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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호 Vol. 424
목차 열기“내가 이 줄 위에서 세상을 뒤집어 볼 터이니, 두 눈 크게 뜨고 한번 지켜보시게나!”

어른 두 사람 합친 높이쯤은 돼 보이는 허공, 팽팽한 외줄 위에서 ‘어름사니’가 호기롭게 큰소리친다. 어름사니는 공중 재주가 얼음판 지치듯 위험천만해 ‘어름’에다 귀신과 사람의 중간 존재인 ‘사니’를 붙여 줄놀이 광대를 부르는 이름. 외줄 위를 걷고 뛰고 줄을 튕기며 앞뒤로 재주까지 넘는다. 본명인 이경숙(1820~1992)보다 날쌔게 줄을 잘 탄다고 붙은 별명 ‘날치’로 더 널리 알려진 ‘이날치’다. 줄 위에 선 이날치는 지금 팔도를 다니며 양반 상놈 구분 없이 웃기고 울리는 광대지만, 곧 이 무대 위에서 시련을 견디고 역경을 이겨 내어 조선 후기 8명창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당대 최고의 소리꾼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가슴 졸이고 박장대소하며 줄광대 놀이 한판을 지켜보고 난 뒤부터가 진짜 이 창극의 시작이다. 양반집 노비로 태어나 남사당패에 팔려가고 줄광대와 북 잡는 고수를 거쳐 전설적인 소리꾼이 되기까지, 사람을 사고팔던 신분사회 조선에서 모질고 가혹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갔던 이날치의 꿋꿋한 이야기에 홀딱 빠져든다. ‘이날치’라는 이름을 들으면 ‘범 내려온다’가 먼저 생각나는 사람도, 이 창극을 보고 난 뒤라면 어름사니에서 명창이 된 한 사내의 굴곡진 삶을 먼저 떠올리게 될지 모르겠다.
객석점유율 99퍼센트… 돌아온 이날치
국립창극단 <이날치傳>이 돌아온다. 모든 처음은 힘겹다. 공연, 그것도 관객층이 두껍지 않은 전통 공연이 초연부터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날치傳>은 2024년 초연 당시 객석점유율 99퍼센트를 기록하며 인기몰이를 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첫 번째 힘은 이 새로운 창극이 쉽고 흥겹다는 데 있다. 우리 창극은 지금 공연마다 매진 사례가 이어지고, 소리꾼 배우들의 퇴근길에 팬들이 줄을 서는 가장 ‘핫’한 공연 장르. 하지만 창극을 한번 경험해 보고 싶은 초심자에게 진지한 대극장 창극은 어쩐지 부담스럽다. <이날치傳>은 무대 바닥에 깔린 지름 10미터의 부드러운 노란색 원형 평판 무대부터 멍석 깔린 시골 큰집 마당으로 동네 사람들 불러 모으듯 친근하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이 태생적 한계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어려움을 이겨 내고 성취를 이루는 성공 서사라는 점도 공감도 높은 매력 포인트. 셰익스피어나 그리스비극도, 생경한 창작 스토리도 아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쉽고 간명한 이야기가 몰입도를 높인다.
종합 선물 세트처럼 펼쳐지는 화려한 전통연희는 이 창극이 지닌 또 다른 힘이다. 도입부에서 객석을 열광시키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놀음은 비보잉과 기계체조까지 접목한 ‘줄타기 아이돌’ 남창동(23세)의 솜씨. 이 창극 초연이 성공을 거둔 데엔 그의 줄타기가 큰 몫을 했다. 여기에 더해 버나돌리기(대접과 쳇바퀴 등을 막대기 위에 얹어 돌리는 것)와 상모돌리기, 재담에 탈춤, 사자춤까지 구석구석 알뜰하게 이어져 눈과 귀가 심심할 틈이 없다. 전문 공연자가 아니기에 연희 자체의 수준에는 살짝 아쉬움이 있었지만, 창극에 접목해 풍성한 무대를 꾸려 낸 시도 자체는 참신하고 또 효과적이었다. 연출을 맡은 정종임 창작하는 타루 예술감독은 초연 당시 간담회에서 “줄광대와 고수, 소리꾼으로 이리저리 떠돈 이날치의 삶 자체가 연희적 요소와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판소리를 중심으로 우리 전통예술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신명 나는 놀이판을 펼치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옛 명창 소리 눈대목을 한자리에
창극으로서 <이날치傳>의 가장 중요한 힘은 역시 판소리다. 이날치 역에 더블 캐스팅된 창극단원 이광복, 김수인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제 실력을 십분 발휘한다. 작창을 맡은 윤진철은 국가무형유산 ‘적벽가’ 예능 보유자이자 판소리 고법 이수자. 우리 판소리의 주요 눈대목을 극 속에 두루 녹였다. 특히 조선 후기 8명창 중 박만순·송우룡·김세종·박유전 등 네 명창이 소리 실력을 겨루는 통인청대사습놀이 장면은 <이날치傳>의 클라이맥스다. 성음이나 발성 등에서 옛 명창들의 고제古制 요소를 가미해 다양한 더늠(새로 만들고 다듬은 대목 혹은 특기인 대목)까지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도록 꾸몄다. ‘춘향가’의 ‘천자뒤풀이’는 김세종, ‘수궁가’ 중 ‘토끼기변’은 송우룡, ‘적벽가’ 중 ‘조자룡 활 쏘는 대목’은 박만순, ‘심청가’ 중 ‘심봉사 눈뜨는 대목’은 박유전의 더늠으로 각각 감상할 수 있다. 마치 요즘 TV 예능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랩이나 가창력 배틀처럼 기존 창극과 다른 새로운 결을 만들어 낸 것이다. 창극 <패왕별희> 등에 참여했던 작곡가 손다혜는 국악기뿐 아니라 신시사이저와 어쿠스틱 기타 등 서양 악기도 조화롭게 활용해 풍성한 사운드를 빚어냈다.
남은 기록이 많지 않은 역사 속 인물을 무대 위에 되살리면서, 사료에 기초하되 상상력을 풍부하게 가미하는 팩션fact+fiction으로 각색하는 전략도 주효했다. 이날치는 놀이판에서 양반에게 술잔을 받는 소리광대를 보며 오직 제 소리의 힘으로 나귀 타고 다니며 대접받는 소리꾼이 되기를 꿈꾼다. 성질 고약한 박만순 명창의 고수로 들어가 고생하며 참고 또 참다가 박차고 나오고, 무등산에 들어가 산공부로 독공을 하다 통인청대사습놀이에서 인생의 스승 박유전 명창을 만나는 이야기의 흐름도 자연스럽다. 우리 소리와 창극에 익숙지 않은 관객도 공연 시간 150분을 유쾌하게 즐길 수 있게 하는 힘은 이런 기본기에서 나온다.
윤석미 작가는 초연 당시 간담회에서 “동서양이 비슷한 시기에 신분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현상에 주목했다. 이 시기 국악에선 판소리가 나오고, 서양에선 오페라가 등장했다”면서 “그런 시대 분위기를 반영해 머슴으로 태어난 이날치가 신분을 바꾸기 위해 소리꾼이 되고자 한다는 설정을 부여했다”고 했다. 이날치 역 소리꾼 배우 김수인도 “이날치 명창의 시대를 그대로 옮기면 사극이 되겠지만, 지금을 사는 이날치를 연기하면 현실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 시기가 배경이지만 현대적 문물이 시대를 넘어 장난스럽게 충돌하는 재미도 있다. 이날치의 조력자이자 의형제인 ‘개다리’ 역은 최용석, ‘어릿광대’는 서정금, 이날치를 사랑한 ‘유연이’는 신입 단원 이나경이 맡았다.
국립창극단 <이날치傳>
일정 2025-11-21 ~ 2025-11-29 | 시간 화·수·목·금 19:30 토·일 15:00 | 장소 달오름극장
관람권 R석 5만 원, S석 3만5천 원, A석 2만 원 | 문의 02-2280-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