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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2월호 Vol.337

속 시원한 심청이 왔다

리뷰 | 국립극장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



“공양미 삼백 석에 바다에 뛰어들어도 말리는 어른 하나 없었다고요.” 심청의 하소연이다. 못난 어른들 가슴이 뜨끔하다.

“죽도록 정성 들여 / 하느라고 허였건만 / 그 공은 간데없고 / 전처만 생각허니 / 아무리 생부천들 / 그 꼴을 어이 볼까.” 뺑덕은 전처 곽씨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심봉사를 향해 억울함을 토로한다. 아무리 뺑덕이라지만 전처와 비교라니, 그 분함에 십분 공감이 간다.

착하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고전 속 인물들이 마당놀이 무대를 만나 우리 옆집 이웃의 얼굴을 하고 말을 걸어온다. 홀몸으로 딸을 키우는 눈먼 봉사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눈을 고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딸 심청. 고전 ‘심청전’은 마음씨 착한 효녀에 관한 미담이다. 아름답지만 한편으론 답답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다 보면 ‘아니 왜 저렇게까지 하나’ 하는 생각에 속이 더부룩하다. 국립극장 마당놀이 ‘심청이 온다’는 원작의 뼈대를 그대로 가져오되 인물들에게 생생한 욕망을 입혔다. 새 주인공들은 고전 속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는 인물들 덕에 공감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됐다.

솔직하다 못해 뻔뻔하다. 뻔뻔하다 못해 화끈하다. 백수 심봉사는 방 안에 드러누워 끊임없이 소셜미디어에 신세 한탄과 허세 가득한 글만 올린다. 같은 시간 심봉사의 소셜미디어를 탐색하던 뺑덕은 심봉사가 재벌인 줄 알고 덜렁 낚여 결혼을 추진한다. 그런 아버지를 먹여 살리기 위해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심청은 고달픈 삶에 지쳐 현실도피증을 앓고 있다.

인당수에 빠지려고 결심한 심청을 두고 약해빠진 청년 세대라고 나무라는 어른들에게 심청이 대꾸한다. “어서 빨리 뛰어들라 등만 떠밀어놓고, 뭐요? 현실도피적 자살행위? 오케이, 인정! 나 현실 도피했어요. 그것밖에 길이 없었으니까!” 아버지를 위해서라지만 어떻게 인당수에 뛰어들 생각을 했을까? 곰처럼 착하기만 한 고전 속 심청과 달리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즐겨 사용하는 급식체를 속사포처럼 내뱉는 심청의 답은 솔직하다. 고전의 ‘효심’이란 뻔한 모범답안 대신 마당놀이 속 심청은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는 따끔한 일침 같은 답을 내놓는다. 뒤이어 심청처럼 아르바이트하는 소녀 가장들은 떼로 나와 “남은 건 빚뿐, 가진 건 몸뿐, 달리고 달려도 제자리일 뿐”이라며 고달픈 청춘들의 현실을 노래한다.

초연 당시 “청아, 땅콩은 접시에 담아 왔느냐” 등 뼈 있는 대사로 객석을 뒤집어놓은 ‘사이다 풍자’도 업데이트됐다. 심봉사는 세상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리와 적폐로 가득 차있어 그만 눈을 감아버렸단다. 뺑덕은 심봉사의 재산을 탕진하고는 뻔뻔하게 ‘특활비’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또 “선서하고 진실 말하는 놈 못 봤다”라며 선서 없이 자기 행동을 변호한다.

심청도 풍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왕비가 된 심청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맹인 잔치를 여는데 이 잔치를 가리켜 작중 인물들이 심청이가 사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국가권력을 남용한 게 아니냐고 지적한다. 요즘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사건을 연상시키는 시의적절한 풍자다. 이처럼 관객의 답답한 속을 비워내는 통쾌한 웃음은 마당놀이의 가장 큰 매력. 애초 마당놀이는 해학과 풍자로 민중의 애환을 전하고 현실을 비판하는 역할을 도맡아왔다.


마당놀이의 화려한 귀환

공연 장르로서 ‘마당놀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81년 MBC 마당놀이 ‘허생전’이 시초다. MBC 창사 20주년 기념 공연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극단 미추가 마당놀이를 장르로 발전시켰다. 표현과 결사의 자유가 부재했던 군부독재 시절, 마당놀이는 특유의 풍자와 해학으로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큰 사랑을 받았다. 무료 공연 당시 마당놀이 표를 받으려던 줄은 문화체육관 앞에서 시작해 예원학교 앞까지 길게 이어졌다. 유료 티켓의 경우 암표상까지 등장할 정도로 마당놀이의 인기는 엄청났다.

30년간 2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마당놀이는 2010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다 2014년 새로운 형태로 돌아왔다. 국립극장이 기획공연으로 마당놀이를 부활시킨 것이다. 그 첫 작품이 바로 ‘심청이 온다’였다. 초연 당시 객석점유율 99퍼센트라는 수치를 기록하며 뜨겁게 부활을 알렸다. 이어 ‘춘향이 온다’(2015), ‘놀보가 온다’(2016)가 올랐다. 국립극장 마당놀이는 총 118회 공연에 12만 5,786명 관객을 동원하며 남녀노소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연말연시 대표 공연으로 자리매김했다.

‘심청이 온다’는 극단 미추의 손진책이 다시 연출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자 마당놀이 대표 배우로 꼽히는 김성녀가 연희감독을 맡았다. 여기에 극작가 배삼식·작곡가 박범훈·안무가 국수호 등이 합세했다. ‘마당놀이 어벤저스’가 모인 셈이다. 그런 만큼 마당놀이의 매력이 총 망라된 작품이다.

마당놀이의 핵심은 관객 참여라 할 수 있다. 국립극장은 대극장인 해오름극장 무대 위에 마당과 3면 객석을 설치했었다. 올해는 리모델링 공사를 앞둔 해오름극장을 떠나 돔 형태의 원형극장인 하늘극장으로 무대를 옮기며 변화를 줬다. 극장의 형태가 원형무대와 그 무대를 둘러싼 이뤄진 덕분에 관객과 배우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공연장 안에는 엿장수로 분장한 배우들이 실제로 엿을 팔며 흥겨운 분위기를 돋운다. 본격적인 공연에 앞서 고사도 진행된다. 관람객 누구라도 무언가 소원하는 게 있거나 동참하고 싶으면 돈을 고사 상에 놓고 절을 올리면 된다. 객석에서는 앞다투어 나와 돼지머리에 돈을 꽂고 올 한 해 복을 빈다. 마당놀이에서는 관객 역시 배우다. 공연 중 뺑덕은 객석에 추파를 던지고, 심봉사는 젖동냥을 부탁한다. 어떤 관객은 배우보다 더 능청스럽게 대처해 박수를 받기도 한다.

춤·음악·소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 것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심청전’의 포인트를 살려 천장에 지름 20미터의 거대한 연꽃 모양의 천막을 설치했다. 그 주변에 64개 청사초롱의 불을 밝혀 전통적인 분위기를 살렸다. 객석 바로 위 2층에 위치한 악단의 신명 나는 연주가 흥을 돋운다. 그러다가도 심청이 숨 끊어질 듯 창을 하면 웃음은 뚝 끊어지고 무대 위로 애조가 흐른다. 객석을 들었다 놨다, 아주 애간장이 녹는다.


국립창극단 새얼굴 총출동

마당놀이 인간문화재 3인방으로 통하던 윤문식·김성녀·김종엽 트리오. ‘심청이 온다’에는 이 3인방이나 기존 마당놀이 전성기를 이끌던 극단 미추 단원들은 출연하지 않는다. 대신 국립창극단 배우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대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심청 역에는 초연 무대에서 심청을 맡아 주목받은 민은경과 탄탄한 소리 실력과 안정된 연기력을 지닌 장서윤이 나섰다. 심봉사 역은 이광복과 유태평양이 맡았다. 지난해 마당놀이 ‘놀보가 온다’에서 각각 마당쇠와 흥보 역으로 타고난 재담꾼의 면모를 보여준 두 사람이다. 뺑덕 역에는 국립극장 마당놀이의 마스코트인 서정금, 지난해 놀보 처 역으로 호평받은 조유아가 더블 캐스팅됐다.

다만 공연 초반에는 현대적인 풍자와 마당놀이 고유의 연희가 아직은 딱 달라붙지 못한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소위 B급 유머로 점철된 현대적인 서사와 우리 옛 음악과 춤사위가 아직 한 몸처럼 움직이지 못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는 능수능란한 배우들이 관객과의 호흡을 통해 미세한 수정을 거듭하며 채워나갈 부분이다.

마지막. 심봉사가 딸 청을 보려고 눈을 번쩍 뜨며 극이 끝나면 천장에서 꽃가루가 흩뿌려지고 배우들은 객석을 돌며 관객들을 무대로 이끈다. 관객과 배우가 다 함께 둥글게 손을 잡고 춤을 추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수줍어하며 배우 손 잡기를 설레설레 거절하던 관객도 일단 무대에 서기만 하면 얼마나 적극적인지 극은 끝날 듯 끝나지 않는다. 모두 떠들썩한 잔치판의 일부가 된다. 이때 인증샷은 필수! 흥과 기운이 넘치는 마당놀이. 신년벽두에 관람하기에 제격이다.

글 김연주 2015년 ‘매일경제’에 입사했다. 정치부를 거쳐 2016년부터 문화부에서 공연·전시를 담당하고 있다. 현재 클래식 음악과 국악, 무용 분야 기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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