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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호 Vol. 424
목차 열기필연적으로 쌓여 가는 트라우마의 잿더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관객들은 흥미진진한 관극의 끝에 질문을 하나씩 품고 공연장을 나서게 된다.

한국 연극의 주옥같은 레퍼토리 중에서도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고선웅 각색·연출, 오수경 드라마투르기)만큼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많지 않다. 이 연극은 2015년 초연 당시 월간 『한국연극』 ‘베스트7’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베스트3’에 선정되었고, 동아연극상과 대한민국연극대상에서 각각 대상·연출상·연기상 등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후에는 2019년에 국립극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보고 싶은 공연’ 1위에 올랐으며, 100회를 돌파한 지난해의 여섯 번째 시즌까지 매진 사례를 이어왔다. 11월 막을 올리는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의 목소리도 여전하다.
보편적 구조와 새로운 해석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연극은 ‘복수’를 소재로 다룬다. 원작은 중국 원나라 작가인 기군상紀君祥이 역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창작한 잡극 「조씨고아趙氏孤兒」이다. 진나라의 탐욕스러운 대장군 도안고가 권력을 독차지하고자 정적 조순과 그의 가문을 멸족시키는데, 그 와중에 부마였던 조순의 아들과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갓난아기 ‘조씨고아’가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살아남게 되며, 이 아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부모의 유언을 받들어 원수를 갚고 명예를 회복한다는 이야기다.
서사구조만 보면 동서고금의 수많은 복수극을 떠올리게 한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고선웅이 추가한 새로운 해석이다.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마지막에 전혀 다른 여운을 전한다. 멸문지화를 당한 조씨 가문의 후손이 도안고를 응징하는 비장한 모습을 강조하기보다, 거듭되는 살생의 끝에 무엇이 남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의리와 약속을 지키느라 아들과 아내를 잃고, 자신의 팔 한쪽까지 내어준 시골 의사 정영. 그는 염원하던 바를 이루지만, 또다시 예고된 잔혹한 학살 앞에서 허무의 늪에 빠진다. 경솔하게 한 가문의 구족을 멸하고 눈앞의 정영뿐 아니라 안타깝게 죽은 신하의 이름조차 계속 헷갈리는 영공의 무책임함, 그리고 “웃으세요!”라고 소리치며 복수를 자축하는 조씨고아의 무심함이 그의 씁쓸함을 부각한다.
그렇다고 이 극이 복수의 과정을 부정적으로 그리는 것은 아니다. 정영을 비롯하여 정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들의 선택과 행동이 고결하고 묵직하게 묘사된다. 여기서 복수는 개인을 넘어선 집단의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20년 공연 프로그램북에서 고선웅이 언급했듯, 정리하고 매듭짓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관련하여 “믿어지지가 않는다고 있었던 일이 없어지더냐”라는 정영의 대사는 뼈아프게 들린다. 영문학자 임철규의 말처럼, 위대한 서사물은 “망각의 바다 속에서 억울하게 누워 있는 숱한 인간들을 그 바다로부터 기억의 땅으로”* 끌어올린다. 이 연극이 변함없는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되풀이되는 가해 피해의 역사에 대한 애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필연적으로 쌓여 가는 트라우마의 잿더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관객은 흥미진진한 관극의 끝에 질문을 하나씩 품고 공연장을 나서게 된다.
상징과 여백의 깊이
두 시간 남짓의 장대한 서사가 펼쳐지는 가운데, 집중력을 흐리는 순간은 찾기 힘들다. 빠르게 읊어지는 서술적 대사와 극적으로 강조되는 장면이 절묘하게 교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사극적 진행은 연극적 약속과 놀이적 요소를 극대화하여 관객들이 함께 즐길 수 있게 만든다. 예를 들어, 정영이 공주를 만나러 갈 때는 크게 몇 걸음을 뛰고 나서 “벌써 궁 앞에 도착했구나”라고 말한다. 이어서 “고하지 않고 들어가야지”라며 중얼거린 후 공주를 바로 발견한다. 곳곳에 배치된 익살 역시 완급을 조절하는 중요한 요소다. 연극에서 희극성은 비극성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주제와도 밀도 높게 연결된다. 이때의 웃음은 부조리한 세상을 감각하고, “꼭두각시 무대에서” “한바탕 짧은 꿈”처럼 허무하게 지나가 버리는 인생을 애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연출 양식은 상징성과 여백을 강조한 시각적 요소를 통해 더욱 돋보인다. 배경이라곤 붉은 커튼뿐이고, 밖으로 통하는 문과 계단은 바닥으로 나 있다. 그러한 가운데 강렬한 인상을 주는 주요 소품들이 공중에 매달린 채 필요할 때만 내려온다. 검은 옷과 부채로 그 존재감을 알리는 ‘묵자’의 등장을 통해 인물들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빈 무대를 활용하는 방식은 중국 전통악기를 사용한 배경음악과 함께 원작을 환기하는 면도 있다. 고선웅은 이번 공연에서뿐 아니라 <홍도>(2014), <낙타상자>(2019), <퉁소소리>(2024) 등에서도 양식적 요소들을 창의적으로 활용한 바 있다. 적절한 침묵이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듯, 정제되고 단순한 미장센은 시대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10주년을 맞이하는 이번 무대에서는 고전 서사와 동시대적 감수성의 조화, 양식적 연출의 완성도, 익살을 통해 강조되는 비극성 등이 더욱 빛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 정영 역의 하성광, 도안고 역의 장두이를 비롯하여 거의 초연부터 참여한 배우들이 작품의 깊이를 더할 예정이다. 더불어 영공 역의 이호재가 보여줄 능청스러운 연기도 기대를 모은다.
* 임철규, 『그리스 비극』, 한길사, 2007, 16쪽.
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일정 2025-11-21 ~ 2025-11-30 | 시간 화·수·목·금 19:30 토·일 15:00 | 장소 해오름극장
관람권 VIP석 8만 원, R석 6만 원, S석 4만 원, A석 2만 원 | 문의 국립극단 1644-2003, 국립극장 02-2280-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