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빠른예매 바로가기 사이트 지도 바로가기
월간미르 상세

2018년 10월호 Vol.345

하나의 방, 아홉 개의 기억

SPECIAL┃공연 미리보기

김설진이 가진 수백 개의 엠비언스가 하나씩 열릴 때마다 아홉 명은 기억 속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순서대로 짜인 춤 또는 마임, 연기가 아닌 마음의 소리가 이끄는 대로.

 

 


현대무용가 김설진. 벨기에 피핑 톰 무용단에서 활약하면서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은 독보적 무용수다. 국내에서는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댄싱9’의 우승자이자 가수 이효리의 춤 선생으로 알려지면서 가장 대중적인 무용가가 됐다.


그런 그에게 최근 ‘연기자’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다. 이명세 감독의 단편영화 ‘그대 없이는 못 살아’(2017)의 주인공과 KBS 드라마 ‘흑기사’에서 양장점 직원 양승구로 출연한 덕분이다. 이른바 자타 공인의 ‘비디오 스타’가 됐다. 단순히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해서 ‘스타’라고 하지는 않는다. 대중 앞에 선 김설진은 ‘갓설진’이란 별칭에 손색없는 멋진 연기와 춤 실력을 뽐냈다. 항간에서 순수예술가가 왜 연기에 도전하느냐며, 상업적 유혹에 빠진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영상 속에서 캐릭터와 일체를 이룬 그를 본 관객은 새로운 도전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대 없이는 못 살아’에 나오는 회전목마 공중 키스신, ‘흑기사’에서 보여준 능청맞고 신비로운 양승구의 자태. 김설진이 아니면 과연 누가 소화할 수 있을까. 대체 불가하지 않은가.

 

“연기와 춤은 나를 표현하는 다른 언어일 뿐”
국립무용단 신작 ‘더 룸The RoOm’의 안무가로 돌아온 김설진을 만났다. 새로운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연기와 춤의 경계를 오가는 최근의 행보를 본인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물어봤다.


“제가 하고 싶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업은 ‘몸의 표정’을 담아내는 거예요. 얼굴에 표정이 있듯이 몸에도 표정이 있으니까요. 연기와 춤 모두 인물(캐릭터)을 분석하고 감정과 반응을 드러내는 건데, 표현 방법은 중요하지 않죠. 그것이 말이든 춤이든, 모두 제 언어니까요.”
그는 비록 대사를 하지는 않지만 인간 내면의 감정을 끄집어내 켜켜이 쌓아 극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작업해왔다. 즉, 연극과 무용의 경계가 그리 중요하지 않듯이 연기와 춤의 경계 또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마치 김설진이 그간 몸담아온 피핑 톰 무용단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듯했다. 춤의 기술은 곧 신체 언어의 일부이며, 그것을 사용하고 안 하고는 대사의 유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점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제게 안무는 등장인물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함께 무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솔로가 아닌 이상 여러 명이 출연하는 작품을 만들 때는 작품의 총연출가로서 무용수 개개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것에 몰입해야 하죠. 그런데 연기할 땐 제 캐릭터 하나만 고민하면 돼요. 단출하죠. 하지만 카메라에 담는 작업은 여러 테이크를 모아 하나의 장면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신경 쓸 일이 많아요. 소품 하나에도 엄청 신경이 쓰여요. 하찮은 소품의 위치조차 카메라로 담아보면 더 잘 보이거든요. 저 같은 완벽주의자는 어차피 신경 쓸 일이 많긴 하네요.(웃음)”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찰나의 예술(공연예술)’과 편집이 가능한 ‘영상예술’의 차이를 몸소 체험하면서 새로운 ‘김설진표 미장센’을 터득한 것 같다. 그렇다면 신작 ‘더 룸’에서도 새로운 미장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춤언어로 다듬어진 국립무용단원과 함께 하는 작업이라 어떤 식으로 무대를 연출할지 더욱 궁금해졌다. 김설진은 아직 작업 초기 단계라며 말을 아꼈지만, 의외로 선뜻 연습실 문을 열어줬다.

 

몸짓, 영혼을 담는 그릇
커다란 연습실에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듯, 무용수 아홉 명이 다섯 개의 방에 나눠 들어가 있다. 첫 번째 방에는 ‘태평무’를 추는 김현숙과 그 옆에서 리드하거나 시중을 드는 윤성철?황용천이 있다. 두 번째 방에는 헤어드라이어를 손에 들고 긴 전선을 수건 삼아 ‘살풀이춤’을 추는 김은영이 있고, 옆방엔 와인병과 잔을 들고 최호종의 등에 업혀 있는 박소영이 있다. 인형이 살아 움직이는 듯 김병조의 곁을 떠나지 않는 문지애가 네 번째 방을 채우고, 마지막 방에는 이 모든 상황을 조정하듯 격렬한 움직임으로 세상의 에너지를 끌어모으는 김미애가 있다.

 

“아홉 명은 각자의 방이 아니라 하나의 방에 있어요. 영사기를 돌리듯이 그들이 가진 기억의 흔적을 담은 방(‘더 룸’)이 작품의 모티프입니다. 하나의 공간에 시간이 덧입혀지면서 여러 인간의 모습이 겹쳐지죠. 인생의 관찰자와 같은 방에는 공간의 역사를 담은 초현실주의 그림이 그려질 겁니다. 서로 다른 캐릭터들이 따로 또 같이 블랙코미디를 만들죠. 공간이 기억하는 사람 이야기, 인간 내면의 이야기가 될 겁니다.”


방을 배경으로, 그곳에 사는 이의 이야기를 풀어낸 무용 작품이 떠올랐다. 인간관계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옴니버스로 묘사한 마츠 에크의 ‘아파트먼트’, 흰 벽의 방을 배경으로 분절과 반복을 표현한 맨 드레이크·토메오 베르헤스의 ‘공공 해부학’은 주거 공간이 모티프가 된 수작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는 건 동일해요. 하지만 ‘더 룸’은 무용수 개개인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그들의 삶을 반영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디션에서 뽑힌 무용수 아홉 명과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용수들은 안무가가 만든 이야기와 춤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작품에 쏟아내고 있죠.”


 

국립무용단이 최근 몇 년 동안 동시대성을 반영한 창작 작업을 활발하게 해왔지만, 무용수가 자신의 이야기로 극적 스토리를 만드는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설정과 즉흥을 통한 창작은 연극과 무용의 경계를 허문 독일 피나 바우슈의 탄츠테아터 이후 많은 컨템퍼러리 댄스의 안무 방식이 됐다. 그래도 처음 시도하는 이들에겐 낯설지 않을까.

 

“초기엔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 함께 영화를 보거나 여러 주제로 토론을 하면서 ‘사고’를 열었어요. 그리고 저만의 레시피(김설진은 자신의 안무법을 이렇게 표현했다)가 있는데요. (잠시 망설이다가) 세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날이었어요. 무용수 아홉 명에게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을 이야기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안해’로 마무리해달라고 했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방패를 만들어드렸죠. 거짓말이어도 상관없다고. 또 한 가지 약속은 끝난 뒤에 ‘진짜야?’라고 서로 묻지 않기로 한 것. 모두가 진지하게 참여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비밀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날 저는 무엇을 확신했습니다. 이후 작품의 씨앗들이 만들어졌고, 영화 같은 삶을 풀어내고 있어요. 춤동작이 될 수도 일상의 움직임일 수도 있지만, 무엇이든 그 안에 영혼을 담을 겁니다. 영혼이 없는 창작은 무의미하니까요.”


정신분석학에서 다루는 심리극의 전개와 흡사하다. 복제된 움직임을 반복하는 게 싫어서 현대무용에 입문한 김설진도 감정 표현과 춤이 잘 어우러지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고, 여러 레시피와 만나면서 비로소 내면 연기가 자유자재로 가능해졌다고 한다. 움직임과 연기가 겉돌거나 분리돼 있는 것을 조화롭게 반죽하는 과정이 무척 어렵긴 하지만, 한번 경험하면 다시 분리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어느새 ‘무용수’라는 호칭이 낯설어졌다. 나도 모르게 ‘등장인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김설진의 작은 컴퓨터에 저장돼 있는 수백 개의 ‘엠비언스(분위기를 만드는 음향 또는 음악)’가 하나씩 열릴 때마다 아홉 명은 마법에 걸린 듯 기억 속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순서대로 짜인 춤 또는 마임, 연기가 아닌 마음의 소리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서.


인간이 예술을 통해 갈망하는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카타르시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비극을 감상하는 이유가 배우의 정서를 대리 경험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는 ‘더 룸’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내면의 진실과 마주하는 공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잠겨 있는 상처나 콤플렉스를 끄집어내 치유하려고 할 것이다. 아홉 명이 번갈아가며 쏟아내는 기억의 흔적 속에서 어쩌면 오래전 잃어버린 나의 기억을 찾을지도 모른다. 나의 경험, 나의 삶, 그리고 나의 상처가 낡은 영사기가 돌아가듯 서서히 오버랩될 테니까.
 
장인주 무용평론가. 발레를 전공했고, 프랑스 파리1대학 무용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문무용수지원센터 이사장, 서울문화재단 이사를 지냈다.

 

 

사이트 지도

사이트 지도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