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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호 Vol. 418
목차 열기국립창극단 <보허자(步虛子): 허공을 걷는 자>
허공에 흩뿌려진 꿈
하나의 작품이 사소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되고 많은 정성을 들여 무대에서 관객에게 의미를 던지는 과정에는 꽤 녹록지 않은 품이 든다.
더구나 텍스트를 음악과 그림으로 확장하는 창극 제작은 새롭되 자연스러움을 획득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고된 여정을 이어 가는 2025년 국립창극단의 첫 작품 〈보허자(步虛子): 허공을 걷는 자〉가 무대에 올랐다.

눈과 귀를 사로잡는 상상력
계유정난 27년 후, 소용돌이의 중심이었던 수양(세조)과 안평은 이미 세상에 없다. 그들을 기억하는 안평의 딸 무심이, 화가 안견과 안평의 첩이었던 대어향과 함께 안평의 행적을 쫓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모든 이야기의 구심점은 ‘몽유도원도’에 있다. 세조는 계유정난 이후 안평의 흔적을 지우려 애썼다. 안평이 꿈에 본 정경을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당연히 불길에 던져졌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어떻게 몽유도원도는 살아남았을까. 27년 후 이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보허자(步虛子): 허공을 걷는 자>(이하 <보허자>)는 흥미로운 설정 아래,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펼칠지가 중요한 관람 포인트다.
〈보허자〉에 첫 번째로 눈과 귀를 빼앗긴 요소는 탄탄한 앙상블이라 할 수 있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보허- 능허- 보허등공” 하며 무릉도원을 꿈꿨지만, 폐허가 된 공허함을 공간화하는 합창은 관객의 마음도 텅 비워 냈다. 천수경과 관음보살을 부르는 장면 역시 이승과 저승의 틈을 소리와 음악으로 구현하는데 서늘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허공을 걷는 자의 공간을 무대화하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국립창극단만이 할 수 있는 앙상블은 무대의 장면을 관객에게 청각적인 파워로 전달할 수 있으며, 극 전체의 긴장과 이완의 균형을 잡는 데도 유용하다.
안평과 수양의 붉은 끈은 서로의 몸을 연결해 끌어당기고 밀치면서도 떨치지 못하는 두 인물의 관계성을 시각적으로 보여 준다. 때로는 온몸에 칭칭 감겨 옴짝달싹 못 하도록 묶어 두기도 하고, 떨어져 있어도 맴돌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 당나라의 홍실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홍실 설화는 중국 당나라의 월하노인처럼 도교의 영향력에 있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믿고 있다. 그런데 홍실 설화에서의 홍실이 남녀의 인연을 다룬다면, <보허자>는 그완 조금 달리 보인다. 형제의 붉은 끈은 더욱 적극적으로 상대를 옭아매며, 혈연관계였던 운명공동체가 정적으로 만나 서로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 죄책감으로 표상화된 것은 아닐까. 혈연이기에 결국 혹독하게 끊어 내지 못한 마음 말이다. 역사 속 인물을 다룬다는 건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성, 아쉬움 속 빛난 소리
그렇다면 필자는 〈보허자〉의 인물 관계성을 밀도 있게 들여다보고 싶다. 관객은 극 초반에 몰입하며 여러 극적 파도를 넘어야만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다. 아쉽게도 전반부 안평과 수양의 대립이 폭발적이지 않으니 관객은 마음을 기대지 못하고 표류한다. 안평과 수양이 소리 대결 같은 팽팽한 에너지를 보여 주었다면 어땠을까. 역사적 사실을 모르더라도 극은 극 내에 관계성을 획득해야 한다. 인물의 이해와 서사가 촘촘하게 구현되어 관객을 충분히 낚을 수 있는 극적 장치가 여러 번 마련돼야 하는 것이다. 극장 밖의 역사적 사실을 관객 모두가 알고 있다는 전제는 위험하다. 계유정난을 모르는 아이나 외국인이 보더라도 각 인물이 갈등하는 이유를 알아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인물 간의 대립뿐만 아니라 한 인물의 다층적 해석도 마찬가지다. 안평을 향한 수양의 여린 마음을 부각하려면 그전에 수양의 잔혹한 면이 충분히 드러나야만 한다. 그런데 수양의 잔혹함을 극장 밖에서 끌어오는 수고를 관객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몽유도원도 장면에서 힘이 빠진다. 주인공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었으며 누구와 대적하고 갈등을 어떻게 풀어내는지를 관객이 이해하며 극의 흐름에 동행할 수 있도록 좀 더 친절할 필요가 있다.
안평과 수양이 대립 관계라면 다른 한 축에는 딸 무심과 첩 대어향, 그리고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이 있다. 안평과 안견의 관계성은 아주 명쾌하다. 안견이 안평의 벼루를 훔쳐 달아난 역사적 기록을 비틀어 극에서는 안평이 그를 살리기 위한 기지였다고 말한다.
안평과 안견의 서사가 이토록 견고한 반면 안평과 무심·대어향의 서사는 무책임할 정도로 헐겁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감정은 분명 단순하지 않았으리라.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사랑 또는 경험에 대한 노래로 관계 서사를 전제했다면 세월이 지난 무심의 복잡한 감정을 관객석에 앉은 많은 딸에게 설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설계는 되었으나 설득되지 못했다면 재연할 때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극은 설득을 전제로 한다. 인물의 관계성과 각각의 서사가 밀도 있을 때 극은 늘어지지 않고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보허자〉의 여성 서사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다. 여기에 인물의 입체적 연구와 관객의 감수성이 걸음을 함께한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두근거린다.
장면과 소리를 만드는 일은 나중의 일이다. 그럼에도 배우들은 제 몫을 했다. 다시 무대에 집중하게 해 준 것은 안견 역인 유태평양의 소리였다. 나그네와 안평 본체를 몰입감 있게 끌고 간 김준수의 저력도 남달랐다.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웠지만 이광복 역시 세조의 여러 면을 보여 주려 노력했다.
철현금과 생황 듀오는 꽤 신선했다. 마치 조선 전기 사대부가 추구하는 미적 이상향을 청각으로 옮겨 놓은 듯했다. 예악을 실현하는 금琴은 실은 중국의 금을 거문고에 대입한 것이다. 선비들의 교양서 서유구의 『유예지』에는 당금자보가 있다. 이는 실제로 연주하기 위한 악보로 중국의 금이 오늘날 피아노처럼 사랑방에 한 대씩은 있었으리라 상상해 본다. 철현금은 마치 금의 소리를 구현한 듯 느껴졌다. 다만 자주 나오는 통에 피로도가 있었는데, 안평의 주제곡으로 조금 아껴 썼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안평은 왜 27년 만에 나그네로 나타났을까. 자신을 향한 그리움으로 살아 내는 이들에게 이제 그만 해도 좋다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결국 생자를 위로하며 남은 생은 편안하길 바라는 마음에 미련을 허공에 흩뿌린 건 아닐까. 그렇다면 더욱 남은 이를 어루만질 노래가 간절하다.
초연작을 만드는 마음은 조급하다. 시간은 촉박한데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까지 실제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무대에 펼치면 명암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제 전체 구도의 짜임새에 공을 들일 필요가 있다. 인물의 갈등 구조, 인물의 독백, 장면의 전환과 2중창·독창·합창에서 잔뜩 쥐어진 힘을 빼고 입체적으로 설계하는 일 말이다. 그리운 안평을 그저 “아버지!”라고 외치기에는 영화·드라마로 단련된 관객의 눈과 귀의 수준은 높다. 관객은 객석에서 충분히 설득당한 후에야 작품에 비추어 내 삶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이제 호흡을 가다듬었으니 관객을 사로잡는 소리와 서사의 힘을 재연에서 기대해 본다.

음악을 매개로 다양한 글쓰기를 한다. 제4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 대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등단했다. 에세이 『가끔은 혼자이고 싶은 너에게』 『마음을 듣고 위로를 연주합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