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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2월호 Vol.349

현실 문제 꼬집는 재미난 전통 무대

리뷰┃국립극장 마당놀이 '춘풍이 온다'

사회 이슈를 녹여낸 현실 풍자로 메시지를 던지면서도 호탕한 웃음으로 세상 시름 잊게 만드는 공연이 있다.
각기 다른 세대와 계층이 한 공간에서 경계 없이 한판 놀이를 즐기는 그런 공연.
올해도 어김없이 ‘마당놀이’가 왔다.
2018년 12월 6일~2019년 1월 20일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국립극장 마당놀이는 1980년대 마당놀이로 우리 고유 전통예술의 현대화를 주도해온 극단 미추의 대표 겸 예술감독 손진책이 연출가로 진두지휘를 맡아 선보인 프로젝트다. 1986년에 창단한 극단 미추는 전국에 마당놀이 열풍을 일으키며 마당놀이를 ‘대중예술’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지난 2010년 마당놀이 30주년 기념 공연을 무대에 올린 후 한동안 마당놀이를 공연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와 함께 새로운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함몰될 것이라는 손진책 대표의 냉철한 자기 검열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그런 그가 4년 만에 다시 마당놀이 부활에 나선 까닭은 ‘국립극장은 국민과 놀아주는 것이 의무’라는 국립극장 측의 설득 때문이다. 국립극장 마당놀이 시리즈는 이처럼 ‘놀이’라는 장르 설명에 방점을 찍고 연희 요소를 강조해 자칫 고루할 수 있는 전통예술을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연으로 만들어 첫 출발부터 객석 점유율 99퍼센트라는 흥행 기록을 쓴다.

 


2014년 출발한 국립극장 마당놀이 ‘온다’ 시리즈가 지금껏 선보인 레퍼토리는 모두 네 편. ‘심청이 온다’(2014) ‘춘향이 온다’(2015) ‘놀보가 온다’(2016) 그리고 지난해 연말 첫선을 보인 ‘춘풍이 온다’가 그것이다. 2017년에는 ‘심청이 온다’ 재공연이 진행된 까닭에 2년 만의 신작인 이번 ‘춘풍이 온다’는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 ‘이춘풍전’을 바탕으로 한다. 전작과 동일하게 이번 공연 역시 연희감독 김성녀·작가 김지일·작곡가 박범훈·안무가 국수호 등 마당놀이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이들이 다시 뭉쳤다. 또 2000년대 초반부터 극단 미추와 호흡을 맞춰온 배삼식 작가가 각색에 참여해 현대적인 감각을 살렸다.

 

지금, 바로 이 시대의 ‘이춘풍전’
보편적 인간상을 담고 있는 우리 인기 고전에서 소재를 차용한 전작들을 미루어 봤을 때, ‘춘풍이 온다’의 원작 ‘이춘풍전’ 역시 조선 말기의 시대 변화상을 반영한 세태소설이라는 점에서 어울리는 선택이다. 하지만 원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잠시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른다. 봄 춘春 자에 바람 풍風, 봄바람처럼 살라는 이름의 뜻을 잘못 타고났는지 사람 무게가 봄바람처럼 가볍기 그지없는 이춘풍은 가장으로서 무능하다 못해 가장의 역할에 관심조차 없는 천하의 뻔뻔한 난봉꾼이니 말이다. 원작 속 춘풍은 서울 다락골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방탕함을 뽐냈던 인물. 반면 부인 김씨는 주색잡기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춘풍을 대신해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는 인물로, 평양으로 돈 벌러 간 춘풍이 평양 기생 추월에게 빠져 추월의 종으로 전락하자 슬기로운 꾀를 내어 남편과 남편이 추월에게 바친 돈을 모두 되찾아온다는 이야기다. 못난 남자의 표상인 남편 춘풍과 그를 지키는 지혜롭고 어진 아내 김씨의 이야기를 통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의 모순을 고발한 작품이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탓에 다소 불편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아내를 거리낌 없이 비하하는 춘풍의 안하무인 행동이 그 예다. 가령 원작 소설 속 한 대목을 옮겨보자면 이렇다.


“평양으로 장사하러 가는 춘풍을 말리자 착한 아내 머리채를 선전시전 비단 감듯 휘휘 칭칭 감아쥐고 이리 치고 저리 치며, 천리원정 장삿길에 요망한 계집년이 잔말을 이리 하니, 이런 변이 또 있는가.”


그렇다면 국립극장이 페미니즘이 사회의 화두로 뜨겁게 떠오른 요즘 같은 때에 새로운 레퍼토리로 ‘이춘풍전’이란 카드를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마당놀이의 가장 큰 묘미는 다양한 사회 문제를 작품에 끌어들여 바로 그 시점의 현실 세태를 통쾌하게 풍자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2015년에 올라간 ‘춘향이 온다’에서는 최악의 갑질로 사회에 논란을 일으킨 일명 ‘땅콩 회항 사건’을, 이듬해에는 ‘놀보가 온다’에서 전 국민을 분노하게 한 국정농단을 거침없이 풍자해 객석에 큰 웃음을 안긴 것처럼 말이다. 고전이 지닌 가치를 유지하며 현대적인 각색으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는 마당놀이의 특징을 생각해봤을 때, 문제적 남자의 끝판왕인 이춘풍을 벌하는 ‘이춘풍전’은 현시대의 세태 풍자에 더없이 시의적절한 선택인 셈이다.

 


우리 고전소설 ‘이춘풍전’의 가치를 새롭게 해석하면 지금 이 시기에 꼭 맞는 작품이 됩니다. 그 가치는 여성입니다. 가부장적 봉건사회에서 자립한 한 여성이 남편을 구출해 가정으로 데리고 온다는 이야기지요. 이제는 여성이 순종하고 기다리는 것이 더는 미덕이 아닌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손진책 연출이 밝힌 작품 의의처럼 ‘춘풍이 온다’는 ‘여남’ 평등의 시대로 가기 위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 문제에 초점을 맞춰 원작에 담긴 여성 비하적인 시선을 거둬내고 순응하는 여성상에 반기를 든다. 또한 원작 소설과 달리 대장부 기질을 지닌 몸종 오목이 춘풍의 아내가 되며, 이러한 파격적인 결정을 제안하는 이가 오직 오목의 사람 됨됨이에 반한 춘풍의 어머니 김씨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이 같은 새로운 설정은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재미를 낳아 일석이조의 효과를 낸다. 다만 원작 소설을 비트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젠더 감수성 문제에 밝은 젊은 여성 관객에게는 여전히 아쉬움을 남기는 면이 있는데, 작품의 주된 관람객이 중장년층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무리 없는 정도의 현실 풍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형식적인 면을 따져보자면, 이번 ‘춘풍이 온다’ 역시 길놀이-고사-꽃놀이-뒤풀이로 구성되는 마당놀이의 기본 양식을 충실히 따른다. 공연 시작 전 배우들이 객석을 돌아다니며 엿을 파는 광경이나 맞은편 관객의 반응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양면 객석 구조, 무대에서 진행되는 고사에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모습 등 일반적인 공연에서는 쉽게 겪지 못할 경험은 오늘 이 자리는 함께 즐기는 놀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놀이성과 소통이 중요한 마당놀이는 무엇보다 배우들의 기량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극중 오목과 춘풍, 추월을 맡은 배우들의 익살 넘치는 연기는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관객이 공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반응을 이끌어내며 이야기의 진행자 겸 해설자 구실을 하는 꼭두쇠의 활약 또한 관전 포인트. 웃음을 자아내는 현실 패러디적인 소품 사용 또한 돋보인다. 늦은 시각 술에 취한 춘풍이 모범택시에서 모양을 따온 모범가마를 타고 등장하거나 오목이 춘풍의 돈을 다 빼앗아간 추월을 추궁할 때 쓰이는 커다란 USB 모형 등이 그러한 예. 그뿐만 아니라 욜로?소셜 미디어?비혼주의?몰카 등 화제성 있는 이슈를 끊임없이 대사에 등장시켜 우리 사회에 대한 패러디를 멈추지 않는다.


앞선 ‘온다’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변함없는 흥행 성적을 기록한 ‘춘풍이 온다’. 국립극장과 손진책 연출이 의기투합해 선보인 마당놀이 작품들은 모두 고전을 소재로 하지만, 사회 이슈를 녹여낸 현실 풍자로 생생한 현재성을 띤다.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대와 소통하는 전통이 되기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관객이 분노와 슬픔, 기쁨을 함께 나누는 축제의 자리가 되는 것이 아닐까. 마당놀이 시리즈의 제목, ‘심청? 춘향?놀보’ 그리고 ‘춘풍이 온다’는 이렇게 현실의 우리 곁으로 ‘온다’는 의미일 것이다.

 

배경희 월간지 ‘더 뮤지컬’ 편집장. 좋은 작품을 좋은 배우가 좋은 공연으로 완성해줄 때, 객석에서 나 자신이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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