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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호 Vol. 424
목차 열기AI라는 최첨단이든, 옷이라는 추상이든, 죽음이라는 묵직한 주제든 각각의 시각과 상상에서 출발해
각자의 경험을 투영하고 움직임을 구성해 만든 세 작품을 관통하는 건 ‘삶’이다.

안무가 박수윤, 정소연, 이지현
정소연 안무 <너머>
정소연은 ‘넥스트 스텝’에서 <싱커페이션>(2018)을 창작하고, <2022 무용극 호동>에 공동안무자로 참여하면서 안무 실력을 다양하게 선보여 왔다. 신작 <너머>는 인공지능AI과 인간의 소통이, 두려움이 아니라 또 다른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상상에서 시작됐다. “새 작품을 구상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가야 할 게 무엇일까,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라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가장 전통적인 것과 가장 혁신적인 것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였다고 했다. 어쩌면 단순한 호기심으로 가장 ‘핫’한 이슈인 AI를 잡았다.
여러 강연을 듣고 책을 읽었다. 이제는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가 실험에 성공했고, 머지않아 기계와 인간이 결합하는 것까지 전망하는 시대에 예술가의 역할도 고민했다. 구상은 ‘AI와 함께 살아가는 미래는 위기가 아니라 위로일 수 있다’에서 시작됐다.
“춤이라는 아날로그의 도구를 디지털 혁신과 결합해 최대한 표현해 보고자 한다”는 그는 ‘맺음’과 ‘품’이라는 한국무용의 기본 움직임으로 공간을 채우고, 레이저를 활용해 디지털 무대를 구현할 계획이다. 낯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은 재즈적 리듬과 전통 음색이 교차하는 사운드로 표출한다.
음악은 한국음악가 박천지 음악감독과 강은영 작곡가가 맡았다.
이지현 안무 <옷>
이지현은 2019년 크리틱스 초이스 댄스 페스티벌(이하 크리틱스 초이스)에서 최우수 안무가(<닮은 닳은 인간>)에 선정됐고, 2022년 프랑스 몽플리에 코레디시 축제에 초청돼 <Alike and Run down>을 선보였다. 그해 제36회 한국무용제전에서 <조화25>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안무가로서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고 있다.
신작 <옷>에서는 인간과 공간, 개인과 사회 등 다층적인 메시지를 건넨다. ‘옷’이라는 글자 형상이 사람의 형태와 비슷하다고 느낀, 단순한 감각에서 비롯됐다. “갖고 싶은 것, 갈망하면서도 쉽게 싫증을 내기도 하고, 과시하고 싶은 욕망 같은 여러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옷이라는 1차적 해석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해석을 진전시켜 교사다운 옷, 안무가다운 옷 같은 정체성을 드러내는 옷으로 옮겨 갔다”는 그는 “원하는 옷과 원하지 않는 옷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바람에 계속 쌓이고, 그러다 서랍과 장롱에 쌓이고 삐져나오고 토해 내는 모습이 마치 뭔지 모르는데도 마음속에 욱여넣고 결국엔 폭발시키는 인간 감정과도 닮았다고 생각했다”고 부연했다.
‘옷’이라는 단어의 파생 능력은 놀랍다. 옷이 걸린 옷걸이를 뒤집었더니 미끼의 한 형태가 보이고, 이 미끼를 잡기 위한 사람들의 모습이 오히려 물고기처럼 보이는 장면으로 확장한다. 오브제 활용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 이지현은 “‘옷’이라는 글자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포인트”라면서 “무용수들이 만들 수도 있고, 어떤 형태로 나올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옷’ 형태가 어떤 의미로 바뀌는지 보면서 관객들이 그 나름의 해석을 더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박수윤 안무 <죽 페스>
박수윤은 전작 <길티( )풀>로 올해 크리틱스 초이스에서 최우수 안무가로 선정됐고, 앞서 2023년에는 <설령 향기롭다 할지라도 나는…>으로 크리틱스 초이스 프론티어로 뽑혔다. 많은 관객이 그의 작품(특히 <길티( )풀>)을 보고 화려한 색감의 의상과 현란한 동작으로 숨을 몰아쉬고 흥이 폭발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예쁜 자극에 희열을 느낀다”라며 웃었다. 옆에 있던 이지현 안무가는 “내용이나 감정으로 주는 자극이 아니라 색채감과 움직임으로 시각적 자극이 훅 들어오면서 도파민이 삭 도는 느낌”이라고 덧댔다.
“그동안 보는 사람이 숨이 헉 막혔다가 마지막에 숨을 내쉬는 몰아침을 목표로 작품을 만들었던 것 같다”는 박수윤 안무가는 그러나 “이번 <죽 페스>에서는 다른 시도를 해 보려고 한다”면서 ‘비움’과 ‘감성’을 강조했다. ‘죽음 페스티벌’을 줄여 붙인 제목에서 예상되듯 그는 벼랑 끝에 몰렸던 감성, 호흡, 소리, 그때의 공기를 휘파람 또는 종소리 등 다양한 감각으로 작품을 구상 중이다.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던 경험이었어요. 그동안 떠올리지도 못했는데 이 작품을 만들어가며 그 시간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찬찬히 되짚어 보니 그 시간이 나를 돌아보는 과정이기도 했더라고요.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시간, 또 누군가에게는 다시 살아갈 원동력을 주기도 하는 시간, 그런 시간으로 작품이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좌측부터 정소연 | 이지현 | 박수윤
세 작품에는 국립무용단의 청년 교육 단원들과 선발 절차를 거쳐 뽑힌 객원 무용수들이 출연한다. 장르를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한국무용을 전공한 무용수가 대다수다. 안무가에게는 호흡을 맞춰 본 적이 없는 무용수들과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무용수들에게는 현대무용을 접하는 것이 서로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다.
“하체를 많이 사용해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을 갖는 게 한국적 움직임이라면 현대무용은 그야말로 온몸을 사용하잖아요. 게다가 한국무용 공연에선 목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데 제 작품에선 단어를 반복해 말하고 소리를 내지르니 어색해하기도 하더라고요.” (이지현 안무가)
“이번 작품에선 늘 제가 해 오던 방식을 벗어나서 많이 비우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채우고 있나 봐요. 그럴 때마다 우리 무용수들이 ‘안무가님 안 돼요.’ ‘멈추세요.’라고 말해 주어서 변화를 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박수윤 안무가)
AI라는 최첨단이든, 옷이라는 추상이든, 죽음이라는 묵직한 주제든 각각의 시각과 상상에서 출발해 각자의 경험을 투영하고 움직임을 구성해 만든 세 작품을 관통하는 건 ‘삶’이다.
작품 후반부쯤 무대 위에 상像을 반사하는 판을 올릴 계획이라는 박수윤은 “거울은 무용수들을 향해 있지만, 관객을 비출 수도 있다. 감정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던 때를 돌아보며 만든 작품이라 나 또는 우리는, 관객들이 자신의 삶을 떠올리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이지현도 “‘옷’이라는 건 누구나 갖고 있는 일상의 소품”이라면서 “공감하거나 발견하거나,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는 시간이길 바란다”고 했다.
“AI와의 관계를 이야기하지만 결국엔 인간다운 삶이 무엇일까, 떠올리게 하는 작품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숨을 쉬는 것도, 소름 돋는 것도, 어떤 감정을 느낀다는 건 생명체만이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정소연 안무가)
안무 역량을 실험하고 시도할 판을 깔아 주는 ‘안무가 프로젝트’는 세 안무가에게 든든한 ‘비빌 언덕’이다. 세 안무가도 “실패에 대한 타격이 작지 않기 때문에 선뜻 시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안무가 육성 프로그램은 자유롭게 구상하고 도전하게끔 만드는 동력이 된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무용의 본질을 유지하되 색다른 해석과 창작 능력을 발현시키며 국립무용단이 어떤 레퍼토리를 품게 될지 지켜보는 것이 이번 ‘안무가 프로젝트’의 관전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국립무용단 <2025 안무가 프로젝트>
일정 2025-11-06 ~ 2025-11-09 | 시간 목·금 19:30 토·일 15:00 | 장소 달오름극장 | 관람권 R석 4만 원, S석 3만 원 | 문의 02-2280-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