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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5월호 Vol.352

곽씨 부인, 화관을 쓴 여신의 딸을 품다

삶과 노래 사이┃중국 신화 속 여신 '서왕모'

중국 신화에서 하늘의 재앙과 형벌을 관장하는 엄한 신의 모습으로,

때로는 불사를 관장하는 천하절색의 여신으로 그려지는 서왕모가 춘향과 심청을 만났다.


고운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나른한 봄날, 광한루에 몽룡이 등장한다. 오작교에서 직녀를 만난 견우처럼 ‘꽃밭 속에서 삼생의 인연’을 찾아보려는 참이다. 월궁항아(月宮姮娥)처럼 어여쁜 여인을 만날 수 있을까 여기저기 살펴보는데, ‘해도 같고 달도 같은 어여쁜 미인’이 눈에 들어온다. 방자에게 물어보니 월매의 딸 춘향이라, 몽룡의 마음이 급해진다. 하지만 방자는 “춘향의 어머니가 관기였지만 근본이 양반 집안이니 불러오기 어렵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몽룡은 “형산백옥(荊山白玉), 여수황금(麗水黃金) 모두 각각 주인이 있는 법(物各有主)”이라며 당장 불러오라 다그친다. 그 시절 상전을 모시는 방자가 어쩔 도리가 없어 명을 받들고 춘향을 부르러 간다. 바로 이 상황을 노래하는 판소리 ‘춘향가’의 대목에서 서왕모가 등장한다.

 

“맵씨 있는 저 방자, 태도 좋은 저 방자, 연입 벙치 눌러쓰고 충충거리고 건너갈 제, 조약돌 덥벅 쥐여 양유앉인 저 꾀꼬리 툭 처 휘여 날려보며, 서왕모(西王母) 요지연(瑤池宴)의 편지 전튼 청조(靑鳥)같이, 이리저리 건너가 춘향 추천 하는 곳 바드드득 달려들어, 아니 옛다 춘향아!”
-김소희 소리,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어떤 이유로 재주 많은 방자가 도령의 명을 받고 춘향에게 다가가는 장면에 중국 신화 속 ‘서왕모’와 ‘푸른 새(靑鳥)’를 등장시킨 걸까.

 

 

 

불멸의 욕망, 사랑으로 굴절하다
서왕모는 머나먼 서쪽, 신들의 영역인 곤륜산에 위치한 ‘요지’라는 호수에 살고 있는 여신이다. 서왕모는 ‘요지’에서 아주 성대한 잔치를 열었는데, 그 잔치에 많은 신선을 초대해 불로장생의 영약인 ‘반도(蟠桃)’라는 복숭아를 나눠줬다. 이 잔치를 ‘요지연’이라고 한다. 잔치가 곧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건 서왕모 곁에 머무는 ‘푸른 새’의 역할이다. 보존 상태가 좋은 여덟 폭의 ‘요지연도’ 병풍이 경기도박물관에 있다. 아름다운 여신의 모습을 한 서왕모가 반도를 풍성하게 쌓아놓은 상 앞에 앉아 있고, 한편에는 ‘목천자(穆天子)’가 보인다. 목천자는 주周 목왕穆王을 가리키는데, 여덟 필의 준마를 타고 머나먼 서쪽으로 순행을 나갔다가 ‘요지’에서 ‘서방의 왕모’, 즉 서왕모를 만난다. 목왕은 서왕모에게 영롱한 옥과 꽃무늬 비단을 선물로 준다. 그리고 둘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별의 노래를 부른다. 동쪽에 있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목왕에게 서왕모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

 

“흰 구름 하늘에 떠 있고 산언덕 절로 솟아있습니다.

길은 아득히 멀어 산과 물이 그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 죽지 말고 다시 돌아오시기를.”

 

목왕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화답한다.

“걱정 말아요, 내가 동쪽으로 돌아가

나의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들이 모두 편안해지면

그때 당신을 보러 다시 돌아오리다.”

 

이렇게 애틋한 노래를 끝으로 이별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소설의 영역에 속하는 ‘목천자전(穆天子傳)에 기록됐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요지’는 서왕모가 신선들에게 반도를 나눠주는 장소가 아니라, 연인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사랑의 공간으로 묘사된다. ‘춘향가’에서 춘향과 몽룡의 사랑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방자에게 ‘푸른 새’의 이미지가 투영된 것은 서왕모와 목왕의 사랑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이 ‘요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춘향가’에서 ‘푸른 새’가 서왕모의 전령 역할을 하는 것일까?


사실 서왕모가 처음부터 아름다운 서방의 왕모는 아니었다. 서왕모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산해경(山海經)’에서 서왕모는 미인으로 묘사되지 않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도 확실하지 않고, 사람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표범 꼬리에 호랑이 이빨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봉두난발에 머리꾸미개를 얹기는 했으나, 하늘의 재앙과 형벌을 관장하는 무시무시한 신이다. 이런 서왕모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삼청조(三靑鳥)’, 즉 세 마리 푸른 새다. 이 새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귀엽고 작은 파랑새가 아니라 독수리나 매 같은 맹금류다. 그 새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먹을 것을 사냥해 서왕모가 사는 동굴까지 날아와 떨어뜨려 준다. 그래서 후대 작품에서는 삼청조가 세 명의 시녀로 변모하기도 한다. ‘춘향가’에서 푸른 새가 서왕모의 요지연을 알려주는 전령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서왕모가 한(漢)나라 때 이르면 불사약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변한다.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불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무덤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무덤의 벽에는 부조를 새겨 죽은 이를 기리고 그의 영혼이 불멸하기를 기원했는데, 무덤의 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도상(圖像)의 주인공이 서왕모다. 용과 호랑이 모양의 자리에 웅크리고 앉은 서왕모 앞에는 해를 상징하는 세발 까마귀(三足烏)와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있고, 절구에 약을 찧는 토끼가 있다. 상서로움을 뜻하는 구미호(九尾狐)도 있고, 약초를 바치는 신선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2천여 년 전 서왕모는 불사약을 갖고 있는 독립적이고 위대한 여신으로 받들어졌던 것이다. 물론 한나라 때의 무덤 도상에는 서왕모가 ‘복숭아’를 들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서왕모가 갖고 있는 불로장생의 영약이 복숭아라는 이야기는 위진(魏晉)시대에 덧붙여진 것이다.


한나라의 영역을 크게 넓혔던 제왕인 한(漢) 무제(武帝)는 진시황만큼이나 불로장생에 대한 소망이 컸다. 그래서 불사약을 갖고 있는 서왕모와 무제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위진시대에 나오게 되는데, 그 작품에서 서왕모는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여신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서왕모가 ‘아름다운 서방의 왕모’ 혹은 ‘아름다운 천상의 여신’으로 묘사되는 것은 위진시대에 들어서다. 이런 서왕모의 이미지가 잘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 판소리 ‘심청가’다. 심학규에게 자식이 없으니 곽씨 부인이 열심히 불공을 드려 마침내 태몽을 꾸게 되는데, 그 꿈에 ‘서왕모의 딸’이 등장한다.

 

“하늘에 선녀 하나 옥경으로 내려올재 머리에는 화관(花冠)이요 몸에는 원삼(圓衫)이라 계화(桂花)까지 손에 들고 부인전(夫人前) 배례허고 곁에 와 앉는 모양… 소녀는 서왕모 딸일려니 반도진상(蟠桃進上) 가는 길에 옥진비자(玉眞婢子) 잠간 수어수작(數語酬酌) 하옵다가 시각 조금 어긴 고로 상제께 득죄허야 인간(人間)으로 내치심에 갈 바를 모르더니 태상노군 후토부인 제불보살 석가님이 댁宅으로 지시허여 이리 찾아 왔사오니 어여삐 여기소서.”
-박유전 소리, 판소리 ‘심청가’ 중에서-

 

곽씨 부인이 ‘계수나무 꽃’을 든 ‘서왕모 딸’이 등장하는 꿈을 꾼 날부터 태기가 있어 마침내 심청을 낳는다. 이때 계수나무 꽃은 왜 등장하게 된 걸까. 중국 신화에서 계수나무와 연관된 것이 달의 여신 ‘항아(姮娥’)이다. 서왕모가 준 불사약을 먹고 항아가 달로 날아갔을 때 달에는 계수나무와 토끼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를 ‘월궁항아’라고 하는데 ‘심청가’에서 심청의 미모를 묘사할 때 ‘월궁항아’와 같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서왕모의 불사약을 먹고 달로 올라간 여신 항아처럼, 자신의 딸도 영원한 생명과 아름다움을 지니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서왕모 딸’이라는 호칭 속에 들어가 있다.

 

한편 위진시대 작품인 ‘한무고사(漢武故事)’에도 푸른 새가 등장한다. 한 무제가 서왕모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을 때 먼 서쪽 하늘에서 푸른 새 한 마리가 훨훨 날아온다. 무제가 그것이 무슨 새인지 물으니, 곁에 있던 동방삭(東方朔)이 “푸른 새로군요. 아마도 저녁 때쯤 서왕모가 도착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여기서도 푸른 새는 서왕모의 도착을 알려주는 전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저녁이 돼 서왕모가 내려오는데, 푸른 새 두 마리가 양옆에서 서왕모를 모시고 있다. 이 작품에서 복숭아가 불로장생의 영약으로 등장한다. 서왕모를 공손하게 맞이한 무제가 불사약을 청하니, 서왕모는 한 무제에게 복숭아 다섯 개를 준다. 그런데 무제가 그 씨앗을 슬그머니 감춘다. 하지만 서왕모는 웃으며 말한다. “그 복숭아는 3천 년에 한 번 열매가 열린답니다.” 그러니 씨앗을 숨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상에서의 권력이 큰 제왕일수록 장생불사의 욕망도 컸지만, ‘필멸’의 인간에게 ‘불멸’은 이룰 수 없는 아스라한 꿈일 뿐이었다. 불사의 복숭아는 신들의 영역에만 속한 것이었으니.


이처럼 중국 신화에서는 서왕모가 주로 ‘불사不死의 아이콘’으로 묘사되지만, ‘춘향가’와 ‘심청가’에서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 혹은 미모의 여신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그들은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신화처럼 절절한 사랑을 꿈꾸는 낭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김선자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 중국 신화를 비롯해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신화와 문화, 역사 등에 관심을 갖고 강연과 저술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림 신진호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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