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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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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호 Vol.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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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길 걸으며 가을 마중

풀다 / 남산, 예술路 걷다

코스⑨ 삼각지역에서 국립극장까지

(삼각지역→이태원로 가을 단풍길→녹사평역→해방촌→경리단길→국립극장)

단풍길 걸으며 가을 마중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나뒹구는 계절. 한여름의 뜨거움은 가시고 하늘은 높아졌다.

단풍을 만끽하는 가을이다.






은행나무와 살랑이는 바람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번 코스는 삼각지역에서 시작해 남산 자락의 국립극장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평지와 언덕, 도심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서울의 숨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가을 단풍이 물든 이태원로부터 골목골목 개성 넘치는 해방촌과 경리단길을 지나 남산의 품으로!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는 특별한 산책이 시작된다.



단풍 터널 아래, 가을이 왔다


삼각지역 1번 출구를 나서자 이태원로가 펼쳐진다. 8차선 대로 양옆으로 빼곡하게 늘어선 가로수들이 반쯤 노란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태원로 가을 단풍길’은 삼각지역에서 녹사평역까지 이어진 계절 거리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버즘나무)가 큼지막한 잎을 드리우고 있어, 그 정취가 남다르다. 남산 주변으로 가을 단풍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길이 총 4개 있는데, 그중 한 곳이다. 이 밖에 남산 북측순환로와 소월로, 남산야외식물원에도 가을 단풍길이 있다.

전쟁기념관을 지나는 단풍길을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재미를 느끼며 걸었다. 대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제각각이다. 얇은 바람막이를 걸친 사람, 반팔 티셔츠 차림의 사람, 두꺼운 야구점퍼를 입은 사람까지. 환절기 날씨답게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조깅하는 사람들이 가볍게 스쳐 지나가고, 자전거를 타고 서울을 여행하는 외국인 일행도 눈에 띈다. 카메라를 든 여행자들은 가을 경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가을은 이렇게 서울의 일상 속으로 조용히 오고 있었다.

어느새 녹사평역 삼거리에 도착했다. 이곳부터는 풍경이 사뭇 달라진다. 비탈진 언덕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상점들이 보였다. 녹사평과 이태원 일대는 경사진 지형 때문에 소문난 맛집을 찾아가기 위해 종종 무시무시한 비탈길을 올라야 할 때도 있다. 버스나 지하철 대신 두 발로 직접 걷는 서울은 또 다른 느낌이다. 오랜 친구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느낌이랄까. ‘서울에 이런 길도 있었어?’ ‘이런 골목이!’ ‘이렇게 오래된 상점이 여기에?’ 걸으면 걸을수록 새로운 발견의 연속이다.






언덕 위 골목, 시간이 쌓인 풍경


녹사평을 지나 해방촌으로 접어들었다. 완만한 언덕길을 사뿐사뿐 걷는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개성 넘치는 식당 사이로 세월의 흔적이 묻은 오래된 가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특히 오랜 세월 동네 사람들의 입맛을 책임져 온 떡집은 변화하는 골목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하얀 떡이 포근해 보였다. 도저히 이대로 걸음을 뗄 수 없었다. 결국 꿀떡 한 팩과 식혜를 사서 근처 벤치에 앉아 먹었다. 입안 가득 달콤함이 퍼졌다.

경리단길에는 소문난 맛집이 즐비하다. 주말 브런치로 이름난 맛집과 테라스가 예쁜 음식점, 고소한 커피 맛이 일품이 카페와 이태원 바이브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라이브 바도 보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도를 보며 길을 찾고, 동네 주민들은 익숙한 듯 골목을 누빈다. 새로운 가게와 오래된 가게가 공존하는 이곳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낯설었는데, 걷다 보니 친근하고 정감 가는 골목길이다.

경사진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주한 르완다 대사관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대사관 건물이 보인다. 이국적인 건물들과 한국의 오래된 골목이 묘하게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언덕 위로 올라갈수록 그랜드하얏트 서울의 웅장한

자태가 점점 가까워진다. 앞서가던 여행객들이 뒤를 돌아본다.


“와! 여기서 보는 전망이 너무 좋은데요.”

그의 말에 나도 일행인 것처럼 뒤를 돌아봤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전경이 이색적이었다. 금방 내가 걸어 올라온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해 질 무렵의 경리단길은 또 다른 풍경을 보여 주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남산으로 가네


경리단길을 벗어나 라틴아메리카공원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남산 자락으로 접어든다. 도심의 소음이 점점 멀어지고,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킁킁-’ 어디선가 은행 냄새가 났다. 발밑에 노란 은행 열매가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은행을 밟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올여름 무더위가 얼마나 악독했는지, 지독한 은행 냄새마저 구수하게 느껴졌다.

길에는 가을 냄새가 가득했다. 몇 개의 버스 정류장을 지나쳤는지 모르겠다. 남산예술원 버스 정류장을 지날 때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걷기는 어떤 행위보다 재미있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버스를 타면 10분 남짓이면 올 거리를 한 시간 넘게 걸었지만, 그 시간 동안 본 풍경과 만난 사람들, 느낀 정취는 결코 버스 안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순간을, 도시가 세월을 쌓아 온 모습을, 사람들의 일상을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오직 걸을 때뿐이다.

조금 더 걷자 드디어 국립극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각지역에서 시작한 여정이 남산 자락에서 마무리되었다.


평지의 단풍길에서 가을을 만끽하며 시작해 언덕의 골목을 오르고 다시 남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이 코스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다양한 얼굴을 만나는 코스다. 살랑 부는 가을바람이 참으로 좋았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자 바람이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국립극장 앞에서 오늘의 가을 마중을 끝마쳤다.








글·사진. 김광명  월간 『산』 칼럼니스트
그림. 윤예지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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