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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여름호 Vol. 427
목차 열기국립무용단 정현숙
하루, 한 호흡, 한 걸음
정현숙의 춤은 호흡에서 시작된다.
몸의 움직임과 감정의 흐름, 사람들과의 합은 모두 하나의 춤을 향해 이어지는 호흡의 과정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춤을 추는지를 보지만, 그 춤이 어떤 사람을 통해 나오는지는 놓치곤 한다.
어쩌면 좋은 춤이란 자신만의 호흡을 품고 있는 춤이 아닐까.

Prologue – 춤, 그리고
안녕하세요. 국립무용단 단원이자 훈련장을 맡고 있는 정현숙입니다. 사실 제 하루를 세세히 살펴볼 일은 많지 않았어요. 늘 반복되는 평면적인 일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춤, 사람, 영감, 루틴 등 다양한 층위로 겹겹이 이루어졌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 ‘예술가의 작업노트’는 무용수에서 나아가, 한 사람 정현숙을 함께 들여다보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AM 06:30 – 아침을 여는 나만의 루틴
AM 09:30 – 말하기보다 듣기
국립극장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그날의 일정을 확인합니다. 훈련장은 예술감독님의 지시 사항을 단원들에게 전달하고, 작품별 연습 일정을 공유하며, 단원들의 복무와 운영을 돕는 일도 맡고 있습니다.
처음 훈련장을 맡았을 때는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부담이 컸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어요. 혼자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먼저 듣고 함께 방향을 찾는 일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걸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소통이에요. 단원들과 감독님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같은 역할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요즘은 말하기보다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AM 10:00 – 기본으로 시작하는 연습
국립무용단의 오전 연습은 ‘국립 기본’으로 시작됩니다. 초대 단장 송범 선생님이 정립한 동작 체계로, 한국무용의 기본 호흡과 움직임을 되새기는 시간입니다. 예전에는 모두가 교과서처럼 칼같이 동작을 맞추는 분위기가 강했다면, 지금은 내 몸 상태를 점검하는 의미가 더 큽니다. 몸이 무겁지는 않은지, 긴장된 부분이 있는지, 지금 어떤 움직임이 잘 나오는지 등을 살피죠.
공연 일정에 여유가 있을 때는 시나위 훈련이나 레퍼토리 연습도 함께 진행합니다. 국립무용단의 무대는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서로의 상태를 이해하고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AM 11:00 – 나의 뿌리, 나의 춤
이번 ‘예술가의 작업노트’ 촬영을 앞두고 지전紙錢을 준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지전은 대나무 끝에 길게 재단한 한지를 단 무속 도구인데요. 제게 상징적인 물건입니다.
제 춤의 뿌리는 이동안류에 있습니다. 운학雲鶴 이동안 선생님은 수원 화성재인청의 마지막 도대방으로 춤과 소리, 연희를 두루 섭렵한 재인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특히 애정을 가졌던 춤이 지전을 활용한 ‘엇중머리 신칼대신무’인데요. 제가 2020년 <홀춤Ⅰ>에서 창작해 선보인 ‘심향지전무’ 역시 그 맥락에서 이어지는 작품입니다. 풀어내고 떨쳐 내는 듯한 몸짓과 호흡으로 한을 신명으로 승화시키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식무儀式舞이죠.
사실 어릴 때는 이동안류 춤이 약점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전형적인 입시 무용과는 “결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거든요. 그런데 대학에 진학하고 무대 경험이 쌓이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남들과 다른 호흡과 춤사위가 오히려 저만의 개성이 되기 시작한 거예요.
이동안류 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로움입니다. 지켜야 할 호흡과 원칙은 있지만, 그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감정을 풀어낼 수 있어요. 웃고, 울고, 참아 내고, 토해 내는 감정의 흐름이 춤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좋은 춤이란 결국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동작과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어떤 감정을 담아내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믿어요.

PM 01:00 – 이야기에서 피어나는 몸짓
점심시간이 지나면 다시 연습이 시작됩니다. 요즘 국립무용단에서는 <탈바꿈>과 <몽유도원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특히 <탈바꿈>은 북미 공연도 예정되어 있어 단원들 모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저는 작품을 준비할 때 동작보다 이야기를 먼저 생각하는 편입니다. 왜 이 사람이 움직이는지, 어떤 감정으로 그 동작을 하는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부터 떠올려요. 그래야 몸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더라고요.
지금의 저에게 그런 시선을 갖게 해준 작품이 있습니다. <춤, 춘향>(2002)과 <빨간구두 셔틀보이>(2013)입니다.
<춤, 춘향>은 관객으로서 바라보며 꿈을 키웠던 작품이었어요. 직접 무대에 올라 향단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며 춤이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캐릭터를 표현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걸 깊이 느꼈습니다. 반면 <빨간구두 셔틀보이>에서 맡았던 카렌은 온몸이 녹초가 될 정도로 감정을 끌어올려야 했던 역할이었습니다. 인물에 깊이 몰입하는 경험을 하면서 춤을 바라보는 시야도 조금씩 넓어졌어요. 그때부터는 동작 하나보다 무대 전체의 흐름과 이야기, 그리고 인물이 가진 서사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국립극장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수원시의 무형유산전수회관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이동안류 춤과 강선영류 태평무를 배우고 있어요. 현재 국가무형유산 제92호 태평무보존회 전수자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몸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호흡이 느껴지는 춤을 지향해요. 어떤 선생님들은 특별한 동작을 하지 않아도 가만히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껴요. 춤에는 끝이란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정현숙만의 작품’을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어요. 그래서 평소 떠오르는 생각이나 작품 아이디어를 노트에 적어 두곤 합니다. 조금씩 쌓인 메모가 무대에서 실현되는 날이 꼭 오길 바라면서요.

PM 08:00 – 춤의 지평을 넓혀 온 시간
현재 국립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영어 뮤지컬 극단 ‘서울’의 안무 감독, K-TANGO CF 공연예술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안무 창작과 연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출산 이후부터였어요. 무용수로서 미래를 고민하던 시기에 ‘안무가 프로젝트’의 전신인 <바리바리 촘촘 디딤새>(2008)를 통해 안무 창작에 도전한 게 그 시작이었습니다. 이후로 어린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많아지면서는 연출 감각도 기르게 되었어요.
특히 꿈의 무용단 <통통 발이발이 춤추는 꼬마 안무가>(2022) 작업이 기억에 남습니다. 기존 어린이 예술교육 프로그램과는 다른 방식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한국무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통놀이와 연극, 스토리텔링,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체험형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했습니다. 집에 책상까지 새로 들여놓고 각종 관련 자료를 찾아볼 만큼 열심히 임한 작업이었어요.
그 과정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한국무용은 생각보다 훨씬 넓은 가능성을 가진 예술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무용수의 역할 역시 무대 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요.


PM 11:30 – 걷는 만큼 비워내기
하루의 끝은 밤 산책으로 마무리합니다. 집 근처 개천을 따라 걸으며 그날의 일들을 돌아보고 머릿속에 쌓인 생각을 정리해요. 가끔은 일이 많아 고민도 많습니다. 목표는 늘 바뀌고, 당장 주어진 일들을 해내기도 벅찰 때가 있죠.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는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춤을 추고,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만들고, 또 배우며 살아간다는 건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집니다.

Epilogue – 더 깊은 호흡으로
좋은 춤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여전히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춤은 혼자 완성할 수 없다는 것. 무대 위의 감정이 관객에게 닿고, 관객의 마음이 다시 무대로 돌아올 때 비로소 춤은 살아 움직입니다.
아직 더 배우고 싶은 춤이 있고, 만나고 싶은 무대가 남아 있어요. 다음에는 무대 위에서, 더 깊어진 호흡으로 여러분과 만나기를 바라겠습니다.

사진. 김성재 | 사진제공. 정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