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연극은 작가가 쓴 희곡을 연출가의 지휘로 만들어진 무대에서 배우가 대사를 주고받으며 연기하는 예술을 의미한다. 하지만 연극의 3대 요소에는 연출가가 포함되지 않는다. 오히려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 연극을 지켜보는 관객이 포함된다. 사실 연출가가 주목받고 다른 역할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로 이때부터 연극은 훨씬 다양해진다. 글로 된 희곡을 연출가의 상상력으로 이해해 무대 위에서 가시화하기에 같은 희곡이어도 연출가에 따라 각기 다르게 해석되고, 각기 다른 작품으로 새롭고 다양하게 탄생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연극은 연극만의 고유한 특성을 더 살릴 수 있게 되었으며, 작가의 예술, 배우의 예술에서 연출가의 예술로 관심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또한 기술이 발달하고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고 할 만큼 관습이나 규범에서 자유롭게 된 연극은 내용이나 양식에서 그 스펙트럼이 더욱더 넓어졌다. 이제는 대화 형식의 희곡이 아니어도, 이야기가 부재한 희곡이어도, 아니 희곡이 존재하지 않아도, 또는 배우들이 어떤 인물을 표현하는 연기가 아니라 퍼포먼스나 신체 행위만을 선보여도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작품을 만드는 사람과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연극 장르 안에 포함될 수 있을 정도로 다양성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이하 <사랑의 죽음>)도 연극의 다양성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작가이자 연출가인 안헬리카 리델Angélica Liddell, 1966~은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와 같은 고향(피게레스) 출신이며, 리델이라는 성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었던 앨리스 플레전스 리들Alice Pleasance Liddell, 1852~1934에서 차용한 것이다.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1993년부터 극단을 만들어 스페인은 물론 유럽 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안헬리카는 스페인의 전설적 투우사 후안 벨몬테Juan Belmonte, 1892~1962에 대한 자서전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따라 카페에 놀러 다니며 또래 친구들과 투우사들을 흉내 내던 벨몬테는 17세에 투우를 시작해서 ‘근대 투우의 창시자’가 된다. 당시 투우는 황금기라고 불릴 만큼 많은 인기를 누렸으며, 벨몬테가 보여 준 뛰어난 솜씨로 그는 유년기를 보낸 시골 마을의 이름을 따서 ‘트리아나의 천재Pasmo de Triana’라고도 불렸다. 이전에는 투우사가 소 앞에서 발동작으로 눈속임을 하면서 소를 죽였다면, 벨몬테는 흥분해 침을 흘리며 씩씩거리는 소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소를 뚫어지게 응시하기도 하고, 몸을 현란하게 돌리며 망토를 휘두르는 기교를 펼쳐서 투우를 예술의 차원으로 격상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햇살이 내리쬐는 뜨거운 오후에, 반사되는 햇빛으로 온몸에서 빛을 발하는 투우복을 입은 투우사는 아무도 없는 넓은 모래판에서 자기보다 더 크고 위협적인 소와 단둘이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나는 운명을 감지한 것처럼, 둘은 서로를 견제하고 모래판을 뛰어다니며 묘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결정적 순간이 오면, 고요한 침묵 속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꼿꼿이 맞서던 투우사는 날카로운 긴 칼을 높게 쳐들었다가 소의 급소에 마지막 일격을 가함으로써 죽음을 안긴다. 죽음을 코앞에 두었지만 두려움 없이 버티고 자기를 기꺼이 바칠 것 같은 투우사의 열정과 몸짓에 안헬리카는 어떤 숭고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고는 투우장에서 벨몬테가 자신을 바쳐 투우하듯 제의 형식의 연극을 완성했다.
하지만 <사랑의 죽음>에는 배우들이 등장해 투우사나 관련 인물들을 연기하지도 않고 투우나 죽음, 그와 관련된 대화를 주고받지도 않는다. 크고 작은 이야기도 없고 반전도 없다.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웃거나 사고의 깊이가 확장될 지점도 없다.
커다란 무대 위에는 투우장을 연상케 하는 최소한의 보호막이 존재하고, 작은 테이블과 의자만 덩그렇게 놓여 있다. 잠시 후, 배우가 등장하듯 안헬리카 본인이 직접 무대 위에 나와 관객을 마주하지만, 이는 극이나 인물의 이야기를 전해 주거나 대사가 없는 무언극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헬리카는 단순한 신체적 행위를 반복하다가 분노가 치민 듯 소리를 지르며 공격적으로 말을 쏟아 낸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 파편화된 말은 과격하지만, 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언뜻 투우사 벨몬테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사회의 부패와 권력의 타락, 본질을 잃은 예술의 현주소에 대한 고발과 저항의 외침이다. 이렇게 아무 말이나 쏟아 내는 것 같은 안헬리카의 독백은 말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대사가, 말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고 타락한 세상을 바꾸는 데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헬리카 본인은 작가도 극작가도 아니라고, 그냥 창작자일 뿐이라고 밝힌다. 또한 안헬리카는 배우의 전통적 개념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무대 위의 인물은 대본대로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무대와 관객 사이의 중재자 또는 해석자라고 일축해 버린다.
한편 <사랑의 죽음>은 비극적 운명과 사랑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죽음에 대해 다룬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도 접목한다. 열정적 사랑과 고통, 죽음으로 치닫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투우사 벨몬테를 통해 연극인 안헬리카는 비극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이 넘쳐나서 관객들이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안헬리카의 <사랑의 죽음>은 전통적 연극 기법이나 전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과 개념을 제공하며 연극의 세계를 더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단순한 무대에서 단순한 사물들을 가지고 단순하게 작품을 전개하지만, 그 단순함 뒤에서 본질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새로운 상징을 얻어 낸다. 또한 직관적이고 과감한 표현 방식은 관객의 감정과 생각을 자극하고, 작품을 통해 던진 이슈나 주제에 대해 인식하고 반응하도록 한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우리 관객들은 다른 배경과 철학을 지닌 한 연극인의 독창적 작품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어떤 후기를 남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