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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여름호 Vol. 427
목차 열기국립국악관현악단 어린이 음악회 <신나락 만나락>
이야기는 이렇게 전해진다
봄이다. 국립극장 뜰에서 화창한 봄볕을 받으며 시끌벅적 뛰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생경하다.
민들레 홀씨를 날리는 것만으로도 꺄르르 온몸으로 환호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잠시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음 세대를 위해 어른들은 무얼 해야 할까.

<신나락 만나락>은 아이와 어른이 함께 즐기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어린이 음악회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2004년부터 유아와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맞춤형 콘텐츠를 꾸준히 제작해 왔다. 그동안 〈엄마와 함께하는 국악보따리〉 〈아빠 사우르스〉 〈엔통이의 동요나라〉 등 국악이 지닌 따스한 정서를 국악관현악과 이야기에 섬세하게 담았다. 2025년 초연된 <신나락 만나락>은 객석점유율 90%를 올리며 큰 호응을 얻었다. 올해 역시 4월 22일부터 5월 5일까지 많은 관객이 하늘극장을 찾았다.
공연 제목인 〈신나락 만나락〉은 제주 방언으로 ‘신과 인간이 만나 함께 즐거워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 얘기하는 ‘신난다’는 말의 어원은 ‘내 안에 신이 나온다’로 신은 생각보다 우리 말과 무의식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신나락 만나락〉은 제주 설문대할망 신화를 모티프로 하여 소리와 연주, 퍼핏Puppet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퍼핏은 우리말로 인형 또는 조작이 가능한 꼭두각시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 ‘선율이’의 첫 등장과 ‘오물이’ 등이 배우가 조작하는 인형으로 주요 서사를 담당한다.
선율이는 거대한 자연의 신 설문대의 딸이다. 일하느라 바쁜 엄마의 부재로 인해 모험을 떠나는, 전형적인 신화 속 영웅서사적 인물로 그려진다. 거인 신의 우물에서 애벌레 오물이를 만나 함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간다. 인형으로 만든 오물이의 등장은 앞선 이야기의 전개에 몰입하지 못하던 어린 관객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오물이는 작은 체구에 맞지 않게 대장이 되겠다는 큰 꿈을 가지고 있어 그 무모한 부조화가 아이들의 공감을 샀고, 극이 끝날 때까지 집중력을 발휘했다.
신화적 상상력이 공감과 위로의 무대로
한편 양육자의 입장에서 보면 설문대에게 자연스레 공감하게 된다. 설문대는 마치 가정을 잘 건사하고 싶고, 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맞벌이 엄마(또는 아빠)의 모습을 투영한다. 노래를 좋아하는 선율이의 마음을 진심으로 공감하는 요즘 식의 공감 육아를 하면서도, 서둘러 육아휴직을 마치고 출근해 버린 엄마가 되었다. 마치 아이를 아빠에게 맡기고 극장에 앉아 있는 내 모습 같기도 했다. 설문대는 제주도의 산과 섬을 창조한 거인 여신으로 거대한 자연의 섭리를 따르며 인간의 삶을 보듬는다. 설문대가 해결해야 할 사건사고도 수두룩한데 신도 신의 일을 하려면 직장인만큼이나 바쁘겠다 싶다.
극 중 대사는 곱씹어 보기에도 좋을 만큼 은유가 가득한 말이다. “마음이 말까지 닿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노래를 부른다”란 대사는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만 같다. 말로 하기엔 어색하고, 표현하자니 쑥스러운 어떤 감정은 노래가 제격인 경우가 있지 않은가. 또 선율이와 오물이가 늪을 헤쳐 갈 때,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야지!”라고 한 말이 명료하게 남는다. 반복되는 일상과 정해진 학습을 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길을 만든다는 의미가 어떻게 다가올까. 이런 예술적 경험으로 힘과 용기를 얻는 친구들도 있지 않을까. 군더더기 없는 대사는 억지로 교훈을 심으려는 의도가 없어 좋았다. 주인공의 모험에 자연스레 따르게 되어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관현악을 반주에서 주인으로 내세운 다정한 연출
선율이와 오물이의 여정에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연주가 적극 개입한다. ‘악기나무 숲’이라는 콘셉트에서 더 나아가 연주자가 악기의 한 캐릭터가 되어 중심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된다. 관현악단이 극에 들어가면 반주로 소비되기 쉬워 잘해야 본전이다. 하지만 <신나락 만나락>의 연주자들은 큰 연기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악기 소리에 서사를 적절하게 배치해 설득력을 갖췄다.
‘거인 신의 심장’을 표현한 거문고, 어두운 늪이 맑아지며 ‘거인 신의 치맛자락’을 표현한 아쟁의 소리는 대체될 수 없는 서사를 부여했다. 또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대금과 동생 소금의 ‘양청도드리 제주’는 웃음과 재미를 주었다. 유쾌한 연기와 훌륭한 연주 사이의 갭Gap은 큰 유머 포인트가 되었다.
선율이와 오물이는 늪과 화산을 지나며 악기 정령의 도움을 받아, 이윽고 나뭇잎 비행을 떠난다. 배우들이 무대를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연주 소리가 울렸을 때 관객들은 비로소 이 연주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선율이와 오물이를 요모조모 도와주며 뒷받침해 준 악기들이었음을. 새삼 공연의 맥을 놓치지 않은 연출이 참 좋았다.
무대 구성에서 <신나락 만나락>은 국립극장 하늘극장을 다방면으로 활용하였다. 야외의 원형무대이면서도 조명을 사용할 수 있는 하늘극장은 관객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무대의 높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나뭇잎을 타고 비행하는 장면에서는 선율이와 오물이 인형이 작아져 같은 거리의 무대임에도 먼 여행을 떠나는 듯한 공간감이 느껴졌다. 연출의 힘이다. 설문대의 대형 인형이나 나비의 활강이 입체적으로 표현되면서 영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공연장의 현장감을 담백하게 살렸다.
또 영상을 적절하게 활용해 신의 판타지를 구현했다. 늪이 맑은 호수로 변하는 장면, 활화산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면, 신의 말을 전하는 장면 등 실연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환상의 세계를 눈앞에서 표현해 냈다. 여러 가지 오브제를 사용하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보인 배우들의 열연에도 박수를 보낸다.
다만 기억에 남는 멜로디가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매끄럽긴 하나, 장단의 세가 약해진 왈츠 같은 굿거리와 평균율의 노래가 어쩐지 제주 설문대 신화가 지닌 토속적인 정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다. 제주도 신화를 가져오면서 한 꼭지쯤은 전래동요나 제주 향토 민요를 불렀다면 어땠을까. 아이들이 공연을 보고 나와 흥얼흥얼 우리 노래를 부르는 상상을 해본다. 노래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극장 밖은 여전히 푸르다. 어쩌면 선율이의 모험은 엄마가 퇴근하기 전까지의 한나절 꿈이었을 수도 있겠다. 깜깜한 밤보다는 이렇게 말간 낮이 더 좋다. 여운이 가시지 않아 잠시 극장 뜰을 거닐며 좋은 어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온 마을이 아이를 키운다’는 메시지가 연대와 위로를 가져다주었다. 신으로 표상되는 자연, 사회의 역할을 우리는 작품을 통해 계속 되새기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신화는 노래나 이야기집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신화는 우리의 정신이자 뿌리이다. 이제는 신화가 옛 노래를 대신해 소설이나 그림책, 영화나 드라마, 공연 작품으로 전해지는 시대가 온 것만 같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우리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신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작품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