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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4월호 Vol.351

과거와 현재의 조화로운 만남

세계무대┃베트남 호찌민 시립 극장 '더 미스트'

화려한 무대장치도 주목받는 스타 무용수도 없지만 오래도록 관객에게 따스한 행복감을 전하는 공연이 있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진지한 고민으로 특별한 무대를 만들어가는 곳, 우리가 베트남 무용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베트남 경제의 중심지인 호찌민의 동커이 거리에 1900년 프랑스 식민주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호찌민 시립 극장(사이공 오페라 하우스)이 있다. 건물 지붕과 장식품은 파리에서 모두 공수한 것이며, 모든 장식과 가구 역시 프랑스 작가의 작품이다. 극장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공연 관람뿐만 아니라 극장의 내·외부를 세심히 관찰하며 건축미를 감상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무용·음악·연극 등 다양한 공연이 열리고 있고, 800여 명이 관람할 수 있는 이 극장은 호찌민을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다.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외곽 지역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베트남의 시대 변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다. 먼저 30층 이상의 주상 복합 건물이 화려하게 올라가 있는 호찌민은 경제 발전이 활발하게 이뤄진 베트남의 단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외곽으로 나갈수록 10년 단위 과거로 넘어가는 듯한 도시와 농촌 풍경을 볼 수 있다.


호찌민 시립 극장은 일반 시민보다는 예술 관계자와 베트남에 거주하는 외국인 그룹, 그리고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다. 이곳에서 공연하는 여러 편의 작품 중에 아라베스크 댄스 컴퍼니의 대표이자 안무가로 활동 중인 응우옌 떤 록이 안무하고 2018년 11월까지 공연해 큰 사랑을 받았던 ‘더 미스트(The Mist)’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라베스크 댄스 컴퍼니는 베트남 민간 무용단체로서 남녀 무용수 15명으로 구성돼 있다. 그는 일본과 독일에서 유학 후 모국으로 돌아와 아라베스크 댄스 컴퍼니를 창단했다. 또 공연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소속 무용수에게 국제 콩쿠르 수상 경력을 지닌 인재로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무용단원들은 발레를 기본으로 연습하고 현대무용과 전통춤을 혼합해 다양한 무대를 만든다. 한국과 달리 정부의 지원이 없는 베트남 무용계는 각종 행사와 기업 홍보를 위한 공연으로 무용단 수입을 창출한다. 이러한 행사를 위해서도 후원자를 찾아 후원금을 모아야만 공연이 가능하다.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도 무용수들은 새로운 무대를 꿈꾼다.


‘더 미스트’는 예술과 문화 그리고 전통과 현대적 움직임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응우옌 떤 록이 2011년 대구국제무용제의 초청을 받아 만든 작품으로 2011년 9월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초연됐다. 무용수 14명과 농촌에서 자료가 될 만한 것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움직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의 초연 이후 미국과 일본에 초청을 받기도 했으며 아라베스크 댄스 컴퍼니의 대표작이 돼 지난 해 11월까지 호찌민 시립 극장에서 공연했다.


쌀·베트남 전통 바구니·아오자이(전통 의상)·전통 악기 등의 오브제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이 작품은 매년 더 나은 무대를 위해 춤과 무대 디자인을 수정·보완했다. 공연 내용은 농부의 일상과 사랑, 풍요에 대한 염원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인 현대무용의 복잡하고 추상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관객이 내용을 쉽게 이해하고 즐기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핵심은 그 안에서 베트남의 전통문화를 읽을 수 있는 춤을 보는 것이다.


또 외국인이 관객 상당수를 차지하는 만큼 지금도 평화로운 시골 마을과 분주한 도시의 대조적인 모습을 지닌 남베트남의 삶을 보여주는 ‘A O Show’와 남서고원에 살고 있는 민족 공동체의 전통을 재현하는 ‘테 다르(Teh Dar)’를 공연하며 베트남의 문화와 전통을 끊임없이 소개하고 있다.


‘더 미스트’는 단순한 구조 대신 무대 전환을 통해 관객의 집중력과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구성력과 연출력이 놀랍다. 공연은 2011년 당시, 아라베스크 댄스 컴퍼니의 부감독을 맡고 있는 응오 투이 또 늬가 듀엣 안무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홍콩까지 다녀왔을 만큼 열정도 가득 담겼다. 젊은 무용수들이 이제는 노장이 된 그녀에게 지도받으며 춤에 대한 열정과 기술을 배우고 있다.


공연은 볍씨를 뿌리는 장면의 남녀 군무에서 시작된다. 무용수들은 일렬로 서서 무대 상수에서 하수로 움직이며, 씨를 뿌리고 잡초를 솎아내는 듯한 움직임을 이어간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외국인 관광객들은 동양의 농경 문화를 춤으로 읽는다. 무대 상수 앞 별도의 공간에 전통 악기 연주자들이 자리를 잡고 라이브로 연주하며 때로는 연주자가 무대로 들어가 무용수와 함께 장면을 만들기도 한다.


객석 한편에는 베트남 전통악기인 두어 벱(Rice Sticks)이 걸려 있다. 그 용도가 궁금하던 차, 무용수가 춤으로 악기 연주법을 설명하고, 관객과 함께 리듬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이끌어낸다. 오랜 사용으로 낡고 손때 묻은 이 악기에 정이 가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때로는 너무 세련된 것보다 소박하고 순수한 것이 더 인간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공연은 군무와 듀엣, 솔로 등의 다양한 구성으로 빠르고 매끄럽게 전환된다.

 

사랑의 감정을 표현할 때는 흰색·분홍색·붉은색 천을 사용해 사랑의 강도를 위트 있게 표현했고, 촌스러울 수 있는 세트 전환은 남녀 듀엣의 수준 높은 발레로 극복했다. 또 실크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여자 무용수의 움직임에서 꽤 많은 고민과 연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랑’, 그 흔한 주제를 다양한 손짓과 움직임으로 설명한다. 남녀 무용수의 단순하지만 성실한 춤 기술에, 그리고 노력과 주제에 대한 끊임없는 집중을 바탕으로 한 몸짓에 관객들은 숨죽이고 빠져들었다.


춤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가장 인간적이고 솔직한 예술인 듯하다. 아무리 많은 무대 장치가 무대를 채우고 있어도 중요한 표현 도구는 무용수의 몸이고, 그 몸은 무용수의 감정과 사고 그리고 기술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품의 후반으로 갈수록 서커스적인 춤이 관객을 집중시킨다. 무대는 새벽을 시작으로 낮과 밤의 시간 흐름을 알리고 어둠 속으로 무용수들을 데려간다. 군무로 다시 등장한 무용수들이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올리니 비가 내리듯 무대 높은 곳에서 쌀이 한없이 쏟아져 내린다. ‘쌀’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삶의 풍요로움이 무대 위에 가득해지는 느낌을 준다.


한 달에 네 번씩 꾸준히 공연된 이 작품은 한 예술가가 보내는 편지처럼 느껴진다. 척박한 베트남에 훗날 풍요로운 미래를 기다린다는 편지…. 무용수 손에 떨어지는 쌀은 신비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새벽안개가 손에 닿아 만져지는 듯한 느낌도 든다. 환하게 웃으며 쌀을 만지는 무용수들을 보고 있노라면 함께 행복해진다. 결국, 관객은 무대와 무용수들에게 감탄의 박수를 아낌없이 보낸다.

 


세계 곳곳에서 많은 작품이 공연되는 지금, 우리는 어떤 작품을 통해 감동받는가? 기술 발전에 힘입은 화려한 무대에 매료되는 순간도 있지만, 아날로그 방식의 무대 전환에 그만의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정성을 들인 작품에서는 그것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 녹아 있다. 그런 감정을 느낄 때면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한다. ‘더 미스트’는 그런 면에서 후자에 속한다.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대 예술가의 손으로 엮어낸 것이 ‘더 미스트’다. 베트남 호찌민 시립 극장은 오늘도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시간 속에 삶의 풍요로운 수확을 기대하는 춤을 올리고 있다.

 

글 임선영 Imdance10의 대표다. 2018 해외 레지던시 작가로 선정된 후 호찌민에 거주하며 베트남 무용수들과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룬 프로덕션 Lune 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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