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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2월호 Vol.337

‘새 국악’을 창작하다

우리 시대의 작곡가 | 김기수(1917~1986)


2016년 11월 공연된 국립국악관현악단 ‘2016 마스터피스’에는 ‘한국 창작음악 거장들에게 바치는 오마주’라는 슬로건이 걸렸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국악 작곡가 김기수·김희조·이강덕·이성천·백대웅·이상규가 남긴 명작(마스터피스) 혹은 생전의 창작 정신을 소재로 오늘날의 작곡가에게 위촉한 여섯 작품을 초연한 시간이었다. 그중 박일훈이 작곡한 김기수 주제의 관현시악 ‘죽대엽(竹大葉)’이 순서상 가장 먼저 연주됐다.
송방송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한국음악통사’에서 김기수(1917~1986)를 국악 창작의 1세대로 지칭하며 1950년대와 1960년대 창작계를 주도한 인물로 꼽는다. 그가 개척한 길은 20세기 들어 휘청거린 국악을 다시 일으킨 ‘창작국악’의 활로였다. 그러한 길을 낸 김기수의 작품을 오늘날 자주 만나보기는 힘들지만, 그의 ‘창작정신’은 여전히 새롭게 창작되는 국악의 세계에서 숨 쉬고 있다.


대금을 든 소년

일제강점기인 1931년 4월. 15세의 김기수는 이왕직아악부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왕직(李王職)의 ‘이(李)’는 조선왕실의 이씨 가문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왕직’이란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고 이왕가의 업무를 맡기 위해 계승한 부서를 지칭한다. 이 부서는 일본 궁내성에 소속돼 있었다.

이왕직아악부는 이왕직의 의례, 즉 궁중에서 진행된 의례 음악의 연주를 전담했다. 이를 위한 연주자들을 양성한 곳이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였다. 1920년부터 띄엄띄엄 아악생을 모집했고, 김기수는 1931년에 4기생으로 입학했다. 함께 입학한 18명 가운데에는 평생 고락을 함께한 장사훈(1916~1991, 음악학·거문고)·김성진(1916~1996) 등이 있다.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는 지금의 중등과정에 해당하며, 아악생에게 수업료와 일정한 급료를 제공했다. 전체 5년 과정으로, 1·2학년 때는 보통 학과목을 배우고 3학년부터 전공 악기와 전공과목을 공부했다. 김기수는 대금을 택했다. 생전의 그는 일제강점기에 대금을 공부하며 들고 다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우수한 성적을 자랑한 덕에 1936년 3월 이왕직아악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예정대로 아악수가 됐다.

이왕직아악부에 근무하면서 김기수가 관심을 보인 것은 ‘작곡’이었다. 그러던 중 1939년 12월 이왕직아악부에서 새로운 작품을 현상 공모했고, 그가 작곡한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이 당선됐다. 이 곡은 1940년 11월 9일, 아악이습회가 부민관에서 선보인 제97회 특별기념연주회에서 발표됐다. 이능화(1869~1943)가 쓴 한문시를 가사로 사용했는데, 평소 가창(歌唱)에 일가견이 있던 김기수가 직접 노래를 맡기도 했다. 그런데 그 가사는 천황을 칭송하는 것이며, 곡도 일본 건국을 기념하는 행사 음악이었다. 이 곡과 그의 행위로 인해 김기수에게는 늘 친일 혐의가 따라붙게 됐다. 김기수와 함께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에서 수학한 장사훈은 그의 저서 ‘국악대사전’에서 이 작품에 관해 “일본 기원 260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곡”이기에 설명을 생략한다고 적었다.

이후 그는 46년 동안 독주·중주·관현악·창극·무용음악·영화음악·연습곡 등 500여 작품을 작곡했다. 초기의 대표작은 1941년 발표한 4중주곡 ‘세우영(細雨影)’과 1944년 만주에서 작곡한 관현악 합주곡 ‘고향소’다. 국악 창작의 역사에 ‘최초의 실내악곡’으로 기록되는 ‘세우영’은 ‘황화만년지곡’을 작곡하던 습작기에 비해 성숙한 표현력이 돋보였고, 작곡가 개인의 정서를 더욱 더 드러냈다. 생전에 그는 이 곡을 자신의 첫 창작곡으로 꼽기도 했다. 이 작품은 1941년 8월, 백제의 고도인 부여를 여행하고 나서 작곡한, 대금·거문고·아쟁·장구로 편성된 3장 구성의 작품이다.

지금은 아주 흔한 기법이 되었지만, 당시 현을 긋지 않고 손가락으로 퉁기는 피치카토 주법을 아쟁에 적용한 것이나 거문고의 개방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은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작곡가’ 김기수는 ‘대금 연주자’이기도 했으니 대금의 선율이 다른 악기들 사이에서 충분히 돋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후에 곡명을 한글로 풀이해 ‘자잘비 아래’로 바꾸기도 했지만, 대개 ‘세우영’으로 오늘날에도 종종 무대에 오르곤 한다.


1950년부터 서거 직전까지 이어진 창작

김기수는 195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작곡에 임했다. 6.25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도 않은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개원한 국립국악원 장악과에 근무하며 그의 창작열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1952년 한 해 동안 ‘정백혼’ ‘명단풍’ ‘송광복’ ‘개천부’ ‘하원춘’ 등 다섯 작품을 창작했다. 노래곡인 ‘개천부’를 제외하곤 대개 여러 악기를 사용한 합주곡이다. 이러한 곡에 대해 송방송은 “전통음악의 계승과 서양음악의 수용을 위한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라고 했다. 1953년 초연된 ‘하원춘’과 ‘회서양’, 1954년 작품인 ‘파붕선’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작품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내용에 적합한 힘찬 소리를 연출하기 위한 대규모 관현악 편성을 선호했다. 대피리·대아쟁 등 저음부를 보강해 더욱 웅장한 음향을 지향하기도 했다.
‘웅장’ ‘웅혼’ 등의 단어로 대변되는 그의 작품에는 역사적 사건을 상징하거나 암시하는 제목과 표제가 붙어 있다. ‘정백혼’은 순국선열의 충혼을 추모하는 관현악곡이고, ‘파붕선’은 분단의 상징인 38선을 무너뜨려 민족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있으며, ‘송광복’은 광복을 경축하는 내용이다. 한편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1961년에 작곡한 ‘새나라’와 ‘5월의 노래’는 그 제목만으로도 김기수가 어떠한 정치적 노선을 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장 학자와 연구자들은 이러한 활동과 노선으로 김기수의 삶과 업적을 재평가하기도 하지만, 그가 당시 신국악 운동의 발판과 묘판이 됐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당시 그러한 그의 공로는 크게 인정받았고, 김기수는 1954년 서울시문화상(음악 부문), 1962년 예술원 5월문예상 음악부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후 1965년 ‘규중칠우’, 1969년 ‘만파식적’과 같은 무용음악을 작곡했고, 국립국악원 원장과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70년대에도 창극 ‘춘향전’(1972)과 ‘강감찬장군’(1974)을 발표했다.

그는 1986년 서거하기 전까지 꾸준히 작품을 창작했다. 1984년과 1985년에 각각 발표한 ‘청사포 아침해’와 ‘당굴’은 만년의 대표작이다. 청사포는 부산 해운대와 송정 사이에 있는 작은 포구 중 하나다.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의 위촉으로 작곡한 이 작품은 사회적 여파와 영향 속에서 창작에 임하던 과거와 달리, 주관적인 감정과 느낌을 담았다. 듣고 있으면 일출 광경과 뱃고동의 울림 등 바다 풍경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정치 참여적인 ‘황화만년지곡’을 거쳐 개인적 감정을 담은 ‘세우영’을 작곡한 김기수 초기의 흐름을 만년에 다시 만나게 된다.

하지만 ‘청사포 아침해’를 완성한 후 1년 뒤에 발표한 작품이자 서거 1년 전에 완성한 ‘당굴’은 그가 창작 초기에 강하게 드러낸 민족주의적 성향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는 곡이다. 그는 어느 순간 자유로운가 하면, 어느 때는 정치적 흐름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움직였다.


전통과 근대를 한 몸에 살아내다

김기수의 삶은 그의 작품처럼 다채로웠다. 친일 혐의가 그를 기리는 데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국악 창작의 효시로 인정받는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후예들의 공부거리가 된다. 1950년대엔 ‘신국악’의 묘판을 깔고 새길을 개척하는가 하면,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과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예능보유자가 되어 전통을 지키는 파수꾼 노릇을 하기도 했다.
윤신향 교수는 그에 대해 “서양 근대음악의 표현 요소를 수용함과 더불어 그것을 한국 근(현)대사회의 국악 영역에서 재현하는 데 기여했다”라고 평한다. 1950년대 전쟁기와 전후(戰後) 정간보에 쓰인 그의 작품들은 전통과 근대가 공존·역학하는 전환기를 살았던 (윤신향의 표현에 의하면) “문화적 이중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였던 김기수에게 정간보에 기록된 전통음악을 오선보에 역보(譯譜)하는 것은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당시 익힌 오선보에 대한 감각은 그의 창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간보는 우리나라의 옛 기보법이다.

한 칸에 ‘한자’로 된 음 이름을 ‘적어 넣는다’. 오선보는 서양식 표기법이다. 오선(五線)에 음의 높낮이를 상징하는 ‘음표’를 ‘그려 넣는다’. 정간보는 글자로, 오선보는 그림으로 된 악보다. 김기수에게 이러한 역보 작업은 전통·근대가 뒤섞인 (혹은 뒤섞일) 시대를 살아나갈 그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제자 서한범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서양식 화성을 사용해 오선보에 작곡했지만, 총보는 오선보로 만들고 악기별 악보는 정간보에 기록했다고 한다. 어쩌면 오선보를 못 보던 국악 연주자들을 위한 선각자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정간보에도 서양의 악상기호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존의 부호들은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그가 남긴 고민과 기호들이고, 오늘날에도 후예들은 이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다. 다음 호에선 서양음악과 국악을 접목한 김희조(1920~2001)를 만나본다.

글 송현민 음악평론가.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며 부지런히 객석과 책상을 오가고 있다. 급변하는 음악 생태계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 권준 일러스트레이터

참고문헌
송방송, ‘한국음악통사’, 일조각, 1998.
윤신향, ‘창작국악의 신분 연구2-김기수를 통해 본 국악의 근대화 양상’, 음악학 15권, 한국음악학학회, 2008.
한명희·송혜진·윤중강, ‘우리국악 100년’, 현암사, 2001.

음반 ‘KBS FM 한국의 전통음악-김기수 작품집’

KBS FM이 제작한 시리즈 기획 음반으로 1999년에 나왔다. ‘청사포 아침해’ ‘당굴’ ‘송광복’ ‘세우영’ ‘등롱’ 등 기악곡을 양주섭 지휘, KBS국악관현악단의 연주로 만날 수 있는 귀한 자료다. 듣다 보면 뭔가 반복된다는 느낌이 든다. 전승된 전통음악을 활용하고 서양 화성과 이접하는 데 창작자로서의 한계가 솔직히 보인다. 하지만 그 지점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로부터 창작국악의 역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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