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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2월호 Vol.337

국립무용단 이재화

예술가의 초상



그는 무척이나 신중했다. 습관인 것 같기도, 성격인 것 같기도 했다. 질문 하나를 던지면 꽤 오래 고민한 뒤 가장 적절한 단어를 골라 천천히, 그리고 단호하게 답했다. 연습실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이어졌다.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착한 학생처럼 그는 마킹 한 번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거울을 응시하며 동작 하나하나를 곱씹었다.


‘향연’ 중 소고춤에서 화려한 애크러배틱과 재기발랄한 자반 뛰기로 관객의 눈을 시원하게 만들었던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까만 댄스플로어 위에서 아주 부드럽고 가볍게 공간을 훑는 두 발만 있을 뿐.


이재화는 2011년 인턴단원으로 입단해 3년 만인 2014년 정단원이 됐다. 이전까지 국립무용단에 입단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단다.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병역 의무를 면제받아 기초군사훈련을 위해 훈련소에 입소했을 때, 선배 조용진이 편지를 보내 왔다. 입단 시험이 곧 있을 것 같다고, 좋은 기회가 될 테니 응시해보라고 했다. 이재화는 광활하고 거대한 국립극장 해오름 무대는 자신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선배의 조언에 마음이 동해 시험을 치렀다.


“한창 대학 다닐 때, 한국무용 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외국으로 진출하던 시기였어요. 저도 병역 문제만 해결되면 해외로 나가서 활동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때만 해도 어떻게 하면 한국무용이 현대적으로 보일지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한국무용을 좀 배제했고요.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놓치고 있는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국립무용단 입단 시험도 터닝 포인트가 됐죠. 이곳은 정말 한국무용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내가 너무 나 잘하는 부분만 보여주려고 해서 떨어진 건 아닐까. 고민도 많았고, 인식도 서서히 바뀌었죠. 오히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제 춤이 좀 더 한국적으로 보일지 고민하고 있어요. 어릴 때는 몸의 태에 집중했다면, 요새는 어떤 게 한국적 감성인지 찾아가고 있죠.”


‘한국적’을 말하는 그의 춤은 사실 누구보다 현대적이다. ‘전통의 현대화’를 위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가며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국립무용단의 행보와도 닮았다. 2011년 입단한 그는 첫 1년 동안 상설공연 ‘정오의 춤’ 무대에만 오를 수 있었다. 그다음 해가 돼서야 선배들의 무대에 한 발짝 내디딜 수 있었고, 정단원이 된 2014년부터는 다양한 작품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입단한 시점이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 조금씩 등장하는, 일종의 과도기였거든요. 제가 잘하는 것을 이 무대 위에서 선보일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해요. ‘시간의 나이’라든지 ‘기본활용법’ ‘향연’ 등 잠깐이라도 혼자 춤출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면 조금씩 제 색깔을 드러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실제로 그 노력이 관객에게도 보이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의 어필은 적어도 내겐 통했다. 2016년 초연, 2017년 재공연한 ‘시간의 나이’에서 “나를 봐!(Look at me!)”라고 외치며 무용수들 사이에서 불쑥 불쑥 뛰어오르던, 앞으로 멘 북을 신명 나게 두드리며 무대를 달리던 이재화의 모습이 선하다.


“체력적으로는 무척 힘든데 마음이 편한 작품은 ‘시간의 나이’예요. 줄과 각을 맞추기보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으니까요. 공연하면서 신나는 건 단연 ‘향연’이죠. 국립무용단에서 공연한 이래 해오름극장 3층까지 객석이 가득 찬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무대에 서면 객석의 관객이 다 보이거든요. 그럴 수 있다고 이해는 하지만 졸고 있는 관객을 발견하면 아무래도 맥이 풀려요. 그런데 ‘향연’에선 모든 관객이 집중하고 바라보는 게 느껴져요. 몰입하는 거죠. 새로운 것을 가미하지 않고 우리 춤에 충실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했죠.”





젊은 무용가의 한국적 감성

국립무용단은 지난해 12월, 차세대 안무가 양성을 위한 ‘넥스트 스텝’ 공고를 냈다. 단원 가운데 안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을 선발해 창작 역량을 강화하고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자 하는 프로젝트다. 내부 심사를 거쳐 세 명의 무용수가 선정됐고, 이들은 워크숍과 움직임 리서치를 병행하며 작품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그 명단에 이재화도 이름을 올렸다.


“(안무가) 하고 싶었나 봐요. 언젠가는 안무가에 도전해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외부에서도 기회가 있긴 했는데, 저는 안무를 하기 위해선 먼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단원 교육 시간에 평론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생각을 깨게 됐어요. 사실 안무법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잖아요. 창작이라는 건 예술가의 생각에서 출발하는 거니까요. ‘넥스트 스텝’에 지원하게 된 데는 극장의 제작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교육 프로그램을 비롯해 작품 제작 과정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이 마련됐거든요.”


단순히 도움이 있어 용기를 낸 것은 아닐 터. 이번 프로젝트를 발판으로 삼아 국립극장 전속단체간 협업도 추진해보고 싶다고 했다.


“국립극장엔 세 개의 전속단체가 있어요. ‘넥스트 스텝’을 통해서라면 전속단체가 협업해 만든 작품을 올릴 수 있을 거 같았어요. 출·퇴근 시간은 같은데 사실상 교류가 많지 않거든요. 연습실만 마련된다면 함께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각자 일정이 바빠서 생각보다 추진이 쉽지는 않지만요.(웃음)”


‘한국적’에 대한 이재화의 고민은 자신의 안무작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파리와 크레테유에서 두 차례 선보인 ‘시간의 나이’ 무대가 이번 작품의 시발점이 됐다. 격정적인 ‘볼레로’를 마친 무용수들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발을 구르며 환호한 프랑스 관객들. 몇 번을 무대에 다시 나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던 커튼콜을 경험하며 그의 머릿속에는 물음표와 느낌표가 동시에 찍혔다.


“한국 관객들은 무용수가 장구를 메고 나오면 무엇을 할지 예상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프랑스 관객들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구음을 하고, 또 춤까지 추는 예술가들은 처음 봤다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이들이 어떤 점에 열광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봤죠. ‘가무악 일체’라는 답이 나오더라고요.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가 모두 갖고 있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가무악에는 특유의 ‘장단’이 있어요. 저는 국립무용단 작품 중 농악을 가져와서 새롭게 만들어보고 싶어요. ‘시간의 나이’에서 프랑스 관객들이 경험하고 열광한 한국적 감성이 무엇인지 찾아보려고요.”


국립무용단의 가장 젊은 세대이니 막연하게 ‘젊은’ ‘세련된’ ‘신선한’ 것을 선택하지 않겠냐는 예상을 완전히 깨고 그가 선택한 건 ‘장단’과 ‘감성’이다.


“농악에서 칠채 장단을 꼽았어요. 일반적으로 슬픈 장면에선 느린 장단이 흘러나오고, 신나는 장면에선 빠른 장단이 연주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칠채 장단 하나로 그 감성을 다 표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장단을 두고 춤의 속도나 악기 연주, 타이밍 등을 변형해서 이러한 시도가 가능할지 도전해보려고요.”


그가 장단에 대해 이야기하자 ‘기본활용법’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조용진과 이재화는 작품 속에서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침 반복하고 있는 ‘국립 기본’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크린 위로 이들의 대화가 흘러가고 나면 조용진은 살풀이 수건을 들고 무대 중앙에 서고, 이재화는 그 옆에 앉아 장구 반주를 더한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흩날리며 장구를 내리치고, 장단을 내리꽂던 모습. 이재화는 ‘기본활용법’을 가장 재밌었던 작품이라 기억하면서도, “연습을 엄청 했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확신이 없었다”라고 덧붙인다. 창작 과정에 함께하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안무가의 무게가 떠올랐을 터다. 스스로 짊어진 막중함은 젊은 무용가의 오랜 고민을 풀어줄 수 있을까.


글 김태희 국립극장 홍보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하고 서울문화재단을 거쳐 「미르」 제작을 맡고 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제12회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사진 전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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