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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여름호 Vol. 427
목차 열기예술이 일상으로 스며드는 곳

공연은 막이 내리는 순간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의 무대를 완성하기 위해 쌓아 올린 시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배우가 입었던 의상과 무대를 채운 장치, 수많은 손길이 오간 소품들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또 다른 이야기를 준비한다. 국립극장 무대예술지원센터는 그렇게 무대 뒤에 축적된 시간을 시민들과 나누는 공간이다. 공연의 결과뿐 아니라 제작 과정과 창작의 흔적까지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헤이리로16에서 만난 풍경
자연과 예술이 공존하는 도시, 경기도 파주에 자리한 국립극장 무대예술지원센터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보다 훨씬 편안하고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 공연 시작 전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 햇살을 즐기는 노인과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까지. 시선 닿는 모든 풍경이 나른하고 평화롭다. 전문 예술인을 위한 보관시설이라기보다 시민에게 열린 예술 공간에 가깝게 느껴졌다.
2021년 개관한 무대예술지원센터는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 등 국립 공연예술단체의 무대장치와 의상, 소품을 전문적으로 보관·관리하는 공간이다. 공연이 끝난 뒤 흩어지기 쉬운 무대예술 자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동시에 재제작과 대여, 공유 플랫폼 운영까지 담당한다. 한 작품을 위해 제작된 장치와 소품이 폐기되지 않고 다음 창작과 공연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셈이다.
센터는 단순한 보관 기능에 머물지 않는다. 전시와 공연, 체험 프로그램과 해설 투어를 운영하며 시민들이 무대예술 제작 과정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공연의 결과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 뒤에 축적된 시간과 노력까지 함께 들여다보게 만든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지역 주민과 가족 단위 방문객까지 자연스럽게 공간 안으로 끌어안는 방식 또한 흥미롭게 다가왔다.
누군가의 시간이 남아 있는 공간
잠시 앞마당에 앉아 5월의 햇살을 한껏 누린 뒤 2층 상설전시장으로 향했다. 국립극장의 공연 포스터를 활용한 미디어아트월을 지나자 <공연예술, 시대와 함께 숨쉬다>라는 이름의 공연예술박물관 상설 전시가 이어졌다. 공연예술박물관은 한국 최초의 공연예술 전문 박물관으로, 공연예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자료를 수집·보존·연구하기 위해 2009년 문을 열었다. 이후 2024년 무대예술지원센터로 임시 이전했으며 올해 상설전시를 개막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전시는 총 5부로 구성된다. 1부 ‘공연예술, 뿌리를 찾다’에서는 우리 공연예술의 기원과 근대 이후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변화해 온 흐름을 포착한다. 1900년대 초 출판된 희곡집과 공연 전단, 에디슨 축음기 같은 자료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보존돼 있었다.
이어지는 2부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지나 1957년 국립극장이 명동에 문을 열기까지, 온갖 위기 속에서도 우리 예술을 지키려는 노력을 ‘공연예술, 꽃피우다’라는 이름으로 조명한다. 국립극장 개관 당시 자료와 기념 공연 기록, 연극 <원술랑>의 프로그램북과 공연 사진도 함께 전시돼 있었다. 서울 인구가 40만 명에 불과하던 시절, 단 일주일 동안 5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는 <원술랑>의 폭발적 열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3부는 대중화, 대형화를 맞은 공연예술이 첨단기술과 만나 어떻게 새로운 형태로 확장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국립극장 특별기획공연 <우루왕>의 소품, 국립무용단 <묵향>의 의상, 국립국악관현악단 <엄마와 함께하는 국악보따리>에 등장했던 로봇 배우 ‘세로피’까지, 장르와 시대를 넘나드는 전시물이 차례로 이어졌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황병기의 가야금 독주곡 ‘숲’을 미디어아트로 구현한 공간이었다. 가야금 연주에 맞춰 변화하는 빛과 영상이 황홀하고 아름다워 한동안 그 앞을 서성거렸다.
마지막으로 4부와 5부에서는 공연예술 발전에 기여한 기증자들의 영상 기록과 함께 실제 국립극장에서 사용됐던 음향·조명 장비를 실물로 만나볼 수 있었다. 한때 무대를 찬란하게 비추던 손때 묻은 물건들이 이제는 시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전 무대의 막은 내렸지만, 찰나의 순간을 위해 쌓아 온 시간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기에 남아 있었다.

사라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상설전시실을 나와 산책하듯 센터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곳곳에 마련된 휴게 공간과 야외 테라스에서 방문객들은 저마다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아이들 웃음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 곳은 ‘별별실감극장’. 공연 콘텐츠에 그래픽과 음향 기술을 결합한 몰입형 체험 공간이다. 이날 상영 중이던 <귀토-토끼의 팔란>은 국립창극단 공연 실황 음원 위로 역동적인 그래픽이 펼쳐지며 마치 용궁 안으로 들어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VR 콘텐츠를 통해 해오름극장 무대 뒤편과 의상 보관실, 장치 제작 공간을 둘러보는 체험도 인상적이었다. 아이들 반응이 특히 뜨거웠는데, 공연예술이 더는 객석에서만 소비되는 장르가 아니라 기술과 만나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되고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체감됐다.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로비는 <쏙쏙들이페스티벌>을 기다리는 관람객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체험극장 ‘쏙Ssok’에서는 매달 둘째·넷째 토요일마다 무료 공연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공연장 객석은 금세 아이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들로 빈틈없이 가득 찼다.

이날 무대에 오른 작품은 팀 퍼니스트의 <체어, 테이블, 체어>. 의자와 테이블이라는 익숙한 사물을 활용한 서커스 기반의 논버벌Non-Verbal 공연이다. 국내 유일의 ‘서커스 밴드’라는 소개답게 공연은 경쾌한 라이브 음악과 함께 시작됐다. 가장 먼저 선보인 퍼포먼스는 저글링 묘기. 공을 놓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묘기에는 탄성이, 익살스러운 몸짓에는 와하하 웃음이 쏟아졌다. 특히 무대로 초대된 어린이 관객들이 배우들과 즉흥적으로 합을 맞추는 시간에는 아이들의 순수함에 객석 모두가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공연이 중반부로 접어들자 분위기가 제법 진지해졌다. 두 남녀의 만남과 이별, 한 사람의 일생과 현대인의 희로애락을 마임극으로 풀어낸 것이다. 서정적인 음악과 진지한 연기에 조금 전까지 웃음으로 가득하던 객석도 어느새 조용히 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서커스답게 코믹한 장면이 등장하면 다시금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흥겨운 음악과 함께 공연이 끝난 뒤 아이들은 여운이 가라앉지 않는지 부모님께 자신의 감상을 미주알고주알 재잘거렸다. 세대를 가로질러 함께 웃고 공감할 수 있는 무대. 그것이 국립극장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예술의 일상화’라는 방향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아이를 보았다. 어떤 공간, 어떤 시간은 그렇게 사람에게 무언가를 남긴다. 오늘 국립극장 무대예술지원센터에서 하루를 보낸 이들 역시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헤이리로 16에서 시작된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