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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호 Vol.345

공간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라

SPECIAL┃무대디자이너 정승호의 '방'

어떤 사람이 방에 머물렀다가 떠나고, 그가 떠난 자리에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

공간에는 떠난 사람이 남긴 기억과 새로운 사람이 심은 기억이 뒤섞인다.

방이 무대가 되는 만큼, 무대 세트 역시 제3의 무용수가 된 듯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국립무용단의 2018-2019 시즌 프로그램을 보면 지난 시즌에 비해 신작의 비중이 높아진 것이 눈에 띈다. 매 시즌 레퍼토리와 신작의 비중을 항상 균형 있게 배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어느 시즌에는 레퍼토리의 비중이, 또 어느 시즌에는 신작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시즌제 도입 초기 무용단의 행보가 단체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던 대형 무용극에서 탈피해 한국 컨템퍼러리 작품을 개발하는 데 주력해왔다면, 시즌제가 안정기에 접어든 최근에는 전통 작품에 새로운 옷을 입히는 전통의 현대화 작업과 현대무용가와의 협업을 통한 컨템퍼러리 작품 창작이라는 두 트랙이 강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번 시즌, 명절 공연과 ‘색동’ ‘가무악칠채’ 등 전통의 색채가 짙은 라인업 가운데 현대무용가 김설진 안무의 ‘더 룸’은 그래서 더욱 눈에 띄는 작품이다. 그동안 현대무용가를 초청해 만든 안성수의 ‘단’과 ‘토너먼트’(안무 안성수·윤성주), 류장현의 ‘칼 위에서’, 신창호의 ‘맨 메이드’ 등이 일궈낸 성취를 몸으로 간직한 국립무용단 무용수들과 김설진의 만남은 어떤 무대로 나타나게 될까.

 

우리에게 ‘방’이란
‘방’은 ‘집’과 다르다. 한국 사회에서 오랜 시간 ‘집’은 그 자체로 한 사람이 인생을 걸고 추구하는 목표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그가 어떤 집에 사는지 알면 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집에 사느냐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줬다.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결승선에 도달한 육상선수처럼 거친 호흡을 내쉬며 움직이던 발을 멈춘다. 집은 나와 내 가족을 보호해주고 쉴 수 있게 하는 곳으로 정착과 안정이라는 정서를 공유한다. 집은 우리가 돌아갈 최후의 보루이자 물리적 혹은 정서적 안식처인 셈이다.


그러나 ‘방’은 다르다. 우리는 ‘집에 산다’고 말하지 ‘방에 산다’고 말하지 않는다. 삶 전체가 담겨 있는 집과는 달리 방은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삶의 극히 일부가 담겨 있을 뿐이다. ‘방’은 누군가에게는 안식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고립, 폐쇄된 단절의 공간이기도 하다. 방은 집의 일부로 집이 갖는 정서를 공유하는 한편 집의 일부밖에 될 수 없는 방의 속성과 함께 한시적인 것, 빌린 것, 가변적인 것이라는 불안의 정서도 동시에 품고 있다.


‘방’은 안무가 김설진에게도 매우 중요한 주제다. 김설진은 2013년 솔로 작품인 ‘Room’, 2016년에는 그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무버에서 다섯 명의 무용수가 각자의 방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Room’을 발표했다.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선정작 ‘안녕’에서 김설진은 자신이 살았던 방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해 정부의 실효성 없는 부동산 대책을 비판하는 뉴스 앵커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방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아내기도 했다.


제주도 출신인 그는 춤을 추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고, 다시 벨기에로 떠나 피핑 톰 무용단에서 오랜 기간 활동했다. 집을 떠나온 경험과 오랜 외국 생활, 투어 공연을 하는 동안 호텔에서 호텔로 옮겨 다녀야 했던 기억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머릿속에 방에 대한 특별한 인상을 자리 잡게 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과 ‘방’에 대한 기억, 그렇다면 ‘더 룸The RoOm’을 준비하는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은 김설진의 방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여줄 것인가.

 

 

움직이는 방, 관객에게 말을 걸다
김설진은 이번 작품에서 사람이 방에 머무르며 남겨놓기 마련인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이 방에 머물렀다가 떠나고, 그가 떠난 자리에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 공간에는 떠난 사람이 남긴 기억과 새로운 사람이 심은 기억이 뒤섞인다. 사람들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만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며, 그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들이다.


김설진이 만들어내는 방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무용수의 움직임 못지않게 관심이 가는 것은 무대 디자인이다. 무용 작품의 무대는 대개 무용수의 움직임을 잘 보여주기 위해 비어 있거나 이들이 잘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재 역할을 맡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방이 무대가 되는 만큼, 방으로 표현된 무대 세트가 제3의 무용수라도 된 듯 출연진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갖는다.


‘더 룸’의 세트 디자인은 무용수의 이야기를 돕는 한편 그 자체로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김설진은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방을 만들기 위해 세트 디자인에 매우 디테일한 요소를 요구했다. 방을 방으로 구획 짓는 벽체뿐만 아니라 내부를 구성하는 가구와 소품, 침대나 소파, 옷장 등 모두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트가 멀뚱히 배경으로만 머무른다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무용수가 무대 세트에서 숨은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무대 세트는 무용수의 이야기를 품어주는 식으로 무용수와 세트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해진다. 무용수들에게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김설진의 까다로운 요구 사항을 반영한 세트를 만들기 위해 국립무용단과 ‘리진’(2017)으로 인연을 맺은 무대 디자이너 정승호가 ‘더 룸’에 참여했다. 무용보다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 더욱 유명한 그는 연극 ‘풍찬노숙’ ‘됴화만발’,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 ‘스위니 토드’ ‘쓰릴 미’ ‘번지 점프를 하다’ ‘레베카’ 등 여러 작품에서 크게 호평받았다. 특히 뮤지컬 ‘레베카’에서 댄버스 부인이 작품의 주제곡인 ‘레베카’를 부르는 장면의 무대 전환이 인상적이다. 방이 발코니로 바뀌는 이 장면은 뮤지컬 팬 사이에서 크게 회자되며 명장면으로 남았다.


박스 형태를 활용한 특유의 디자인으로 ‘정승호 스타일’을 만든 무대 디자이너 정승호와 ‘더 룸’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인 듯하다. 그는 이 작품의 무대 디자인에 들어가기 전 콘서트 무대에서 이미 김설진과 협업한 적이 있고, 또한 미국 유학 경험을 통해 김설진이 외국 생활을 하는 동안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방이 어떤 형태인지도 잘 알고 있다. 안무가가 원하는 무대의 상像을 이해하고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적임자인 셈이다.


정승호와의 인터뷰는 세트 제작이 완성되기 전에 진행돼 아쉽게도 세트를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하고 도면을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도면에는 안무가의 요구 사항과 이를 반영했을 때 적용해야 할 사항이 빼곡하게 적혀 있어 무대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는 물론 안무가와 디자이너 사이에 오간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완성된 무대가 어떨지 궁금해하는 필자에게 정승호는 실제 무대를 보게 되면 관객들이 ‘저기서 어떻게 무용을 하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실감 있는 방을 보게 될 것이라고 힌트를 줬다. 안무가가 섀도 같은 음영 효과를 선호하는 만큼 세트와 인물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주목해보라는 말을 덧붙이며. 실제 방과 흡사한 세트 안에서 움직임이 중심이 되는 무용 공연이 이뤄지고, 그 안에서 무용수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여주고 관객은 이를 어떻게 볼 것인지 기대가 크다고 했다.


정승호의 무대관은 무대 세트가 또 다른 배우여야 한다는, 그래서 무대가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배우처럼 말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공연의 무대 역시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변화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 단순히 움직임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이야기를 하듯이 무대도 관객에게 다가가면 어떻겠느냐고 김설진에게 제안했고, 그 제안이 반영돼 전환무대가 최종 디자인으로 결정됐다.


무용 공연에서 전환무대는 대개 무대 바닥이 회전하거나 상승 또는 하강하며 무대 위의 움직임을 더욱 역동적으로 보이게 한다. 같은 이유로 세트가 이동하며 무대의 표정을 바꾸는 경우는 흔치 않다. 국립무용단 공연으로는 지난해 선보인 ‘춘상’이 그 예다. 무대에 벽을 세우고 벽 안쪽에 기둥이 있고 반대쪽에는 계단이 붙어 있는 세트가 사용됐다. 이러한 장치로 공간의 안과 밖을 구분 지으며 장면 전환을 보여주었다. 김설진과 정승호의 움직이는 방 안에서 무용수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여줄 것이며, 움직이는 방은 관객들에게 어떤 말을 걸어올 것인가. 신작 공연을 기다리는 것은 항상 두근거리는 일이지만 두근거리며 기대할 요소가 한 가지 더 늘어났다.
 
윤단우 작가·무용칼럼니스트. 주로 사람과 사랑과 삶에 관한 생각의 편린을 글로 쓰며 댄서가 반짝이는 무대와 숨찬 마감이 기다리는 책상 앞을 오간다.


사진 전강인

 

국립무용단 ‘더 룸’
날짜     2018년 11월 8~10일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관람료  R석 4만 원, S석 3만 원
문의     국립극장 02-228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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