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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호 Vol.359

낭만과 인정이 흐르는 겨울 노래

맛있게 까먹는 우리네 겨울 소리

군것질은 긴긴 겨울밤을 이기는 방법 중 하나다. 예전 사람들은 추운 겨울날 군것질을 하며 자연스레 소리를 만들고, 부르고, 전했다. 그 소리는 삶의 방식이며, 군것질 노래 역시 가락마다 우리네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군밤타령에 담긴 계절성과 심리적 위안
겨울,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사람들은 따끈한 공간과 음식을 떠올리고 인정 어린 손길을 그리워한다. 시린 계절에 생각나는 따스한 추억 중에서도 유독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궁핍할 때 나누던 삶의 지혜와 풍성한 사랑이다. 그 연결고리는 군밤이나 삶은 감자, 군고구마 혹은 군고구마 장수의 털모자처럼 정답고 포근한 것들이다. 그래서 정다운 겨울노래를 자꾸 부르면 부를수록 추운 겨울은 언제 왔냐는 듯 저만치 달아난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평 바다에 어허얼싸 돈바람 분다
(후렴) 얼싸 좋네 아하 좋네 군밤이여 에라 생율밤이로구나

겨울에 부르는 민요를 생각하면 한국인은 아마도 ‘군밤타령’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귀에도 익숙하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밤’이 풍요를 기원하는 상징물이라면, 노랫말에 등장하는 ‘돈바람’과 잘 어울린다. 연평 바다의 조기잡이로 돈바람이 불 정도로 풍어豊漁에 들뜬 분위기가 신명 나는 후렴구로 이어지는데, 흥겨운 가락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겨울철 군밤장수가 이 노래를 부르며 장사를 했다는 소박한 해석도 전해진다. 1932년 전수린이 작곡하고 이애리수가 부른 ‘군밤타령’은 신민요인데, 노랫말은 “너는 총각 나는 처녀 / 처녀 총각이 단둘이 만나서 둥굴어졌구나 / 눈이 온다 (오냐) 눈이 와요 (어데서) 청청한 흰하날에 허허헐사 흰 눈이 온다”이다. ‘생율밤’이 아니라 “에라 삶은 밤이로구나(좋다)”라는 후렴구를 사용한다. ‘오냐’ ‘어데서’와 같은 대화체도 지금은 없어졌다.
‘군밤’이 노래의 소재로 등장하는 역사는 꽤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속요 중에 ‘정석가’가 있는데, “바삭바삭한 잔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고, 그 군밤에 싹이 나야 사랑하는 님과 헤어지겠다”라는 노랫말이 있다. 임과의 이별을 불가능한 사실에 비유함으로써 임과 오래도록 함께 있고픈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군밤타령’ 노랫말에는 유독 남녀의 사랑을 표현하는 문구가 많다. ‘처녀 총각이 둥굴어졌다’라는 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살이 볼록하게 찐 볼을 ‘밤볼’이라고 하듯, 밤은 외형상 통통하고 싱싱해 풍요와 다산(여성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군밤타령’에서 추운 겨울을 풍성하게 지내기 위한 가난한 이들의 심리적 위안과 함께, 따뜻한 봄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계절적 제의성까지 엿볼 수 있다.

 

떡을 먹고 노래하자
주술과 제의는 ‘떡타령’에서 유희성으로 이동한다. 요즘은 떡이 흔한 음식이지만 과거에는 일상에서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조선 시대 한양의 연중행사를 적은 김매순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12월에 먹는 골무떡을 일컬어 “좋은 쌀을 빻아 체로 쳐서 고수레 한 다음 시루에 쪄서 안반 위에 놓고 떡메로 쳐서 조금씩 떼어 손으로 비벼서 둥글고 길게 문어발같이 늘이는데 이것을 권모(골무떡)”라고 했다. 권모摸란 ‘주먹 권’ ‘잡아쥘 모’의 뜻을 지닌 이름이다. 천지신명과 조상에게 감사의 추수 제의를 지내듯 알록달록한 색깔의 골무떡을 빚어 제사를 지냈다. 새해의 풍요와 무사평안을 기원하는 소박한 염원이 이 과정에 담겨 있다.
그러나 근대 이후 ‘떡타령’은 떡을 타령화해 주저리주저리 읊어대는 신나는 민요로 변모했다. 19세기 중엽에 김형수가 쓴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를 보면 “때는 한겨울 11월인데… 몸은 비록 한가하나 입은 궁금하네(身是雖閒口是累)”라고 했다. 여기서 ‘입이 궁금하다’는 것은 간식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눈 오는 겨울날이면 고구마나 감자, 밤을 삶아 먹곤 한다. 아니면 시원한 무라도 썰어 먹는다. 형편 좋은 집안이야 약과나 다과를 먹기도 하지만 여염집에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만들기 쉽고 재료 구하기도 쉬운 떡을 만들어 먹었다.
‘떡타령’은 떡의 종류나 특징을 시기와 지역에 따라 노래한다. 떡의 종류가 그만큼 많다는 것인데, 이는 한국인이 떡을 무척 좋아하고 다양하게 먹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겨울철에 먹는 떡은 “시월 상달 무시루떡 동지달 동지날 새알시미 섣달에는 골무떡”(임동권, ‘한국민요집I’)이다. 겨울철에 흔한 무를 넣은 무시루떡, 동짓날에 먹는 새알, 골무만 하게 잘게 만든다 하여 골무떡 등은 겨울과 잘 어울리는 먹거리다. 그리고 ‘떡타령’은 “산중 사람은 칡뿌리떡, 해변 사람은 파래떡, 제주 사람은 감자떡, 황해도 사람은 서숙떡, 경상도 사람은 기정떡, 전라도 사람은 무지떡……”으로 이어진다. “얼기설기는 무시루요, 두귀가 번쩍은 송편이며, 네귀 번듯은 인절미며, 빈들빈들 빈대떡이요 도장을 맞았다 호떡” 등으로 떡의 특징을 잘 묘사하며, “이치저치 시리떡 너러졌다 가래떡 오색가지 기자떡 쿵쿵쳤다 인절미 수절과부 정절편 올기쫄기 송기떡 도리납떡 송편떡”과 같이 노래하기도 한다. 도장과 호떡의 생김새, 빈들빈들과 빈대떡으로 이어지는 유사음의 유희, 수절과 정절떡의 의미상호성에 기인하는 떡 이름 덕분에 ‘떡타령’을 더욱 흥얼거리게 된다.

 

한과 신명을 소리로 풀어낸 우리 민족
12월 제철 음식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에는 호박범벅도 있다. ‘범벅타령’에서는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범벅을 연결한다.

책방도령은 좁쌀범벅 / 김포수(훈련도감)는 송기(松肌)범벅 // 미운 양반은 시래기범벅 / 고운 양반은 꿀범벅이라 // 얼씨구나 좋다 꿀범벅이요 (리동원, ‘조선민요의 세계(하)’)

책방도령은 책만 읽으니 좁쌀이라 한 모양이다. 김포수는 힘이 좋고 멋져 보이니 송기범벅이 어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맛있는 꿀범벅을 주고 싶다는 심정이 가사에 잘 드러나 있다.
사실 ‘범벅타령’은 두 종류가 있다. 달마다 노래하는 월령체 형식이 있고, 서사민요 형태의 ‘범벅타령’도 존재한다. 그중 뒤의 소리는 ‘훗사나타령’이라고 한다.

“허리 둥굴둥굴 범벅이냐 누구나 잡수실 범벅이냐 이 도령은 찹쌀범벅 김 도령으난 멥쌀범벅 이 도령은 본남편이오 김 도령으난 후낭군이라…”

이렇게 시작하는 ‘범벅타령’은 남편이 집을 비우자 여인이 훗사내(애인·간부)를 집에 들여 밤새 질펀하게 놀다가, 갑자기 돌아온 남편에게 들키지만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둔 것이 그리 큰 죄가 되느냐며 오히려 항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통 유교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그래서 한때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이 노래의 중간에는 달거리 형식으로 “시월달에는 흰떡범벅 / 동짓달에는 동지범벅 / 섣달에는 무수범벅 / 정월달에는 달떡범벅”이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색깔과 세시·재료·모양 등으로 명명되는 다양한 범벅이 과거 우리네 선조가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그렇지만 그때의 문화가 오히려 더 낭만적이고 인정이 넘쳐흐르는 듯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이런 소리를 만든 신명신에게 홀린 탓일까. 아니면 그 당시에는 삶 속의 한과 신명을 자연스럽게 소리로 다 풀어낼 수 있었기 때문일까.


권오경 부산외국어대학교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주요 저서로 ‘고전시가작품교육론’ ‘고악보소재시가문학연구’ ‘우리시대의 고전작가’ 등이 있다.
그림 최지은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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