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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여름호 Vol. 427
목차 열기국립창극단 <보허자(步虛子): 허공을 걷는 자>
흩어질 줄 알면서도 꿈꾸는 자의 소리
왜 인간은 끝내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지,
왜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붙잡으려 하는지.

“부질없는 이 세상 아름다운 것은 왜 이리도 많은가. 흩어질 줄 알면서도 끝내 시들 줄 알면서도 또다시 참지 못하여 내 품에 품으려 하니, 이것은 깊은 병이 아닌가.”
화공 안견과 안평의 딸 무심, 그리고 첩 대어향 앞에 한 나그네가 나타난다. “꿈으로 또 꿈을 지으려는가.” 나그네는 운을 띄우며, 끝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아름다움을 품을 수밖에 없는 마음, 고칠 수 없는 ‘깊은 병’에 대해 토로한다. 그 순간 우리는 그의 정체를 짐작하게 된다. 꿈에서 본 도원을 그림으로 남긴 자, 언젠가 그림도 생도 모두 놓고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그 꿈을 붙들었던 자. 바로 안평대군이다. 이미 죽은 자인 안평은 나그네의 형상으로 다시 나타나 생전에 아꼈던 이들 앞에 선다. 그의 어깨 위에는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고 꿈을 불태운 형, 수양의 혼이 붙어 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인 이 기묘한 형상은, 구상과 상상이 공존하는 ‘몽유도원도’와 맞닿는다. 이 그림은 단순한 모티프를 넘어 창극 <보허자(步虛子): 허공을 걷는 자>(이하 보허자)가 출발하는 하나의 세계다.
허공에 남은 꿈의 형상, <보허자>가 다시 그린 몽유도원도
2025년 초연된 <보허자>는 재공연을 통해 한층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몽유도원도’라는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그 이면에 잠재되어 있던 인물과 감정의 서사를 끌어올리며, 잘 알려진 그림을 낯선 시선으로 다시 보게 만든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발상 자체가 신선하다.
몽유도원도는 한 사람(안평)의 꿈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에서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꿈속에서 만난 풍경이자, 동시에 예술을 향한 집요한 욕망이다. 나그네가 읊조린 것처럼 ‘흩어질 줄 알지만 그래도 품을 수밖에 없는’ 어떤 마음이다. 그런 면에서 나그네와 세 사람의 조우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재회를 넘어 예술이라는 몽유夢遊의 공간 속을 함께 걷는 행위가 된다. 그림을 통해 허공을 걷던 자들은 이제 창극을 통해 다시 허공을 걷는다. “허, 허-보허- 허, 허-능허- 보허-능허-보허등공” 코러스가 반복적으로 내는 소리는 아름다움이라는 실체 없는 허공을 걷는 행위 자체를 질문으로 만든다.
무대는 이러한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려 한다. 쓰러졌다 다시 세워지는 기둥, 굽이진 능선을 이루는 바닥으로 꿈과 현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간다. 특히 후반부, 인물들의 발아래 몽유도원도가 펼쳐지는 장면은 이 작품의 핵심이다. 그 장면은 왜 인간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아름다움을 붙드는지, 그 이유를 집약적이고 감각적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순간이다. 즉 발아래 펼쳐진 몽유도원 풍경에 모두 넋을 잃으며 흩어지고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왜 기꺼이 아름다움과 꿈을 품을 수밖에 없는지 그 답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관객 역시 ‘넋을 잃는 경험’에 도달했다면, 이 작품이 갖는 설득력 또한 완성될 것이다.

꿈을 지우지 못한 자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중요한 축은 안평과 수양의 관계다. 수양은 동생을 제거하고 그의 세계를 불태운 인물이지만, 동시에 몽유도원도만은 끝내 없애지 못한 존재다.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도 가장 핵심적인 것을 남겨 두는 이 모순은 이 작품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두 인물은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혈연의 상징이자 피의 흔적이다. 이 관계는 단순히 선악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의 층위를 갖고 있다.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듯 이 둘의 관계 또한 이분법으로 설명될 수 없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이 감정선이 세밀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수양의 이중적 내면이 더 견고하게 구축되었다면 극의 긴장감도 충분히 축적되었을 것이다. 몽유도원도가 작품의 중심이라면, 이 형제의 관계는 그것을 지탱하는 구조여야 한다. 이 부분의 보완은 향후 공연에서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출연진의 기량은 전반적으로 안정적이었다. 대중적으로 팬층을 확보한 김준수와 유태평양을 비롯해 주요 출연진은 고른 무대 장악력을 보여 주었다. 다만 인물 간 성격 구분이 더 명확하면 좋겠다는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무심과 대어향의 성격과 결이 명료하게 분리되지 않아 서사의 입체감이 약해졌다. 내레이터와 다름없는 본공(도창)도 마찬가지다. 몽유도원도라는 그림을 통해 서사가 자연스럽게 확장되어야 하지만, 사전 지식이 없는 관객에게는 작품의 맥락을 따라가기 쉽지 않아 보인다. 15세기의 한 그림이 오늘날까지 유효한 이유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인물과 관계의 명확성이 더욱 요구된다.
그럼에도 <보허자>가 보여 준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 ‘몽유도원도’라는 오래된 그림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들고, 왜 이 그림이 탄생하게 되었고 지켜져 왔는지, 예술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 이 모든 것을 창극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안평과 안견이 그랬듯이 이 작품은 우리도 기꺼이 꿈을 꾸고 꿈속을 걷는 자가 되게 만든다. 종묘제례악과 궁중음악을 기반으로 한 음악 구성 역시 인상적이다. 기존 창극에서 주로 쓰인 악기뿐 아니라 양금, 생황, 20세기에 개량악기로 등장한 철현금 등 다양한 음색을 더해 서사의 깊이를 더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객석을 가득 채운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 역시 긍정적이다. 그렇기에 서사와 인물의 전달 방식은 한층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허공을 걷는 자들의 산화락散花落
수많은 화첩이 불길 속에 사라지는 모습을 그림 그리는 자로서 허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던 화공 안견, 아버지의 유배로 열여섯 꽃다운 나이가 지닌 젊고 아름다운 것들을 종의 신분 안에 흩어 버린 무심,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불길 속에 목소리와 미모마저 잃은 대어향.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성궁 터를 다시 찾은 그들은 꿈을 품은 안평 못지않게 아름다움 사이를 서성이는 나그네이자 허공을 걷는 보허자였다. 몽유도원도만은 태우지 못한 수양 역시 그렇다. 코러스가 부르는 ‘산화락散花落’이라는 소리는 이미 무너진 낙원 위를 끝까지 떠도는 아름다움의 잔향을 풍긴다.
흩어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품고 마는 마음, 그 깊은 병은 결국 사라지지 않는다. 무대 위에 펼쳐진 몽유도원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서게 된다. 왜 인간은 끝내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지, 왜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붙잡으려 하는지. 그것이 병이라면, 이 작품 속 인물들처럼 우리 역시 쉽게 고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그 질문을 끝내 내려놓지 못한 채, 우리는 그 병을 다시 앓으면서 극장을 나온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허공을 걷는 일이 얼마나 덧없고, 또 얼마나 멈출 수 없는 일인지.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안평과 안견이 그랬듯이 몽유도원도 안에서, 이 창극 안에서 또 하나의 보허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