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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호 Vol.352

은은하게 때론 묵직하게

SPECIAL┃국립창극단 '심청가' 의상 디자이너 김영진

“격조 있고 기품 있는 골계미를 품은 ‘심청가’에서

‘지금, 우리’라는 핵심을 다시 발견하실 겁니다.

품위 있게 살아간다는 게 과연 무엇인지를.”


누구나 알고 있기에 더 어려운 것이 있다. 날마다 먹는 음식, 매일 입는 의복,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 그리고 고전. 이전과는 다르게 시도해보려 해도 그게 무엇이든 누군가 한 번쯤 시도해봤을 법하다. 고전의 전형적 서사를 파괴하고 비틀어 현대화한들 생각의 경계를 뛰어넘기도 쉽지 않고, 배경을 변주하거나 주인공의 선악 구도를 바꾸는 것도 익숙해 지루할 지경이다.

 

 

 

비슷비슷한 콘텐츠의 홍수에서 마주하는 ‘심청가’와 ‘한복’이라니. 이 새삼스러울 것 없는 소재가 우직하게 제 목소리를 내며 어우러져,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온 작품이 있다. 바로 “최고가 최고를 만났다”라는 평단의 평가가 전혀 지나치지 않아 보이는 국립창극단의 ‘심청가’다. ‘심청가’는 2018년 초연 당시 매진 행렬을 불러온 화제작이다. 도창 안숙선과 유수정의 소리를 타고 세파에 지쳐 놓칠 뻔한 민중의 염원이 폐부를 파고들 때, 관객은 속 깊은 눈물을 절로 쏟아내게 된다.

 

눈시울이 붉어진 속에서도 놓칠 수 없는 건 은은하게, 때론 묵직한 색감으로 등장인물을 고고하게 빛내는 한복 자락이다. 창극 ‘심청가’가 이전 작품과 색다르게 느껴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시련과 역경의 주인공들에게 둘린 기품 있는 의상’. 창극 ‘심청가’는 낡고 비루한 의복에서 보석을 휘두른 화려함으로 신분의 변화를 설명하던 구태의연한 설정과는 완전히 결별한 작품이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처럼 리얼리티의 전형성을 파괴해 각 장면의 극적인 구성을 강조하고 대상과의 거리적 관점을 의상으로 구현하려 했다”라는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의 설명을 듣고 나면 이 작품이 가진 ‘디테일의 미학’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는 6월 달오름극장 재공연을 앞두고 ‘심청가’의 의상을 맡은 김영진을 만났다. 그녀는 영화 ‘해어화’ ‘조선마술사’, 오페라 ‘동백꽃 아가씨’, 연극 ‘햄릿’과 최근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등에서 패션성을 기반으로 한 젊고 관능적인 한복으로 주목받았다.

 

 

작품 전체가 고급스러움을 지향하지만 시련과 역경의 주인공들에게 둘러진 기품 있는 의상이라니, 작품의 원형에서는 탈피한 선택이었어요.
“소리꾼 한 명 한 명의 자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손진책 연출님은 미학적·예술적 감도가 굉장하신 분입니다. 한복이 가진 군더더기 없는 절제미와 더불어 궁극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였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었죠. 이태섭 무대 디자이너의 간결하면서도 모던한 무대와 어우러지니 오히려 각자의 배역도 돋보이며 조화롭게 완성된 것 같아요.”

 

한복을 가장 패셔너블하게 다룰 줄 아는 디자이너라는 평가입니다. 그에 비해 이번 작품은 고전 한복에 가깝습니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극도의 크리에이티브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작품은 패션지 화보가 아니지요. 온전한 전통 소리를 최대한 살리는 게 우선이었기에 한복 역시 전통을 제대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도전이라면, 전통 색을 굉장히 많이 찾으려 노력했다는 거예요.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전통 색은 굉장히 화려합니다. 진달래·도라지·청자 등 한국적인 색을 구현해 장면마다 나름대로 극화한 코딩 방식이 있지요. 조명을 맡으신 김창기 선생님이 색감을 잘 살려주신 것도 주효했어요.”

김영진은 작품을 준비하며 손진책 연출에게 소리꾼은 청자, 악사는 백자 색감으로 구현해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남성 소리꾼의 소창의는 비색(翡色) 은조사로, 남성 악사의 도포는 소색素色 표주박생고사로 만들었다. 고급스러운 원단과 소리가 어우러져 무대는 한결 풍부해졌다.

 

은조사, 표주박생고사. 색감뿐 아니라 원단도 다양한데요.
“유명 요리사에게도 결국은 재료가 가장 중요하듯, 디자이너 역시 좋은 재료를 볼 줄 아는 눈은 필수입니다. 전통 작업을 하는 사람이니 그에 대한 연구는 당연하지요. 은조사는 영조대왕의 도포에서 착안했어요. 은은한 녹색을 띠는 무늬 없는 홑옷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격조 높은 소리라는 탁월한 재료에 맞는 원단을 구하려 애썼습니다.”

 

다소 생소한 원단이 많은데, 이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누빈 건가요?
“보통의 경우 부산·전주·상주 등 전국을 찾아다니긴 합니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우리 복식에 많이 쓰이는 갑사·진주사·생고사 등을 바탕으로 원단의 문양과 색감도 따지게 됐지요. 운문(雲紋)으로 된 생고사나 도라지색 진주사 같은 경우 우아하면서도 견고해 보입니다. 특히 이번엔 우연히 운 좋게 만난 물꾸리생초 원단이 ‘이거다’ 싶었어요. 서울 광장시장에서 부모님이 포목집을 한다던 젊은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원단인데, 포목 일을 접으려다가 ‘차이 김영진’ 한복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고 하더군요. 상주 비단인 물꾸리생초는 그가 소개한 원단이었는데, 30년 전에 짜놓은 게 전부라고 했어요. 모두 동원해 원하는 색상 염색을 한 뒤에 황후 심청 의상에 사용했죠.”

 

 

그녀는 원래 극단 생활을 하며 무대를 향한 꿈을 꿨다. 공연예술아카데미 연기 연출부에서 연기를 배우며 연출가의 길을 익히기도 했는데, 좋아서 미치도록 매달린 연극이었지만, 현실적인 생계와는 거리가 있었다. 1995년 당시 젊은 층에게 GV2 청바지 신드롬을 일으킨 해태상사 패션사업부 창립 멤버로 들어가 판매·마케팅 등 밑바닥부터 패션을 체득했다. 1997년 코오롱에서 전개하던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체루티 1881의 매장 사원으로 시작해 이내 원단 구매부터 중간관리자 그리고 브랜딩까지 마스터하며 핵심 인물이 됐다. 그녀의 실력이 소문나면서 루이비통 한국 지사에 채용됐고 남성복 슈퍼바이저로 구매와 판매 등을 책임졌다.

 

 

“디자이너가 된다는 건 패턴을 잘 뜨고, 재단만 잘 한다고 잘되는 것이 아니에요. 소비자의 심리, 마케팅 트렌드, 인테리어 감각까지 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어야지요. 체루티 1881을 통해 원단의 중요성을 깨우쳤고, 루이비통에서 마케팅과 장인 정신을 배웠어요. 그들은 수십 번의 무두질을 하며, 못 하나에도 루이비통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패션은 생명체라 현장성이 중요합니다. 어느 날 문득 본 김훈 선생님의 신문 기사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책으로 배우는 것과 체험에서 오는 통찰력은 차원이 다르다고. 바닥에서부터 살아 있는 패션을 배웠던 게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도 꽤 영향력 있는 루이비통을 거쳤습니다. 누구보다도 부와 명성, 화려함에 노출됐을 텐데요.
“해외에 출장을 가면 항상 박수와 칭찬을 받았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내 것’이라는 느낌이 안 들더군요. 음악을 예로 들자면, 서양인에게는 성악이 어울리고, 우리에게는 우리 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가 주어졌다 생각해요. 거기다 어린 시절 사랑했던 전통극에 대한 애착과 향수도 점점 깊어졌고요.”

 

“한복을 배우겠다”라는 말에 남편과 가족들이 적극 지원했다. 서울시 시도무형문화재 제11호 침선장 박광훈(현 명예보유자) 선생을 찾아갔고, 배냇저고리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취미’라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밤을 새워가며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2004년 맞춤 한복 브랜드 ‘차이 김영진’을 선보인 후 2012년엔 기성 한복인 ‘차이킴’을 내놨다. 최고급 한복을 대중적인 감각으로 좀 더 접근성 있게 가격대를 낮춘 것이 차이킴이다. 현장에서 익히고, 창의적으로 해석한 그녀의 디자인 감각은 패션계를 빠르게 매료했다. 할리우드 스타인 틸다 스윈턴, 모델 나오미 캠벨이 고객이 됐고, 2015년 1월엔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뮤지엄이 한국 대표 패션으로 차이 김영진의 한복 세 벌을 수집해 갔다. 그녀의 대표작은 고려 시대부터 무관 공복이던 철릭에서 영감을 받은 철릭 원피스다. 허리선이 촘촘히 들어간 데서 여성미를 극대화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16세기 연안 김씨와 순천 김씨 묘 출토 복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저고리 재킷이나 저고리 스타일 볼레로를 선보인다든지, 프랑스 레이스나 영국 리버티 원단을 한복에 접목하는 등 생각의 고착을 거부한다.

 

“최근 몇 년 사이 패션계를 뒤흔든 프랑스 브랜드 베트멍의 긴 소매를 보면서 한삼 저고리가 대번에 떠올랐어요. 가장 현대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의복을 찾고자 하면 한복에서 답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격조 있고 기품 있는 골계미를 품은 ‘심청가’에서 ‘지금, 우리’라는 핵심을 다시 발견하실 겁니다. 품위 있게 살아간다는 게 과연 무엇인지를.”


최보윤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패션 등 라이프스타일 분야를 전담하고 있다. 과거 공연을 담당했던 인연으로 여전히 극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요소를 사랑하고 있다.

사진 전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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