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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호 Vol. 418
목차 열기코스③ 해오름극장에서 남산야외식물원까지
(해오름극장→남산벚꽃길→남산야외식물원→남산공원 13번 입구)
꽃길도, 흙길도 좋은 이 계절의 남산
입춘이 지난 지 오랜데, 아침 공기는 여전히 겨울 같았다. 바람도 쌩쌩.
그래도 남산에는 꽃이 가득 피었다. 벚꽃·목련·개나리… 누구 하나 서두르지도, 늦지도 않게.
저마다 제가 필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적당한 때를 골라 아무튼 피어났다.

바람 따라 꽃 따라
평일 오전,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일행과 만났다. 등굣길 학생들이 분주히 오가는 가운데, 우리는 국립극장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학생들은 강의실을 향해 바삐 걸어가고, 우리는 남산을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책가방 대신 작은 배낭을 둘러메고 어정거리며 걷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해오름극장 앞 편의점에 들러 바나나 우유로 간단히 요기하고 길을 나섰다. 걷기 전 뭔가를 조금 먹는 일은 걷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의식 같은 것이다.
오늘은 정해진 코스가 없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꽃이 피어 있는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국립극장을 지나자마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고 있고, 그 옆에 목련 한 그루가 묵묵히 서 있었다. 흰 꽃이 풍성하면서도 단정했다. 개나리도 이에 질세라 뒤에서 노랗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길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들을 다시 만났다. 오늘 아침 장충공원에서 우연히 눈인사를 나눈 외국인 여행객들이었다. 우리는 멀리서 그들을 먼저 알아보았고, 그들도 밝은 얼굴로 눈짓했다. “Oh! Hi!” 짧은 인사말에 반가움이 가득했고, 나는 자연스레 “Have a nice trip”이라며 짧고 경쾌하게 답했다. 서울의 복잡한 거리가 아닌, 남산 벚꽃길에서 봄을 느끼고 있는 외국인들이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벚꽃길은 남산의 경사를 따라 짧게 이어졌다. 꽃잎이 바닥으로 흩날렸고, 사람들은 유유자적 걸었다. 사진을 찍어 봤지만, 흐린 날씨 탓에 화면 속 꽃잎은 실제보다 탁하고 밋밋했다. 결국 카메라를 끄고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눈으로 본 봄이 훨씬 또렷했다. 사진에 담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권같아서.

다시 숲길로, 흙내음 맡으며
벚꽃길을 지나 남산 서울타워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멀리 서울타워 꼭대기가 빼꼼 보였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이었고, 인도 양옆으로 개나리와 벚꽃이 나란히 줄지어 피어 있었다. 도심 속이지만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걷는 사람들의 표정도 한결 느긋해 보였다. 계절이 바뀌면 이 길은 푸른 잎으로 또 가득해질 테지.
이따금 서울타워로 오르는 ‘해치버스’가 보였다. 해치버스는 남산타워와 한옥마을, 광화문 등 서울 명소를 운행하며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 형상이 꼭 장난감 같았다. 잠시 뒤 길모퉁이에 서울 둘레길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우리는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큰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다시금 흙길을 밟고 싶은 마음이 일었기 때문이다. 한남동 방면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생각보다 훨씬 비좁고 아늑했다. 이곳이 서울 한복판이었나 싶을 정도로 깊고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이어졌고, 발밑으로는 단단하게 다져진 흙길이 펼쳐졌다. 꽃내음보다 흙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조금씩 말이 줄어들고, 발소리와 숨소리만 커졌다. 그 틈에서 문득 ‘도시’와 ‘남산’이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월길 갈림길에 도착했다. 팔각정자와 운동기구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한남동 방면에서 올라온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정자에 앉아 삶은 옥수수를 맛나게 먹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운동기구를 번쩍 들어 올리며 기합을 넣었다. 사람 냄새가 물씬 났다.
정자 너머 언덕 사이로 남산 서울타워의 윗부분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팔각정을 지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른편으로 보랏빛 작은 풀꽃 군락이 보였다. 눈에 띄게 옅은 보랏빛이 고르게 퍼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소래풀 군락지’라는 팻말이 보였다. 보라유채 또는 제비냉이라고도 불린다. 소래풀은 꽃잎이 넉 장이다. 그 모양이 꼭 네잎클로버 같았다. 그래서인지 보고만 있어도 행운이 생길 것만 같았다. 옅은 보라색은 우리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색감이다. 나는 연신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아이들과 꽃, 그리고 천상의 화원
소래풀 군락지를 지나자 다시 넓은 길이 보였다. 남산야외식물원 안내 표지판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무궁화원과 야생 화원, 그리고 한남유아숲체험원이 이어지는 코스였다. 처음 보는 풀꽃 이름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서울 도심이라는 사실을 문득 잊을 만큼, 풍경은 이색적이었다.
남산야외식물원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전체 구역은 13개의 테마 정원으로 나뉘어 있으며, 서울 지역에서 자생하거나 자랄 수 있는 식물 총 269종이 심겨 있다고 한다. 나무 종류가 소나무·때죽나무 등을 포함해 129종, 풀 종류가 할미꽃과 금낭화 등을 포함해 140여 종에 이른다고 했다. 하루 종일 걸어도 다 둘러보기는 어려울 정도였다. 식물원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구불구불한 산책길은 마치 천상의 화원 같았다. 주변에는 벤치도 곳곳에 많이 설치되어 있어서 걷다가 쉬어 가기에도 좋았다.
한남유아숲체험원 앞에 이르자, 까르르 웃는 아이들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유치원 아이들이 단체로 소풍을 온 듯했다. 우리는 입구에 멈춰 선 채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들고 있는 민들레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생기 넘치고 귀여운지, 우리도 따라 웃고 말았다.
식물원 곳곳에 피어난 꽃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목련이었다. 큰 키에 풍성한 꽃잎, 기품 있는 자태까지. 벚꽃이 화사함을 맡고 있다면, 목련은 우아함을 담당한 듯했다. 근사한 봄의 한 장면이었다.
바람 따라 꽃 따라 이곳까지 왔다. 도심 속에서 자연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또 있을까. 5월, 사랑하는 이와 나란히 걷기에 이만한 길이 또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