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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7월호 Vol.366

국립국악관현악단 김영미

예술가의 초상


해금 인생 35년. 무대 위 완성된 소리 한 번을 위해 평생 거친 소리와 싸우는 삶을 살아왔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역사의 산증인인 그에게 지금의 화두는 ‘청중이 원하는 음악’이다

“창단 멤버로 들어와 청춘을 바쳤네요. ‘라떼는 말이야’ 시작해 볼까요?(웃음)”
서글서글한 눈웃음이 매력적인 김영미 해금 수석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산 역사다. 1995년 창단과 동시에 입단한 최고참 단원인 그가 요즘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2020 겨레의 노래뎐’ 공연을 위해 맹연습 중이지만,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가 반복되면서 과연 공연이 무사히 열릴 수 있을지 미지수라서다.(결국 무관중으로 공연이 진행되는 바람에 영상으로 관객을 만나게 됐다.)
“올해 초 열린 ‘신년 음악회’ 이후 전 단원이 서는 무대가 없었거든요. 창단 이래 이렇게 오랜만에 하는 건 최초예요. 재택근무에 들어갈 때부터 ‘멘붕’이었죠. 모여야 앙상블이 되는데 모이지 말라니 두렵고, 온몸이 점점 아프더라고요. 늘 목표를 향해 긴장해 있던 근육이 갑자기 느슨해지니 오십견까지 오더군요. 이번 공연은 꼭 하고 싶어서 매일 신규 확진자 추이를 확인하며 가슴 졸이고 있어요.” 
‘2020 겨레의 노래뎐’은 국립극장 창설 70주년과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기념해 한민족 근현대사의 희로애락을 풀어내는 공연으로 기획됐다. 대한제국 애국가와 ‘올드 랭 사인’ 선율에 노랫말을 붙인 임시정부 애국가, 지금의 애국가를 10분짜리 곡으로 엮은 손다혜 작곡의 ‘하나의 노래, 애국가’를 비롯해 우리 민족에게 친근한 멜로디를 모티프 삼은 다양한 레퍼토리로 구성한 대중적인 공연이다. 
“주제가 ‘전쟁과 평화’예요.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콘셉트인데, 코로나19로 인해 지금 보내고 있는 슬픈 시간과도 잘 맞물리게 됐죠. 저는 특히 ‘하나의 노래, 애국가’가 좋더라고요. 대한제국 애국가에도 감정이입이 잘되고, 임시정부 애국가도 단선율인데 해금과도 잘 어울리고요.”
그는 숨결처럼 편안하게 귀에 감기는 해금의 음색이 ‘딱 사람 목소리’라고 표현했다. 아시아 전역에 비슷한 악기가 있지만, 유일하게 명주실과 나무라는 자연의 재료를 고집하는 ‘원조’이기에 중국에 가면 해금을 두고 “우리 조상님을 잘 모시라”라고들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얼후는 쇠줄로 바뀌어서 바이올린처럼 짚어서 소리를 내고, 소리통도 뱀가죽이죠. 해금은 대나무에 명주실 그대로라 전혀 달라요. 다소 거칠지만, 사람 목소리가 다 다르듯이 해금 소리도 저마다 다르죠. 기둥과 줄이 멀어서 줄을 깊이 흔드는 농현 기법이 가능한데, 그렇다 보니 활이 지나가면 파장도 길어서 기다려줘야 하고요. 이래저래 쉽지 않은 악기죠. 
‘자연의 소리’ 예찬론자지만 한때 개량해금연구회 대표로 해금 개량을 주도한 적도 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 초기 악기 개량 사업을 추진하면서, 해금도 얼후처럼 다이내믹하게 표현하는 주법을 위해 개량을 시도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얼후 소리가 왠지 듣기 싫게 느껴졌어요. 뱀가죽 보판 때문인 것 같아서 다른 가죽도 써보고, 개인적으로 연주자 20명쯤을 모아서 주법을 연구했어요. 벽을 넘지 못했죠. 기둥과 줄의 폭이 좁으니 농현에서 걸리면서 국적 잃은 소리가 돼가더군요. 하지만 과정에서 얻은 것도 있어요. 테크닉 연습을 하다 보니 활의 다양성과 빠른 패시지가 가능해진 거죠. 결국 악기 개량은 못 했지만 연주 실력이 엄청 개량됐어요.(웃음) 해금은 유일하게 개량이 안 된 악기지만, 연주자들의 사고가 넓어지면서 발전한 악기예요.” 

국립극장에서 열린 ‘새로운 세상’ 

그는 지난해 국립극장 예술교육 사업인 ‘취미의 계절’ 강사로 나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두 시간짜리 원데이 클래스였지만 완전 초보자들이 두 곡이나 습득해 작은 발표 무대에까지 서도록 인도한 것이다. 
“그냥 쉽게 노래를 같이 부르면서 해보라고 했어요. 해금을 잡아봤고 소리를 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신기하게 연주가 되더군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맞았어요. 그 짧은 시간에 재능을 발견하신 분들도 있어서 뿌듯했죠.”
그런데 막상 본인은 “해금을 한 번도 즐겨본 적 없다”라고 했다. 직업으로서 늘 ‘넘어야 할 산’이 있었던 것이다. 
“오디션 1등이 목표였다가 공연 잘 끝내는 게 목표가 되고, 해금 수석이니까 수준을 지켜야 하는 부담도 있고, 계속 그렇게 살아온 거죠. 퇴근할 때는 정말 아무 소리도 안 듣고 갔어요. 무대 위 완성된 소리 한 번을 위해 평생 거친 소리와 싸우는 삶이랄까요. 그런데 2016년 ‘아마추어 관현악단’ 강의를 맡으면서 좀 달라졌어요. 수강생들이 너무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내가 내는 소리가 이렇게 행복한 소리란 걸 처음 알았어요. 내 재능으로 내가 즐거워야 한다는 걸 그분들을 통해서 알게 됐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힘 빼고, 무대를 즐기는 계기가 됐어요.”
사실 그의 해금 인생은 ‘이유 같지 않은 이유’에서 시작됐다. 어려서 몸이 약해 고무줄넘기도 잘 못하던 소녀는 피아노를 제일 잘 쳤다. 그저 인정받는 게 좋아서 피아노를 마냥 열심히 치던 어느 날, 언니가 내민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원서가 모든 걸 바꿨다. 
“당시만 해도 실기 시험을 따로 보지 않고 입학했어요. 등교 첫날 선배의 연주를 듣고 악기를 고르게 되는데, 해금이 아담하고 들고 다니기 딱 좋더군요.(웃음) 가볍게 시작했는데 수업 때 쓱 보니 내가 제일 잘하는 거예요. 긴장감 없이 다니다가 기말시험 성적에 충격을 받았죠. 알고 보니 다들 개인 레슨을 받고 있더군요. ‘난 늦었다’라는 걸 깨달은 그 순간부터 새벽 6시 등교, 밤 10시 하교가 시작됐죠. 졸업 때까지 도시락 2개씩 싸 들고 다니면서 하늘 한 번 쳐다보지 않고 연습만 하며 살았어요.” 
대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숙사에 들어가서 하루 10시간씩 연습하며 4년을 보냈다. 하지만 ‘미친 듯이 달려온’ 길의 끝에는 상상하던 ‘새로운 세상’이 없었다. 
“졸업 후 중앙국악관현악단에 들어갔는데, 새로운 세상은커녕 벽에 부딪힌 거죠. 어릴 때 못다 한 피아노가 생각나더군요. 악단을 그만두고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미국에 유학을 가서 레슨을 받으며 지내는데, 어느 날 국악 음반을 듣고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잠깐의 외도였지만, 그 외도가 있었기에 두 번 다시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새로운 세상’은 해금을 다시 시작하며 열렸다. 19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에 입단하며 귀하게 얻은 한 번의 기회도 놓치지 않으려 ‘악착스럽게’ 활동한 시절이었다. 
“결혼하고 바로 임신했는데, 임신 기간에 해외 연주가 세 차례 있었어요. 한 번 빼달라고 하면 영원히 빠질까 봐 다 따라다녔죠. 임신 9개월 때는 외국인들을 위한 특별 공연에서 협연할 기회가 있었어요. 만삭이라 못 한다고 하면 자신 없는 거로 비칠까 봐 강행했죠. 한복 입고 대기하고 서 있는데, 무대감독이 깜짝 놀라더군요. 요즘에는 대부분 안 그러겠지만, 저는 그 시절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좋은 추억이다 싶어요.”
‘라떼는 말이야’는 잠시 더 이어졌다. 창단 초기 스태프 구성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단원들이 총무·악기계까지 소화하던 고생담부터 황병기 예술감독 재임 6년 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하다. 
“황병기 감독님 때는 그동안의 장벽을 허물었달까요. ‘황병기’란 이름의 덕을 고스란히 입었어요. 6년 동안 우리의 갈망을 아버지처럼 다 채워주고 가셨죠. 예산 부족으로 못 갈 뻔한 해외 공연이 있었는데, ‘그래서 얼마면 되느냐’고 하시더니 결국 후원을 받아 오셨죠. 그 얘기는 요즘도 전설처럼 내려와요.(웃음)” 
국립국악관현악단 역사의 산증인인 그에게 지금의 화두는 ‘청중이 원하는 음악’이다. 
“눈높이를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너무 어렵게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좀 다가가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음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관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죠. 작곡 공모나 위촉을 많이 하는데 뚜껑을 열어보면 늘 무거워요. ‘너무 심혈을 기울였어…’ 하는 식이죠.(웃음) 작년에 시도한 ‘3분 관현악’에서는 3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때문인지 작곡가들이 욕심을 덜어내서 더 좋은 곡이 나온 것 같아요.” 
그는 해금이 어떤 악기, 어떤 장르와도 잘 어울리며 그 가능성은 무한대라고 자랑한다. 매력적인 현대곡을 추천해 달라니 국악 크로스오버의 원조인 정수년의 ‘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 등을 꼽는다. 지금 세상에 필요한 위로의 음악이란 것이다. 김영미의 해금이 들려주는 위로의 ‘목소리’는 어떤 색깔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유주현 ‘중앙SUNDAY’ 공연 담당 기자.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 황필주 Studio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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