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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4월호 Vol.339

효(孝)외의 가치를 읽다

시즌인문학┃대중문화 속 오늘의 심청

 

 

 

고전은 꾸준히 읽히며 시대별로 다르게 해석되곤 한다. 판소리 소설 ‘심청전’도 그렇다. 오늘날 대중문화 콘텐츠는 심청전의 유교적 가치보다 인물 관계를 흥미롭게 읽어낸다.


눈먼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소녀 심청의 극진한 효성 이야기. 바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고전소설 ‘심청전’이다. ‘심청전’은 조선시대 쓰인 한글 소설로 판소리 다섯바탕 중 하나인 ‘심청가’를 바탕으로 한 대표적인 판소리계 소설이다. 구전설화를 집약해 완성한 판소리와 이를 토대로 한 판소리계 소설의 특성상 저자나 창작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용만큼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 만큼 확고히 정립된 편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80여 종의 판본은 모두 작중 화자의 일정한 시점에 의해 서술되고 있으며 캐릭터의 역할과 성격은 물론 서사 또한 균일하다. 더욱이 다른 판소리계 소설과 달리 비교적 해석의 여지가 별로 없는 편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대주제는 ‘효孝’.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일방적인 섬김이나 봉양에 가두는 것이 구태의연하게 느껴지는 오늘날, 과연 ‘심청전’에서 우리가 새로이 발견할만한 게 있기는 한 걸까?


‘심청전’은 같은 판소리계 소설인 ‘춘향전’ ‘흥부전’ 등이 현대적 의미를 어느 정도 담보하고 있는 데 비하면 더더욱 독특한 작품으로 느껴질 만하다. 우선 ‘심청전’에는 변 사또나 놀부 같은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사이 뺑덕이 심 봉사에게 접근해 재산을 탕진하긴 하지만 이는 의도적인 악행이라기보다는 그의 세속적인 성격에 기인한 것이다. 게다가 심 봉사 또한 심청의 부재 시 오로지 뺑덕에 의지해 함께 살아가는 것을 볼 때 그는 심 봉사의 고초와 어리석음을 부각하는 일종의 해학적 장치에 가깝다.


‘심청전’의 갈등은 온통 심청의 기구한 인생으로 수렴된다. 심청은 태어나자마자 이레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눈 먼 아버지의 젖동냥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해 철도 들기 전부터 구걸로 연명하다, 마침내 열여섯 살에 이르러 효녀라는 명예로운 이름에 짓눌려 살아가는 인물이다. 아버지가 약속한 공양미 삼백 석을 마련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인신공양은 그 절정에 해당한다. 그렇게 심청은 심 봉사가 약속한 공양미 삼백 석을 목숨으로 갚아 궁극의 효를 완성한 후에야 용궁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만나고 마침내 황후가 되어 아버지와 재회한다. 마치 험난한 초년을 단번에 보상하듯 후반부 심청의 치유와 해후의 이야기는 온갖 아름다운 판타지로 가득하다.


작품의 주제인 ‘효’ 역시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만하다. 효는 우리 민족 대대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로 여겨졌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가 이념인 유교와 만나 체계화되면서 장려를 넘어 일종의 강제 덕목이 되었다. 덕분에 자식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하는 것은 물론 때때로 희생을 감수하기도 해야 했다. 이를 토대로 그 사람의 됨됨이, 즉 사회적 평판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의도적으로 효자, 효녀의 이야기를 널리 알려 이를 본받아야 할 중요하고도 당연한 기치로 내세웠다. 부모자식 간에 ‘효’라는 다리를 놓아 가장 기초적인 수직 구조를 체화시키고 나아가 이를 지배층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이념적 토대로 확장한 것이다. ‘심청전’은 심청의 희생을 일종의 ‘영웅 서사’로 그려냄으로써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효를 전시한다. 그런 면에서 ‘심청전’은 설령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부모에게 효도해 집안의 질서를 세우고, 어버이를 대하는 그 마음 그대로 나라에 충성하도록 한 조선시대 유교 사상의 의도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 텍스트다.

 

‘효’보다 인물 간 다른 갈등에 방점을 둔 재해석
사실 심청이 바다에 뛰어드는 것과 아버지 심학규가 눈을 뜨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혹여 공양미 삼백 석의 값을 인신공양으로 대신했다손 치더라도 이를 효와 연결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그럼에도 열여섯 소녀의 인권을 효라는 가치와 대비시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충격과 감동을 자아내는 만큼 의도만은 명백하다. 그만큼 ‘심청전’이 설파하는 메시지는 현재의 시각에선 굉장히 낡은 것이다. 그러나 그 효용만큼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죽은 자에 대한 저승에서의 심판을 다루며 올해 최고 흥행작에 오른 영화 ‘신과 함께’(김용화 감독, 2017)도 ‘심청전’이 숭앙한 효의 가치를 새삼 되새겼다. 영화는 중반을 넘어가면서 은근슬쩍 ‘천륜지죄’, 즉 어머니에 대한 못다 한 효도를 중심에 두더니 결국 눈물샘을 쥐어짜는 신파로 클라이맥스를 완성한다. ‘신과 함께’는 가족애라는 인류 공통의 가치를 좀 더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한 ‘효’로 대치함으로써 한층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했다.


최근에는 ‘심청전’의 핵심인 효를 걷어내고 현대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한 작품도 여럿 보인다. 임필성 감독의 영화 ‘마담 뺑덕’(2014)은 배경만 현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주제 역시 심학규와 덕이(뺑덕) 간의 깊은 애증에서 찾았다. 문예창작학과 교수 학규(정우성)는 성추행 사건에 휘말려 지방 소도시로 내려와 문화센터 강사로 일하던 중 놀이공원 매표소 직원인 덕이(이솜)를 만난다. 늘 도시로 나가길 꿈꿔오던 소녀 덕이는 학규와 사랑에 빠지지만 학규는 복직되자마자 덕이를 버리고 서울로 돌아간다. 배신당한 덕이는 여러 차례 학규의 마음을 돌리려 하지만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학규가 덕이의 집에 찾아온 날 사고로 덕이의 어머니가 숨진다. 이로부터 8년 후 학규는 작가로 성공한 한편 술과 담배, 도박과 여자 등 모든 욕망에 몸을 내맡긴 채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 결과 점점 시력을 잃어간다. 이때 앞집으로 이사 온 여자 세정은 학규와 그의 딸 청이에게 접근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학규는 세정이 8년 전 덕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덕이는 학규를 차츰 나락의 길로 안내한다.

 

영화는 ‘심청전’의 서사를 그대로 가져가는 가운데 학규와 덕이의 관계를 부각하면서 이를 한 편의 복수극으로 재해석했다. 본디 인당수로 떠났던 청이는 현대에 와 아버지의 도박 빚 대신 일본으로 팔려가고 그사이 학규를 향한 덕이의 증오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학규가 파멸의 밑바닥에 다다랐을 때 돌연 청이가 돌아온다. 결코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청이는 그곳에서 일본인 재력가를 포섭해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던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 덕이를 향한 청이의 ‘재복수극’을 숨 가쁘게 그려내는 가운데 덕이의 각막을 강제로 학규에게 이식해 아버지의 시력까지 되찾는다. 그럼에도 결국 영화는 두 여자의 복수극이 아니라 끝끝내 서로를 놓을 수 없었던 학규와 덕이의 기묘한 동행에 방점을 찍는다. ‘마담 뺑덕’은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둘의 관계를 통해 마침내 인간의 기이한 욕망을 건져 올린다.


세리(seri)·비완 작가의 웹툰 ‘그녀의 심청’(2017~연재 중)은 심청과 장 승상 부인 간의 관계에 집중해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이야기는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을 대신 내줄 테니 수양딸이 되라는 장 승상 부인의 제안을 왜 거절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며 시작한다. 심청 역시 효심이 깊고 아름다운 소녀가 아니라 비렁뱅이나 다름없는 행색을 하고 있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눈이 멀어 아이를 씻길 줄도 몰랐고 일곱 살부터 거리에서 살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어릴 적부터 구걸과 소매치기로 연명하던 청이는 우연히 장 승상댁으로 시집가는 젊은 처자와 만나고 그의 호의를 얻어 승상댁을 왕래하면서 차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체득한다. 청이는 장 승상 부인 덕에 말끔한 행색을 하게 된 것만이 아니라 주변에 호감을 사고 이를 토대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처세술을 몸에 익힌다. 얼마 전만 해도 마을 사람들 모두가 꺼리던 심청은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가련한 효녀가 된다.


‘그녀의 심청’의 핵심은 장 승상 부인과 심청이 작은 궁궐을 연상시키는 장 승상 댁내에서 벌이는 암투에 있다. 장 승상 부인은 심청과 함께 장 승상의 아들과 그의 부인에 맞서며 집안에서 입지를 다져나간다. 또한 권모술수를 발휘해 위기를 타개하면서 서로를 향해 동지애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등 이야기는 지금껏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두 여인 간의 관계를 한껏 부각한다. 동시에 약한 소녀에서 강인한 여성으로 거듭나는 심청과 장 승상 부인의 성장을 통해 색다른 쾌감 또한 안긴다. 모두 고전 ‘심청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것들이다.


그 밖에 웹툰 ‘바람소리’(한기남, 2015년 12월 완결)와 ‘심봉사전’(서강용, 2014년 7월 완결)은 장님 검객으로 분한 심 봉사를 앞세워 ‘심청전’을 활극으로 변주했으며, 2002년 MBC 마당놀이 ‘심청이 심봤다’는 ‘심청전’의 후일담을 해학적으로 그려낸 바 있다. 모두 착하게 살면 결국 복을 받는다는 기존의 권선징악적 사고를 넘어 심청과는 떼려야 뗄 수 없을 것 같은 효심을 배제하는 등 전에 없던 새로운 ‘심청전’을 구축한 작품들이다. 이렇듯 ‘심청전’은 고전의 의미 그대로 여전히 시대를 넘어 새로운 독자와 만나는 중이다. 물론 그 형태는 전혀 다르지만.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DVD2.0’ ‘Film2.0’ ‘브뤼트’ 등 매체의 기자를 거쳐 영화·만화·장르소설·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그림 김남희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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