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해남 출신의 임현빈은 어린 시절 추정남 선생(1940~2019,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보유자)에게 고법을 배우며 국악의 길로 들어섰다. 광주의 남도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소리보다는 북과 장단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방송에 출연하게 된 그는 소리꾼에게 집중되는 스포트라이트를 보며 소리꾼의 꿈을 꾸게 되었다. 판소리에서 장단이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전체 판을 지휘하고 이끄는 것은 결국 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교 시절, 한애순 명창이 마침 그가 다니던 남도예술고등학교에 출강했다. 임현빈은 그에게 박록주제 ‘흥보가’를 배우며 판소리의 매력에 눈을 떴다. 임현빈은 소리꾼의 성장 과정을 계단식이라고 표현한다. 성장하다 정체되고, 또다시 성장하면서 나아가는데, 돌이켜 보면 고교 시절에 많은 계단을 올랐던 것 같다고 한다. 소리를 하기로 결심하고 오래지 않은 1993년, 남원 흥보제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재능 있는 소리꾼의 탄생이었다. 이후 임현빈은 성우향·이난초 명창을 사사하며 자신만의 소리를 갈고닦았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원하던 대학 진학이 바로 이뤄지지 않아 방황하는 날도 있었고, 20대 때는 개그맨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소리에서 잠시 멀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곁에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꽃피워 주려는 스승들이 있었다. 고교 졸업 후 만난 성우향 명창은 “너는 타고난 게 있다. 소리에는 은금보화도 있고 부귀영화도 있다”라며 제자의 마음을 다잡아 주었고, 이모이자 스승인 이난초 명창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카를 한결같이 지켜 주며 자신이 가진 소리를 아낌없이 내주었다. 임현빈은 스승의 사랑과 기대 속에서 소리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잡아갈 수 있었고, 마침내 35세가 되던 2011년에 제38회 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 부분 대통령상을 거머쥐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