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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호 Vol.347

불합리한 사회가 욕망한 이야기

시즌인문학 ㅣ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남장여성 서사

 

고전소설 ‘이춘풍전’부터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까지, 남장여성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파생된 판타지는 사회 전복 욕망과 서사의 쾌감을 두루 충족시킨다.

 


남장여성 서사의 사회적 배경
지난해 제1야당 대표가 ‘젠더 폭력’이 뭔지 몰라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그분의 캐릭터상 그깟 게 무슨 대수냐며 끝끝내 당당했던지라 일각에서는 그저 극소수 ‘꼰대’의 사례려니 치부하고 말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심지어 여성정책토론회에서 나온 이야기였으니 한국 젠더 문제의 현주소로 이보다 더 투명한 예가 있을까 싶다. 또 얼마 전 KB국민은행은 2015년 직원 신규 채용 당시 남성을 더 뽑기 위해 남성 지원자 113명의 점수를 높이고 여성 지원자 112명의 점수를 낮춘 명백한 성차별 채용 비리로 인사 담당자들이 법정에 섰다. 채용 비리에 관여한 전·현직 임직원들의 변은 단순했으니, 바로 ‘관행’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모두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여권신장을 체감하는 쪽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여성보다는 남성이라는 것도 한국의 젠더 인식 상황을 보여주는 일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종속적인 역할에 머물 줄 알았던 여성의 사회적 위상 변화가 고까운 탓인지 이들은 때때로 ‘역차별’을 부르짖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여권신장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양성평등까지는 아직도 요원하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을 ‘이등시민’으로 내몰기 일쑤다. 특히 공고한 유교사회 조선은 애초에 여성을 남성 아래 두었다. 아니, 사회적으로 여성의 존재를 아예 ‘배제’했다.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신분에 의해 벼슬길에 나설 기회조차 얻지 못한 상놈들의 선천적 한계는 서자 홍길동이나 백정 출신 의적 임꺽정 등의 인물에 대한 지지로 분출됐다. 마찬가지로 당대 억압받는 여성들의 욕망을 대변하고 표출하는 서사가 필요했음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한데 여성은 서자나 백정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도술을 부리고, 혁명을 일으키고, 공적을 세우기 이전에 우선 남성이라는 거대한 장벽과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남성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 여성은 하는 수 없이 일단 남자가 되어야 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남장여성’ 서사가 꾸준히 등장하는 데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같은 이유에서 조선시대 출간된 한글 소설 중에는 유독 남장여성을 앞세운 것이 많다. ‘이춘풍전’은 주색잡기로 가산을 탕진한 이춘풍이 아내에게 망신당하는 내용을 그린 풍자소설이다. 영민한 아내가 무능한 남편을 바로잡는다는, 당시 유행한 여러 이야기 중 한 편이지만 무엇보다 남성 중심 사회를 향한 신랄한 비판과 해학이 돋보인다. 한량 이춘풍은 그동안의 과오를 씻고 개과천선하겠다며 평양으로 장사하러 가지만 오히려 기생 추월에게 빠져 돈을 몽땅 날리고 그 집 머슴 신세로 전락한다. 이때 이춘풍의 아내는 남장을 하고 평양감사의 비장(裨將)이 되어 남편을 찾아간다. 그러고는 추월을 엄히 꾸짖고 그에게 돈을 받아내 춘풍에게 돌려준다. 이후 춘풍은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허풍을 떨지만 곧 춘풍의 아내는 비장의 옷을 입고 나타나 남편에게 진실을 밝힌다.


‘방한림전’ ‘쌍완기봉’ 등 이본이 존재하는 ‘낙성전(落星傳)’은 더욱 파격적인 방식으로 남장여성의 영웅적 면모를 그린다. 남성으로 키워진 여성 방한림은 또 다른 여성 영혜빙과 결혼한다. 영혜빙은 남성에게 종속당하는 것이 싫어 방한림이 여자임을 알고도 혼인을 약속하고, 방한림 역시 혼례 후 혜빙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비밀을 지킬 것을 약조받은 뒤 함께 부부로 살아가기를 맹세한다. 이후 방한림은 대원수가 되어 오랑캐의 난을 평정하고 마침내 승상의 자리에 오른다.


‘홍계월전’의 여주인공 홍계월 역시 부모와 헤어진 뒤 남성으로 자라 훗날 대원수 직책에 오르며, ‘여장군전’으로 알려진 ‘정수정전’ 또한 남장을 하고 남성 세계로 뛰어든 여성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이 골자다.


세 작품의 결말 또한 엇비슷하다. 이들은 모두 가장 높은 공직에 오른 뒤 왕에게 여성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왕은 그가 여성임을 알고 난 뒤에도 이들을 내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한다. 그가 여자건 남자건 혁혁한 공을 세운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정함으로써 여성이라는 선천적 조건이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음을 자연스레 확증한 것이다. 이렇듯 남장을 한 여성영웅을 앞세운 일련의 작품들은 이들의 자아실현을 통해 진취적인 여성상을 제시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에 당당히 반기를 들었다. 남장여성은 견고한 남성 사회를 흔들고 당대 여성이 욕망하는 판타지를 대변한 주체였다.

 

 

사회 전복 욕망과 입체적인 서사의 쾌감
비단 유교 사회인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남장여성의 이야기는 꾸준히 향유되고 있다. 게다가 몇몇 작품은 현대사회 역시 남성 위주의 사회임을 적시하기 위해 부러 남장여성을 앞세운다. 영화 ‘가슴 달린 남자’(1993)는 제목이 천명하는 그대로 과거 여장부들과 마찬가지로 남장을 ‘할 수밖에 없는’ 여성을 통해 불합리한 현대사회의 초상을 전시했다. 혜선(박선영)은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허드렛일만 도맡는 자신의 처지를 통감하고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남자가 되기로 한다. 감쪽같이 남장을 하고 주민등록증까지 위조한 그의 도박은 성공적이었다. 이후 혜선은 일류 기업에 취직해 회장이 주관하는 특급 프로젝트를 도맡으며 승승장구한다. 영화는 차츰 로맨스를 곁들이며 종국엔 혜선이 다시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결말에 이른다. 일찍이 불합리한 대우의 원인을 성별에 의한 차별로 정확히 재단하고, 이를 남장여성이라는 자극적인 장치로 풀어냄으로써 여성의 사내 입지 문제를 건드린 작품으로 평가할 만하다.


영화 ‘미인도’(2008)는 드라마 ‘바람의 화원’(2008)과 마찬가지로 화가 신윤복이 여성이라는 가정으로 조선 정조시대 도화원에서 활약한 김홍도와 신윤복의 비극적인 말로를 그려냈다. 오빠 윤복을 대신해 그림을 그려주던 여동생 윤정(김규리)은 윤복이 자살하자 본격적으로 그의 삶을 대신한다. ‘미인도’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가문의 부흥을 위해 남자로 가장해야 했던 재능 있는 여인의 불운한 삶을, 에두르지 않고 서민들의 풍습과 진솔한 욕망을 해학적으로 그려낸 속화(俗)와 대비시킨다. 그러면서도 여성 신윤복이 지닌 선구적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영웅의 속성으로 수렴하진 않는다. 그 대신 윤복이 그린 속화를 저속하고 음탕한 그림이라며 인간의 본성 자체를 거세하도록 강요한 남성 중심 사회의 위선이야말로 여성 윤복을 억압하는 기제임을 십분 부각한다.


물론 늘 사회의 불평등을 겨냥하기 위해 남장여성들이 활약한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남장여성을 앞세운 일련의 TV 드라마는 로맨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한층 가벼운 시선으로 여성의 고락을 담아냈다. ‘성균관 스캔들’(2010), ‘구르미 그린 달빛’(2016)의 여주인공은 각각 성균관 유생, 왕을 보필하는 내관이 되어 남성 세계에 안착한다. 모두 조선시대 남성의 전유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중심은 여자라는 정체를 숨긴 탓에 벌어지는 이색적인 위기와 아슬아슬한 로맨스, 동성 간의 감정이라 착각한 데서 발생하는 미묘한 긴장감에 있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2007)과 ‘미남이시네요’(2009)와 같은 현대물도 마찬가지다. ‘커피프린스 1호점’의 소녀가장 주인공 고은찬(윤은혜)은 여성임을 숨기고 카페에 취직하고, ‘미남이시네요’의 고미녀(박신혜)는 쌍둥이오빠 고미남을 대신해 보이밴드의 일원이 되어 활동한다. 두 작품 모두 여주인공이 남자 행세를 함으로써 겪는 크고 작은 해프닝을 청춘 로맨스 장르에 이식해 색다른 맛을 더했다.


서구 작품에서도 남장여성의 함의는 그대로 유지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1998)은 중국을 배경 삼아 오리엔탈리즘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조선시대 한글 소설에 등장한 남장여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이 전쟁 영웅으로 활약하는 전략을 그대로 답습한다. 반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십이야’를 원작으로 한 영화 ‘쉬즈 더 맨’(2006)은 무대를 현대 고등학교로 옮겨 완연한 틴에이저 코미디를 표방한다. 그러나 그 기저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다. 쌍둥이오빠로 가장해 좌충우돌하는 여주인공의 동인(動因)은, 여자는 남자보다 축구를 잘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고자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의 황용은 남장을 하고 강호라는 남성 중심 공간에서 빛나는 주역으로 활약한다. 뭇 남성을 압도하는 무공과 탁월한 지혜가 더욱 특별한 전복의 쾌감으로 이어진 것은 물론이다. 이렇듯 시대를 초월해 지금까지도 남장여성이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사랑받는 것은 결국 전복이 건네는 두 가지 효과 때문일 것이다. 평면적인 서사를 전복하고 나아가 불합리한 사회를 전복하고 싶은 욕망.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시대에 이 같은 전복의 욕망이 이렇게나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DVD2.0’ ‘Film2.0’ ‘브뤼트’ 등 매체의 기자를 거쳐 영화·만화·장르소설·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그림 김남희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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