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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2월호 Vol.361

은은하게 물결치는 관능

내일의 전통 | 문성식의 그림들

‘그냥 삶’(2019)

 

민화와 벽화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감각적이고도 농밀한 그림들. 작가 문성식의 그림은 오랜 침묵의 계절을 지나 다시금 활짝 피어난 꽃 같았다

 

몸담았던 잡지에서 15년 가까이 ‘예술’을 다뤘다. 마음에 가닿는 작품을 보면 골방처럼 볕 들 일이 많지 않은 음지에 햇살 한 줄기가 스미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일종의 ‘정화’였다. 잠시나마 순한 사람이 되고 마음이 비옥해지는 경험. 감동적인 순간도 많았다. 지상 최고의 예술은 모두 다 모아놓은 것 같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고흐와 모네, 피카소와 잭슨 폴록의 작품을 보고 너무 감동한 나머지 빗속을 뚫고 다음 날 다시 그곳을 찾기도 했다. 그때 그림 안에는 참 많은 것이 담기는구나 생각했다. 날씨·풍경·에너지·사랑·상상력·절망·환희·분노·고독·광기. 그것은 우리의 삶 자체였다. 보편성과 특수성이 한데 녹아 있는. 클래식 음악처럼 그림이 주는 감흥 역시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이었다.  
직업적으로 그림을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 마음에 불꽃이 일게 하는 그림은 점점 줄어들었다. 비행기를 자주 탈수록 이륙의 설렘이 무디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다 문성식 작가의 그림을 만났다. 2관과 3관에 걸린 그의 그림들을 한참 동안 코를 박고 봤다. 이유를 생각해 본다. 우선 감각적이었다. 그건 색채와 기법, 화면 구성 등 회화의 모든 요소가 매끈하고 입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앞서 말한 요소 중 하나만 균형을 잃어도 결과물은 감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소재는 평범했다. 그저 삶. 꽃밭에 있는 노인, 옥상에서 별을 구경하는 사람들, 느긋한 표정의 고양이, 사랑을 나누는 남녀, 씨앗의 발화, 장미꽃에 날아들고 꼬이는 새와 벌레들. 하지만 기법과 색채는 무난하지 않았다. 캔버스를 자세히 보면 송곳으로 긁은 듯, 바탕에 수많은 스크래치가 보인다. 바탕색에 젯소를 바른 후 날카로운 도구로 표면을 긁어내고 그 위에 다시 구아슈를 발라 완성한 그림들. 김환기의 점묘화를 볼 때와는 또 다른 심정으로 ‘와, 저 모든 꽃과 사람 얼굴, 풍경을 일일이 어떻게 긁어냈을까?’ 싶다.

 

 

 

 

 

오랫동안 아름다운 것들이 내게 영감을 주었다
이런 아이디어는 ‘오래된 예술’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 작가는 15세기 이탈리아 화가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벽화와 프랑스 라스코의 동굴 벽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벗겨지고 중첩되는 색들. 그러면서 빨간색과 주황색, 푸른빛이 뒤섞이는, 어느 날의 노을처럼 깊고 아득해진 질감과 기운. 작가는 1950~1960년대 패션과 문화를 모티프로 한 명품 브랜드 구찌의 매장 컬러와 벽화 느낌까지 참조하며 자신의 색감을 찾았다. 한국의 민화도 영감의 원천이 됐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작가는 민화의 자유로운 생기를 가져오고 싶었다고 했다.
“재작년에 갤러리 현대에서 ‘민화, 현대를 만나다: 조선시대 꽃그림’이란 전시가 열렸어요. 민화를 그린 이들은 화원이 아니라 선이며 구성이 자유로워요. 장욱진 화가의 그림처럼 아이 같은 느낌이 있는 거예요. 꽃과 나비의 비율도 정확하지 않지요. 어떤 그림은 벌레나 꽃과 비교해 새가 너무 작게 그려져 있는 경우도 있어요. 엷게 칠한 색도 매력적이고요. 그런 자유로움과 생기가 탐이 나 제 그림에 적용해 보고 싶었는데 잘 안 됐어요. 오랫동안 입시 미술을 해서 그런지 꽃과 새, 벌레의 비율이 정확하게 나오는 거죠(웃음). 문법을 더 많이 깨부수고 싶었는데 말이죠.”
그렇게 완성한 그림은 민화의 큰 형태와 아우라Aura를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동시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바탕색부터가 그렇다. 전통 민화가 택한 누르스름한 황색은 한 점도 없다. 커다란 화폭을 가득 메운 화사한 민트색. 그리고 그 색에서 피어난 장미와 그 장미를 향해 날아드는 나비와 새. 작가는 엷은 색을 반복해 올리는 방법으로 전통 민화에서는 볼 수 없는 감각적 바탕색을 만들었다. 여백을 처리하는 방법도 달리했다. 전통 민화는 군데군데 비어 있는 곳이 많지만 그는 여백을 최소화하고 많은 부분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그 채움의 대상은 빼곡한 스크래치의 흔적으로 생명의 속살처럼 입체적이면서도 낯선 세계를 보여준다.  

 

 

‘그냥 삶’(2017-2019)

 

은은한 관능, 문성식표 그림의 핵심
작가는 아이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지만 글쎄, 그런 그림이 나왔다면 이 정도의 인기몰이는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아이가 그린 것 같은 그림은 많으니까. 공들여 만든 색, 오래된 벽화를 연상시키는 스크래치에서 느껴지는 정성, 정확한 비율의 꽃과 나비, 아크릴 물감과 비교했을 때 붓칠의 흔적을 더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남기는 구아슈의 선택까지 이 모든 디테일이 중첩되고 어우러져 독창적인 그림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작품은 배우 고소영을 비롯해 많은 유명 인사가 소셜 미디어에 올리면서 더 유명세를 치렀는데 그 배경에도 이런 디테일과 감각의 총합이 있을 것이다.
씨앗이 움트고, 그렇게 꽃이 피고 지고, 그 생명에 벌레와 새가 꼬이는 생명의 순환은 문성식 작가의 주제 의식 자체다. 비단 식물뿐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 사랑을 나누고 그 결과물로 씨앗 같은 생명이 움트는 모든 과정을 작가는 신비롭게 생각하고 그 순환 과정에 있는 것들을 그림으로 남긴다. 그렇게 완성한 작품들이 ‘물의 조각’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었다. ‘물의 조각’은 목련의 실루엣을 24점의 구아슈 드로잉 연작으로 완성한 작품인데 엷은 하늘색으로만 채색해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준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온갖 체위로 사랑을 나누는 연인을 대상으로 하는데 역시 하늘색으로만 큰 형태를 그려 은근한 관능미를 보여준다. 과감한 소재지만 꿈결처럼 몽환적인 그림들. 주제는 보편적이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은 구체적이면서도 은은하다는 것. 나는 그 신비의 미학이 문성식 작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참여할 정도로 일찍이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25세. 2년 후에는 국제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었고 그 후로 오랫동안 작품이 되지 않는 긴 겨울을 보내다가 작년 성대하게 귀환했다. 작업을 위해 거주지까지 연고가 없는 부산으로 옮긴 그는 빌라 앞 작은 땅에 넝쿨 장미를 키운다. 그 생명의 현장과 끌림의 세계는 앞으로도 그에게 마르지 않는 주제가 될 것 같다.    

 

정성갑 크리에이터와 대표작을 전시하는 한 점 갤러리이자 콘텐츠 제작 기획사인 ‘클립clip’을 운영한다
사진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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