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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호 Vol.347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다

SPECIAL │연출가 손진책

 

“지금 여기에서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 3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어져오는 마당놀이의 의미이자 역할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마당놀이 ‘춘풍이 온다’와 만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연출가 손진책이 2003년 제13회 이해랑연극상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마당놀이의 대가가 한국 최고의 연극상을 받았다’며 떠들썩했다. 하지만 필자에게 손진책의 연극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90년대 대학로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본 아리엘 도르프만의 ‘죽음과 소녀’였다.


그것은 민주화 직후의 한국 사회에서 이제는 화석처럼 여겨지던 과거사의 상처가 봉합을 뜯고 분출하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놀라운 것은 김성녀·신구·권성덕이라는 단 세 배우가 연기하는 그 넓은 무대가 바늘 하나 꽂을 틈조차 없이 꽉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충격은 2016년, 이해랑연극상 수상 배우 9명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모두 돋보이게 만든 역사적인 공연 ‘햄릿’으로 이어졌다.


이 충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릇 대가란,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 정극과 마당놀이의 두 장르에서 모두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정극과 마당놀이라는 장르를 구분하는 시도 자체의 허망함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다른 경로를 통해 당대 관객의 심성에 호소한다는 점에선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작품들이다.


지난 30년 동안 이 땅에 마당놀이 선풍을 불러온 손진책 연출은 4년간의 ‘휴식’을 거쳐 2014년 12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 ‘심청이 온다’로 마당놀이 장르를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이후 ‘춘향이 온다’(2015), ‘놀보가 온다’(2016)와 ‘심청이 온다’의 재공연(2017)을 거쳐 2018년 말 올리는 다섯 번째 작품이자 2년 만의 신작은 ‘춘풍이 온다’다. 연습에 한창인 그를 11월 초 점심시간에 국립극장 뜰아래 연습실에서 만났다.

 

춘풍이 온다’는 당당하고 자립적인 여성의 이야기
수많은 마당놀이 소재 중에서도 네 번째 신작으로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우리 고전소설 ‘이춘풍전’의 가치를 새롭게 해석하면 지금 이 시기에 꼭 맞는 작품이 됩니다. 그 가치는 ‘여성’입니다. 가부장적 봉건사회에서 한 자립적인 여성이 남편을 구출해 가정으로 데리고 온다는 이야기지요. 최근 ‘미투 사건’에서도 드러났지만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여권신장이 화두로 떠오른 때입니다. 이제는 여성이 순종하고 기다리는 것이 더는 미덕이 아닌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보자’고 생각했지요.

 

그 때문에 원작 ‘이춘풍전’과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춘풍이 평양으로 갈 때 원작에서는 자기를 말리는 아내를 때리는 장면이 나왔지요. 그런데 이번엔 춘풍이 오히려 아내인 오목이(원작에는 몸종으로 나옴)한테서 얻어맞습니다.

 

혹시 남성에 대한 역차별로 보이지 않을까요.
이건 어디까지나 풍자와 해학에서 나오는 장면입니다. 우리 전통 연극의 특징은 희극 정신에 있지요. 가난을 눈물 질질 짜며 표현하는 게 아니라, 웃음으로 뛰어넘는 겁니다.

손 연출은 “마당놀이는 두 시간 동안 길놀이·고사·본놀이·뒤풀이로 이어지는 형식을 통해 관객이 극 속으로 들어가는 예열 과정을 거쳐 마침내 대동(大同)으로 하나가 되게 한다”라고 설명했다. “공연 마지막 부분에서는 춘풍과 그를 유혹한 평양 기생 추월 중 누가 더 잘못했는지 관객의 박수를 통해서 결정하도록 할 겁니다.” 물론 반응에 따른 두 가지 시나리오가 다 준비돼 있지만, 점점 추월을 응원하는 관객이 많아지리라는 예상이다.

 

30년 전성기, 4년 휴식, 그리고 ‘부활’
1981년 ‘허생전’을 시작으로 그가 ‘마당놀이’란 장르를 만들어낸 뒤 30년은 실로 ‘마당놀이의 시대’라 할 만했다. 그사이 ‘심청전’ ‘춘향전’ ‘흥부전’ ‘놀부전’ ‘홍길동전’ ‘이춘풍전’ ‘토선생전’ ‘변강쇠전’을 비롯한 숱한 마당놀이 공연이 전국 순회는 물론 해외에서도 펼쳐졌다. 해마다 국내에서만 20만~30만 명이 봤다고 할 정도다.
MBC와 함께 처음 마당놀이 ‘허생전’을 할 때였어요. 그때 MBC 사장이 절대 안 웃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공연 중에 힐끗 보니 웃느라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더라고요. ‘아, 이거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해마다 설 명절이면 TV에서도 마당놀이를 방송해줬다. 한번은 전주 공연장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차를 탄 배우들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그런데 2010년 이후 한동안 마당놀이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30년을 하고 나니 매너리즘에 빠진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스스로 문을 닫은 겁니다. 그렇다고 공연 장르 자체를 없앤 건 아니고, 이제는 새로운 세대와 함께 새로운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4년이 지나니 국립극장에서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한 번 하고 말 거면 안 하겠고, 매년 한다면 하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4년 만에 ‘부활’한 마당놀이는 뜻밖에도 남산 중턱 높이만큼이나 일반 관객에겐 높다고 느껴질 만하던 ‘고급 공연장’,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국립극장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죠. 공간을 두고 같이 앉아서 소통과 놀이를 중심으로 펼치는 공연이니까요. 무대와 객석이 혼연일체되는 공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잖아요.

 

 

형식은 ‘전통’, 내용은 ‘현재’
2014년에도 마당놀이가 될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람들은, 그해 12월 10일 개막한 ‘심청이 온다’를 보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중 한 사람이던 필자는 이틀 뒤 조선일보에 이렇게 썼다.


‘심청이 온다’는 ‘마당놀이’라는 한국 특유의 공연 장르가 4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선언과 같았다. 노래와 춤, 연기와 연주가 하나로 어우러져 코앞에서 흥겹게 펼쳐지는 공연에 장유(長幼)가 뒤섞인 객석은 열광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연말 가족 공연 시장을 장악할 기미도 보인다. “두 시간이 어떻게 그렇게 후딱 지나갔는지 모르겠더라고!” 공연이 끝나자 한 20대 여성이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로 동행한 친구들에게 말했다.(하략)


손 연출은 “낮에는 나이 든 관객이, 밤에는 젊은 관객이 객석을 꽉 채웠다”라고 회고했다. 관객들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게 한 것은 ‘바로 그 시점’의 현실 풍자에 있었다. 심 봉사는 “청아, 땅콩은 접시에 담아 왔느냐?”라며 개막 직전에 일어난 ‘땅콩 회항 사건’을 풍자했고, 교양 없다는 타박에 “뭐, 내가 어떤 양반처럼 벌건 대낮 골프장에서 꾹꾹 찔러본 것도 아니고”라며 유명 정치인의 성희롱 사건을 비꼬았다. ‘소녀 가장 알바생’으로 등장하는 심청은 어이없다는 표현으로 “캐안습, 캐짜증, 대~박!”이라고 외쳤다. 그때마다 관객은 열광했다.

 

그런 현실 풍자가 마당놀이의 중요한 요소겠군요.
1980년대 마당놀이에서도 그 부분이 중요했습니다. 제5공화국 시절 ‘별주부전’에서 ‘독재를 일삼는 문어대왕’을 등장시킨 적도 있습니다. 워낙 사회 풍자를 많이 하니까 나중에 방송에선 자체 검열을 할 정도였지요.

 

듣고 보니 잡혀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인데,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까?
마당놀이의 ‘마당’이란 건 말이죠, 멍석을 깔아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두 발을 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놀이’란 무엇인가요? 즐겁게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것, 인간다운 가치를 찾아낸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작품 속에 사회문제가 함축돼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형식에선 전통, 내용에선 현재를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마당놀이라 할 수 있겠지요.

 

‘살아 있는 연극’이 곧 마당놀이
부활한 마당놀이는 객석 점유율 99퍼센트를 기록하며 일명 연말연시 필견(必見)의 공연으로 다시 자리 잡았다. ‘심청이 온다’가 소녀 가장 청이의 생명력을 강조했다면 ‘춘향이 온다’는 가부장적 사회를 뚫는 사랑의 적극성을, ‘놀보가 온다’는 부(富)의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당대 풍자도 계속됐다. ‘춘향이 온다’의 변 사또는 체포돼 가면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고 외쳤고, ‘놀보가 온다’는 놀보가 탄 박에서 갑자기 ‘최순실’이 등장해 관객의 배꼽을 뺐다. 손 연출은 “그때그때 불거진 시대 상황을 자연스럽게 극에 녹여왔다”라고 말했다.

 

연출가의 능력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출연진과 스태프 덕도 많이 봤습니다.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원에 예술감독 김성녀·작곡 박범훈·안무 국수호·각색 배삼식 같은 ‘최고’들이 참여한 공연 아닙니까?
전문성이 보강됐다고 봐야죠. 국립창극단 배우들은 놀이 정신이 풍부하고 기량도 뛰어납니다. 소리면 소리, 연기면 연기 못하는 것이 없어요. 이광복과 김준수는 ‘국악계 아이돌’이라 할 만하고, 서정금과 조유아는 걸쭉한 연기로 관객을 속 시원하게 해주지요. 배삼식 작가 뱃속 에는 ‘영감’과 ‘소년’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새로운 시대의 얘기를 튀지 않게 녹여내는 능력이 일품입니다.

 

이제 국립극장 마당놀이도 5년째에 접어드는데, 새로운 마당놀이 전통이 생겼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 연말연시 마당놀이를 기다리는 고정 팬이 생긴 것 같습니다. 지난 4년 동안 마당놀이 관객층을 넓혔다는 나름대로의 자부심도 생겼고요. 관객 반응이 이렇게 현장에서 곧바로 나오는 공연이 없습니다. 한 영국 평론가가 마당놀이를 보고 “내가 본 중에서 가장 살아 있는 연극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마당놀이가 따로 있고 연극이나 예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석재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1990년대 초부터 공연 마니아로 대학로를 들락거렸으며, 2014년부터 3년 동안 공연 담당 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다시 초야의 관객으로 돌아와 종종 공연장에 출몰하고 있다.

사진 전강인

 

국립극장 마당놀이 ‘춘풍이 온다’
날짜    2018년 12월 6일~2019년 1월 20일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관람료 전석 5만 원
문의    국립극장 02-228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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