. 마지막 해를 보낸다고 느슨하게 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주어진 것들을 똑같이 묵묵하게 해내겠다고 끊임없이 다짐한다. 이런 단원들의 성실함이 켜켜이 쌓여 국립국악관현악단의 30년이 됐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시스템은 국내 최고예요. 어느 다른 단체보다 잘 갖춰져 있죠. 이렇게 잘 갖춰진 시스템을 대내외적으로 잘 지켜 줬으면 좋겠어요. 단원들 실력은 말할 것도 없죠. 그간 도움을 주신 선생님들한테 너무 감사하고, 단원들과 함께한 30년 동안도 참 행복했어요. 무엇보다 단원들한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자신의 음악 이력을 돌아보면서 처음 가야금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자 너무 설렜다며 생긋 웃었다. “사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좋아요.” 오랜 시간 곁을 지켜 준 가야금에 이 같은 말을 남겼다. “네가 있어서 내가 여태 살았다. 네 덕분에 살았다.”


글. 이재훈 『뉴시스』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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