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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호 Vol. 418
목차 열기우리는 팍팍한 일상에서 마법처럼 끌어당겨 줄 와이어를 기다리고 있다.
그 와이어는 종종 화면에서, 무대에서, 예술에서 나온다.

지난 3월 2일(현지 시간) 미국 할리우드에 위치한 돌비 시어터.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축하 무대에서 명장면이 연출됐다. <007 죽느냐 사느냐>의 주제곡이자 폴 매카트니의 명곡인 ‘Live and Let Die’의 음악에 맞춰 하늘에서(실은 천장에서) 리사가 내려왔다. 블랙핑크의 리사 맞다. 무용수들과 함께 여성 007처럼 분해 화려한 무대를 선보였다.
와이어액션은 늘 가장 극적인 순간에 등장한다. 보통의 인간은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초인적 움직임을 보여야 할 때 쓰인다. 슈퍼히어로이거나 오랜 수련에 의해 도인이 돼 버린 무예인 정도나 구사할 수 있는 기술. 그것을 화면 안에, 무대 위에 구현하려면 와이어가 필요하다. 몸뚱이 무게를 견뎌 낼 가는 금속 선 말이다. 지금처럼 블루스크린이나 컴퓨터그래픽 합성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20세기 극장에서는 필부필부, 삼척동자 관객의 육안에도 저 와이어가 보였다. “와, 와이어 보인다! 와하하! 오, 근데… 실감 난다!” 이런 반응이 나왔다. 그러니까 <007>이나 <와호장룡>의 액션은 그래도 비교적 최근의 예다. 물리적 와이어액션의 이른 예를 찾으려면 기나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고대 그리스의 원형극장. 신은 와이어를 타고 내려왔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를 아시는지. 라틴어로 ‘기계가 내려 준 신神’을 뜻하는 이 말은 복잡하게 얽힌 극의 갈등이, 마지막 순간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 역할의 배우’에 의해 갑작스럽고 간단히 해결되는 클리셰를 일컫는다. 극장에서 신의 중재Divine Intervention는 인간과 와이어와 기술의 중재에 의해 구현돼야만 했다.
이른바 동양에서도 와이어액션은 존재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줄타기 외에도 말이다. 가까운 일본 열도로 가볼까. 일본의 가부키 극장에서는 17세기 무렵부터 와이어액션이 존재했다. 도깨비, 신령부터 닌자까지 뭔가 대단한 존재가 입·퇴장할 때가 그때인데, 전기장치가 없던 시절에는 모든 것을 무대 뒤 인력이 제어해야 하는 과업이었기에 하늘을 나는 배우는 물론 제작진에게나, 또는 관객에게까지도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액션 신이었다.
고대 그리스처럼 고대 중국에서도 와이어액션은 그 기원을 기원전 300년경으로 찾을 수 있다. 기예가 뛰어난 배우는 대나무 대공에 연결된 와이어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신과 신령의 움직임을 모사했고, 관객들은 그 스펙터클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던 것이다. 뉴 밀레니엄에 개봉해 서양 관객과 미국 아카데미까지 감동시킨 <와호장룡>의 오리엔털 와이어액션은 1970~80년대 홍콩 무협영화보다 훨씬 더 심원한 기원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서구에서는 1902년 지구상에 ‘피터 팬’이란 캐릭터가 탄생하면서 와이어액션의 신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작가 J. M. 배리가 만들어 낸 피터 팬의 핵심이 바로 인간 비행. 날지 못하는 피터 팬은 어떤 극적 구조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무대와 극장에는 조금 더 전문적이며 기술적인 인력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피터 팬과 이름도 비슷한 피터 포이Peter Foy, 1925~2005를 언급할 차례다. 어려서부터 아역 배우로 <피터 팬>을 비롯한 여러 연극에서 하늘을 나는 역할을 수행한 피터 포이는, 어쩜 군 생활도 공군 조종사로 마쳤다. 풍운의 꿈을 안고 대서양을 건너 1950년 미국 뉴욕에 상륙했고, 피터 포이는 후배 피터 팬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연기뿐 아니고 배우를 안전하지만 실감 나게 비행시킬 수 있는 장치들을 고안해 성공을 거뒀다. <피터 팬>뿐 아니었다. <윌리 웡카와 초콜릿 공장> <헤어> <더 위즈> <더 후의 토미> <라이언 킹> <아이다>까지 수많은 작품에서 구현된 와이어액션 신이 피터 포이가 고안한 장비와 시스템, 연기 지도에 의해 완성됐다.
20세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그리고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성장은 와이어액션의 전성기를 더 넓게 열어젖혔다. <캣츠>의 고양이들, <오페라의 유령> 속 유령의 환상적 장면들, <미스 사이공>의 저 유명한 헬리콥터 신은 스크린이 아닌 육안으로 보는 블록버스터를 구현했다. 미술·의상·음악뿐 아니라 무대 액션의 혁신가들이기도 한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 역시와이어액션의 마법을 늘 연구했고, 매번 한계를 깨는 실험을 감행했다.

와이어액션의 신세계를 연 연극 <피터 팬> 1907 (출처: Flying by Foy)
수차례 뮤지컬과 영화로 만들어진 <위키드>는 <피터 팬> 이후 최고의 동화 판타지 와이어액션을 만들었다. <위키드>의 핵심 트랙인 ‘Defying Gravity’에서 만약 마녀 엘파바가 날아오르지 못한다고 상상해 보라. 이것은 마치 테라스에 나온 에바 페론이 ‘Don’t Cry for Me Argnetina’를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아니 그 이상의 재앙이다.
몇 년 전, 중국 시안을 방문한 적 있다. 수백 개의 왕릉, 그리고 병마용이 있는 중국의 고도에는 끝내주는 밤의 어트랙션이 있었다. 실제 산속에서 진행되는 전통극이었는데 총연출자가 바로 <연인> <영웅> <붉은 수수밭>의 장이머우 감독이었다. 압권은 저 멀리 병풍처럼 둘러처진 능선에서 실제로 와이어를 타고 고속으로 날아오는 배우들의 액션. 컴컴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천변만화하는 조명·미술·와이어액션은 어둠 속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세계 각국의 관객들을 치기 어린 비평가가 아닌 순수한 동심의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까 와이어액션에는 그런 힘이 있다. 와이어가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 실제로 배우들이 하늘을 나는 도술을 부리는 건지, 그냥 다 기술에 의한 것인지는 어쩌면 그리 상관없는 건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이끌려, 예술의 취기에 동해 우리는 잠시나마 일상을 잊고 환상에 올라탄다.

화려한 와이어액션을 볼 수 있는 <태양의 서커스> ⓒPortal Foc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