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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9월호 Vol.356

고유문화를 지키며 예술을 향유하는 방법

전통 예술 기행┃폴란드 전통음악

공연예술을 삶의 한 부분으로 들여와 즐겁게 더불어 사는 사람들. 그들의 뭉근한 애정과 노력은 폴란드를 문화 강국으로 만들고, 전통을 더욱 견고히 지켜내는 힘이다.

 

 


올해 여름, 폴란드를 여행하던 중 폴란드에서 열리는 세계 음악 축제 글로발티카 페스티벌Globaltica Festival에 한국 장구 연주자 김소라가 초청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음악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 폴란드의 남부 공업도시 크라쿠프에서 최북단의 그단스크로 이동했다. 이동 시간은 고속 열차로 6시간 30분 정도였지만, 창밖의 이국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지내는 평화로운 시간과 열차 내부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로망을 누릴 수 있어 지루할 틈 없이 행복했다.
글로발티카 페스티벌은 그단스크에서 20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디니아의 공원에서 진행됐다. 24만 인구의 작은 도시에서 펼쳐진 이 축제는 무척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잔디밭에 무대가 설치되고, 관객들은 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다 공연이 시작되면 음악을 듣기 위해 메인 무대 주위로 모여들었다. 친환경 시스템과 성숙한 관객들이 만들어낸 축제 속에서 5일간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50일간 폴란드에 머물며 이 나라가 연극·영화·음악 등 예술 분야에 상당히 높은 문화 수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도시에도 다양한 문화시설을 구축해 일반 시민들이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을 구비했다. 문화의 문턱을 낮춘 행정이 참으로 부러웠다. 폴란드의 연간 공연 횟수가 약 5만 회에 이른다고 하니 문화 강국이 분명하다.

 

발트해 연안의 아름다운 도시들
폴란드엔 드넓은 공원이 지천으로 있고 관리도 아주 잘 돼 있었으며, 시민 친화적인 공연과 축제가 다채롭게 진행됐다. 그곳에서 만난 폴란드 사람들은 세련되고, 여유 있고, 친절했다. 나는 글로발티카 축제가 끝난 후, 그단스크와 소포트 사이에 있는 마을의 작은 숙소를 얻어 2주간 더 체류하며 주변에서 열리는 공연을 연일 즐겼다. 쇼팽 피아노 페스티벌을 비롯해 62년 동안 지속돼온 성당 오르간 콘서트, 소포트 클래식 페스티벌, 레이디스 재즈 페스티벌 등 수많은 행사가 조금씩 시기가 겹치며 이어졌다.
발트해 연안에 있는 세 도시 그단스크·소포트·그디니아를 가리켜 트라이시티Tri-city라고 한다. 전방 20km 안에 오밀조밀 인접해 있는 이 도시들은 서로 다른 지리·문화·경제를 이루고 있어 함께 여행하기 매력적이다.
특히 그단스크는 동화 속에 들어온 듯 아름다운 중세풍의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치 숨은 보석 같은 천년의 도시다. 1257년 이후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으로 부유한 상인들이 이 도시에 정착하면서 화려한 장식과 발코니가 있는 집들이 지어졌다. 발트해 인근의 항구도시로 지리적 여건이 좋은 그단스크는 질곡의 역사를 갖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그단스크에서 시작되며 올드타운 대부분이 파괴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본 아픔의 도시다. 다행히 지금은 잘 복원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단스크에서 꼭 가봐야 하는 박물관 두 곳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박물관과 동유럽의 민주주의 기록을 담아낸 박물관 유럽 연대자유노조 센터European Solidarity Centre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의 도화선이 된 곳이라 그 무게감부터 사뭇 달랐다.
클래식 페스티벌이 열리는 소포트는 여름 휴양도시로 개발된 도시다. 나폴레옹 군대의 퇴역 장군을 위한 고급 호텔과 유럽 부호들의 여름 별장으로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그디니아는 그단스크에 있던 항구가 옮겨가면서 만들어진 신생 도시다. 깨끗한 해변과 산책로, 뮤지컬 극장, 필름 센터 등 볼거리가 충분하고 절로 눈길이 가는 작은 레스토랑과 카페도 있으니 휴가지로 단연 손꼽히는 지역이다.

 

전통을 잇는 다양한 밴드
폴란드는 여러 이웃 나라와 왕성하게 교류하던 역사 속에서도 민요·기악곡·민속춤 등 독자적인 전통음악을 구축했다. 16·17세기에 들어서 마주르카(마주르)·폴로네즈 같은 무도 형식이 생겨나며 음악 색채가 더욱 뚜렷해졌는데, 리듬의 변화도 좀 더 다양해지고 지역마다 선호하는 악기와 장단도 분명해졌다. 악기는 바이올린과 전통 첼로인 울프 베이스Wolf Bass, 아코디언 그리고 전통 북과 양가죽 주머니가 달린 백파이프 두디 비엘코폴스키Dudy wielkopolskie 등이 사용된다.
폴란드의 대표적인 민속무용 폴로네즈는 17세기 궁정에서 귀족들 사이에 유행하던 춤이지만 지금은 보편화됐다. 세 박자 양식의 민속춤이자 그 무곡인 마주르카는 1600년대 상류사회에 크게 유행하면서 점차 음악이 독립적인 예술로 자리 잡게 됐다. 마주르카라는 용어는 폴란드 마조프세 지방에서 유래했다. 마주르카와 폴로네즈 음악은 쇼팽에 의해 수많은 피아노곡으로 만들어지며 클래식 음악으로 승화됐지만, 원래는 민속 춤곡이다.
폴란드에서는 ‘쇼팽의 나라’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클래식 음악 콘서트가 자주 열렸지만, 아쉽게도 폴란드 전통음악은 쉽게 접할 수 없었다. 그래도 올해로 15주년을 맞은 글로발티카 페스티벌의 새로운 프로젝트 ‘폴리시 쇼케이스 데이Polish Showcase Day’에서 폴란드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한 일곱 팀을 만났다.
먼저 텡게 호페TGIE CHŁOPY는 폴란드 키엘체 지역의 민속 춤곡의 전통을 잇고 있는 팀이다. 마을의 명인들을 찾아 음악을 채집하거나 배워서 무대 음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키엘체 지역이 브라스밴드로 유명하기 때문에 텡게 호페도 베이스와 함께 트럼펫, 클라리넷과 같은 관악기를 연주한다. 이 팀은 글로발티카 축제 둘째 날 댄스파티에서 신나는 마주르카 음악으로 관객을 춤판으로 끌어들였다. 지난 5월 내한해 의정부음악극축제에 참여했고, 오는 9월 전주세계소리축제에 초청받아 한국 관객에게 폴란드 전통음악을 들려줄 예정이다.
개인적으로 제일 흥미로웠던 팀은 3인조 젊은 여성그룹 ‘수타리Sutari’다. 바이올린·울프 베이스·북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팀이다. 폴란드 시골 마을에서 부르던 노래를 기초로 하지만, 여성과 관련된 노래들을 재해석해서 공연한다. 전통 선율이 주는 아련한 정서는 듣는 이의 굳게 닫힌 마음도 찬찬히 열 수 있는 힘을 가진 듯했다. 폴란드 실레지아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하는 ‘크시코파Krzikopa’의 공연도 기억에 남는데, 폴란드 민속 무곡인 쿠야비아크Kujaviak·오베레크Oberek에 결혼식 노래를 곁들였다. 아코디언·바이올린·주르나 등의 전통악기로 연주한 곡을 만드는, 개성 넘치고 파워풀한 팀이다.

 

 

믿음과 응원 그리고 든든한 지원
여행을 해보니 폴란드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있는 듯하다. 동유럽이라서 아직은 여행하기 불편할 것이라는 내 막연한 선입견이 얼마나 우매했는지 일주일 정도 지나자 조금씩 체감했다.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를 여행했을 때와는 다소 다른 체계적인 시스템과 인프라에 적잖이 놀랐다. 나를 정말 놀라게 한 건 전통문화와 공연예술에 대한 폴란드 사람들의 단단한 애정과 지원이었다. 우리에게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과학의 어머니 퀴리 부인의 나라로 알려진 폴란드는 음악가는 물론, 일반 관객의 음악 수준이 굉장히 높았다. 레이디스 재즈 페스티벌은 한 달 전 모든 음악회 티켓이 매진됐고, 숲속 오페라 극장에서 진행된 소포트 클래식 페스티벌 개막 연주는 5천 석의 좌석을 꽉 채웠다.
글로발티카 페스티벌 쇼케이스에 참여했던 팀들은 다음 날 여러 분야의 관계자와 미팅을 진행했고, 나도 음악 관계자로서 참석해 폴란드 전통음악을 선보인 일곱 팀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폴란드 정부기관이 자국 음악가들의 해외 진출 가능성을 믿고, 적극적으로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음악을 전공한 젊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폴란드 전통음악이 널리 계승되고 있는 것이 반가웠다.
방학 때마다 배낭여행을 하면서 삶의 질이 부쩍 높아졌다. 여행 중 세계 음악 축제를 만나는 것도, 각 나라의 전통음악을 접하는 것도 진정으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여행에서도 폴란드의 다양한 전통음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어쩌면 내 인생은 찬란한 축복을 받은 게 아닐까 감사한 마음이 든다.

 

현경채 음악인류학 박사, 영남대학교 겸임 교수. 여행하며 현지 음악을 탐닉하는 것을 좋아하며 방학 때마다 긴 여행을 떠나고 있다. 저서로 여행 중에 만난 음악 이야기를 담은 ‘배낭 속에 담아 온 음악’과 인문학 기행 ‘매혹의 땅, 코카서스’가 있다.

사진 Marek Salatowsk, 현경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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