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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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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호 Vol.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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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춤서 한국미 정수를 길어 올리다

달다 / 다시보기 3

국립무용단 <미인>

민속춤서 한국미 정수를

길어 올리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로웠다. 때로는 사뿐사뿐, 때로는 성큼성큼,

전통의 새로운 변주를 향해 내디딘 국립무용단의 큰 걸음은 야심 차고 활달했다.






지난 4월 3~6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 국립무용단의 신작 <미인美人>은 전통문화의 정수를 동시대 예술로 승화시켜 온 국립무용단의 행보에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개막 3주 전 점유율 99퍼센트로 모든 객석을 일찌감치 매진시키고, 개막 전날 최종 드레스 리허설까지 일반 관객에게 유료 공개해야 할 만큼 관객의 관심도 뜨거웠다.



‘미인도’, 현대적 한국미 탐구의 출발점


막이 오르면 새하얀 무대 위엔 ‘한국의 모나리자’로 불려 온 조선 후기 화가 신윤복의 ‘미인도’ 속에서 방금 걸어 나온 듯한 아름다운 여인 한 명뿐. 전통적 아름다움의 전형적 기준에 따라 다소곳하게 춤추는 여인 주위엔 오랫동안 여성의 신체와 사고를 제한했던 규방의 틀처럼 스크린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벽인 듯하지만, 그저 흐릿하게 여성의 몸을 가리고 있었을 뿐인 스크린이 무대 위를 향해 올라가는 동안, 무대 전면 객석 가장 가까운 위치의 오케스트라 피트Pit에서 천천히 춤추는 여인들을 싣고 새로운 무대가 솟아오른다. 이제 이 무대는 전통적 한국미를 출발점으로 삼되, 그 속에서 어떤 새로운 동시대적 아름다움을 길어 올릴 수 있을지 탐구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놋다리밟기, 승무와 나비춤, 강강술래, 북춤과 부채춤, 칼춤에 이어 전통 굿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베 가르기, 산조와 살풀이, 탈춤까지 11가지 민속춤의 신체 리듬이 느릿느릿한 진양조에서 자진모리 혹은 전자댄스음악EDM의 속도감까지 파도처럼 타고 넘으며 이어진다. 참여자의 등을 밟고 걷는 놀이인 ‘놋다리밟기’ 장면이 시작될 때 무용수들의 땋은 머리는 마치 하나로 이어진 듯 연결돼 있다. 놀이를 거듭하고 춤이 자유로워지면서 여성들은 서로를 묶고 있던 땋은 머리의 속박에서 풀려난다.

전통춤의 전형을 그 춤의 정신 그대로 무대 위에 보존하듯 보여 주면서, 그 바로 앞에서 새로운 변주를 부각해 선보이는 형식미는 <미인>이 여러 단락에서 반복해 보여 주는 특징이었다. 전통을 새롭게 변주하는 안무 작업 과정에서 숙성시켰을 고민의 깊이를 보여 준다. 전통이 배경으로 스며들고 새로움이 무대 전면에 나서는 스타일은 큰 붓으로 강조점을 눌러 찍듯 단락마다 반복됐다. 인간사 희로애락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승무와 나비춤, 보름달처럼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산을 돌며 반복되는 강강술래의 장면들도 그렇다.



전통에 현대의 ‘옷’과 ‘무대’를 입히다


연출가 양정웅이 “<미인>을 위해 한국 예술계의 ‘어벤저스’ 창작진을 한자리에 모았다”고 했을 때, 먼저 눈길이 쏠린 쪽은 의상과 오브제 디자인을 맡은 한국의 1세대 스타일리스트 서영희와 무대 디자인을 맡은 아트디렉터 신호승이었다. 대극장 무대에서 의상과 무대 디자인의 중요성은 기록적 성공을 거둔 <묵향> 등 국립무용단의 전작들이 이미 증명했듯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30여 년간 『보그 코리아』의 패션 스타일링을 이끌어 온 서영희 디자이너는 우리 춤에 패션을 입혔다. 삼베·모시·실크·벨벳 등 다양한 소재가 춤의 성격을 따라 하나로 녹아들었을 뿐 아니라, 이전 우리 춤 무대에서 볼 수 없었던 파격적 대비의 보색을 활용한 옷들은 때로 여성 무용수의 어깨선이나 복부를 드러내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북춤을 출 때 신체의 선이 드러나는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감싼 ‘흑자黑子’ 무용수들은 긴 챙모자를 얼굴을 가리도록 눌러 썼는데, 그 모습은 마치 서양 중세 회화 속의 사신死神처럼 느껴졌다.

지름 6.5미터의 거대한 애드벌룬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깔로 현실 혹은 꿈속의 달을 형상화하고, 해오름극장 천장에 닿을 듯 높은 산, 무대를 가로지르는 26미터의 대형 천, 전통 족자를 본뜬 듯한 LED 오브제 역시 강렬했다. ‘NCT127’ ‘에스파’ ‘아이브’ 등 최정상 K-팝 그룹의 뮤직비디오 작업으로 주목받은 디렉터 신호승의 솜씨다. 가끔 과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 실험 정신은 주목할 만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은 익숙하게


<미인>의 무대 위에서 익숙한 것들은 모두 낯설었고, 낯선 것들은 모두 익숙해졌다. 부채춤을 추는 무용수들 양손에 들린 쌍부채는 부드러운 꽃무늬의 전통 문양 대신 마치 날카로운 가시를 품은 듯 보였다. 처음엔 전통 부채춤의 대형으로 움직이던 무용수들이 움직임의 고삐를 풀기 시작하면, 무대 위에 그려지는 것은 직선과 곡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유로운 선이었다. 현악기 리듬에 따라 모이고 흩어질 땐 마치 플라멩코나 탱고처럼 애절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조명과 어우러지는 속도감이 부채를 들고 흔드는 무용수들의 팔을 날개로 바꿔 놓은 듯했다. 관객의 호응도 부채춤 장면에서 가장 뜨거웠다.

신윤복의 풍속화 ‘쌍검대무’와 『무예도보통지』에 나온 쌍검술, 짤랑짤랑 화려한 소리를 내는 단검춤을 혼합한 칼춤은 LED 조명을 활용한 빛나는 막대기를 든 흑자 무용수들이 늘어선 배경, 흰빛을 내는 애드벌룬을 마치 금환일식의 해처럼 검은 원으로 가린 무대장치와 어우러져 판타지의 분위기로 나아갔다.

무속 의례 지노귀굿에서 영감을 얻은 ‘베 가르기’ 장면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무용수들의 춤은, 산조와 살풀이를 지나 이 공연의 마지막 방점과 같은 ‘탈춤’ 장면으로 접어들었다. 우리 전통 탈춤 연희에서 여성 역할까지 모두 남성이 맡아 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성들이 탈을 쓰거나 들고 전통춤 무대에 오르는 것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가면을 벗듯 속박에서 풀려나


피안의 세계에서 건너온 듯 검은 공중 위를 떠돌던 거대한 탈들이 퇴장한 자리에 색색으로 물들인 머리칼을 흔들며 화려한 형광색의 장삼을 채고 뿌리는 무용수들의 탈춤 춤사위가 이어진다. 가면을 벗고 마음껏 춤추는 사람들의 몸 위로 속박에서 풀려난 것을 축하하듯 금가루가 떨어져 내린다. 그 속박은 창작자가 자유로워지려 할 때마다 어깨에 내려앉던 전통의 무게감일 수도, 우리 춤이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나오기 위해 깨뜨리고 뛰쳐나와야 했던 껍질일 수도 있다.

‘범 내려온다’로 우리 전통음악도 얼마든지 젊은 감각으로 ‘힙’해질 수 있음을 보여 준 얼터너티브 밴드 이날치 멤버 장영규 음악감독의 음악은 이 공연의 창작진과 무용수를 모두 태우고 60분 러닝타임의 바다를 헤쳐 나아간 배와 같았다. 전통 미인도 속 미인과 이 공연이 새롭게 발견해 낸 미인들이 재회하는 피날레에 다다를 때까지, <미인>은 눈 돌릴 틈을 주지 않고 관객을 숨 가쁘게 새로운 우리 춤의 롤러코스터에 태워 이끌었다.

Mnet <스테이지 파이터>의 한국무용 코치이자 전국 투어 안무총감독으로 대중에게도 익숙한 안무가 정보경은 개막 전 간담회에서 “지금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은 몸으로 모두 다 드러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단원 무용수들 자랑할 것이 너무 많지만, 한 가지 가장 큰 매력을 꼽자면 제가 움직임을 드리고 그 움직임을 구현하는 데 동일한 춤을 추는 분이 단 한 명도 없어요. 스물아홉 명이 모두 달라요. 그걸 굳이 의도에 맞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화롭게 디자인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이 계속 이뤄졌습니다.”

<미인>이 공연된 해오름극장에선 관객들이 마치 콘서트장에라도 온 듯 공연 중에도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쏟아 냈다. 역시 이전 우리 춤 공연에선 드문 풍경이다. 혁신엔 늘 아쉬움과 우려의 목소리도 뒤따르지만, 새로워진 우리 춤을 향한 관객들의 전에 없던 애정은 이후 국립무용단이 또 다른 혁신을 이어 가는 데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글. 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 문화부에서 종교·영화·미술 등을 담당했는데, 어느새 공연을 보러 다닌 기간이 가장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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