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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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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호 Vol.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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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에서 헌트릭스까지, 가상의 계보학

맺다 / 괴짜의 역사를 찾아서

버추얼 그룹의 탄생

아담에서 헌트릭스까지, 가상의 계보학


‘빨래를 빨래터에서 인간이 하던 시절도 있었지’처럼
‘인간이 직접 노래하고 춤추던 시절도 있었지’ 하게 될 시대는 생각보다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의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화면 속 캐릭터로만 구현된 일종의 가상 그룹이 실제 가수들을 꺾는 파죽지세로 빌보드 차트, UK(영국) 차트, 국내 차트를 막론하고 점령했다.
가상 가수. 사이버 가수. 버추얼 가수…. 이 대목에서 혹시 ‘아담’이란 두 글자를 떠올렸다면? 여러분, 의문의 1패다. 설마 ‘류시아’까지 떠올랐다면…? 2패다. 농담이다. 버추얼 가수의 계보를 훑다 보면 농담처럼 진담인 듯 아담과 류시아의 이야기를 건네야만 한다. 그 시대를 직접 피부로 느끼며 살아 냈다는 것은 이 이야기에서 최소 조연은 된다는 이야기이므로, 당신이 이겼다.




(좌)<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 (우)사자 보이즈(Sajaboys)



아담. 1998년 1월 23일 데뷔. 데뷔곡 제목 ‘세상엔 없는 사랑’. 데뷔 앨범 제목 ‘Genesis(창세기)’. 국내 사이버 가수 제1호인 아담의 시작은 이렇듯 창대했다. 1996년 설립된 정보기술 기업 아담소프트가 제작했다. 하지만 그의 세계관에는 벤처기업이 없다. 출생지는 에덴EDEN. 혈액형은 O형, 키 178㎝, 몸무게 68㎏에 원빈 닮은 외모를 지녔다. 노래 외에 특기는 기타 연주다. 믿기 어렵지만 실제로 그의 데뷔 앨범은 무려 20만 장이나 팔렸다. 지금으로 치면 거의 빌보드 200에 오를 만한 판매량이다. 1999년 2집 「Exodus」까지 냈고, 지상파 음악 방송은 물론이고 어린이 프로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뉴 밀레니엄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의 사망(?)을 둘러싼 여러 가지 설說은 PC통신 시절 누리꾼들의 ‘꿀잼’ 대화 주제였다. 첫째로 밀레니엄 버그설이 있었다. 당시 1XXX로 설정돼 있던 전 세계 컴퓨터의 설정이 2000년 도래와 함께 2XXX로 바뀌면서 일어날 대대적인 버그에 대해 인류 차원의 경고가 실제로 횡행했다. 둘째는 바이러스 감염설이다. 1990년대에 세계를 떠돌았던 디지털 팬데믹, 즉 예루살렘 바이러스나 트로이 목마 바이러스를 비롯한 다양한 바이러스에 아담소프트의 컴퓨터 운영체제가 감염됐고, 그로 인해 아담이 장렬히 사망하게 됐다는 설이다.
정확한 이야기는 아마 아담소프트 직원들만 알 것이다. 그러나 정설에 가깝게 통용되는 이야기는 있다. 채산성 문제다. 당시로서는 아담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하고 간단한 움직임을 보이는 3D 그래픽 영상을 단 몇 초짜리로 제작하는 데만도 천문학적 제작비가 들어갔다는 것이다. 아담의 CD가 200만 장씩 팔리지 않는 한 수익은커녕 제작비 회수도 어려웠다는 이야기. 아담은 지상파나 케이블 채널에 미리 만들어진 영상을 납품하는 것 말고는 활동 방식도 없었다. 콘서트를 하거나 행사를 뛸 수도 없으니 부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쨌든 아담의 단기적 성공은 여성판 아담이라 할 수 있는 류시아의 데뷔도 낳았다. 류시아는 한자로 버들 류柳, 처음 시始, 싹 아芽를 쓴다. 영문으로는 ‘Lusia’인데 루시퍼와 메시아의 합성어로 알려져 있다. 선과 악을 한 몸에 지녔다는 의미다. 1998년 1집 타이틀곡은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 이듬해 2집 타이틀곡은 ‘천년의 사랑’. 이쯤 되면 이수만 전 SM엔터테인먼트 창립자도 울고 갈 세계관이다. 우리의 찬란한 K-팝 세계관은 얼마간 아담과 류시아 같은 세기말 사이버 가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좌)<앨빈과 얼룩 다람쥐들(Alvin and the Chipmunks)>, (우)버추얼 가수 하쓰네 미쿠



가상 캐릭터 가수의 시원은 어디일까. 대중문화의 선발 주자 미국을 보면 나온다. 1920, 30년대 <베티 붑Betty Boop> 애니메이션을 보면 부엉이 가수가 열심히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전히 티셔츠 디자인으로 사랑받는 베티 붑이란 캐릭터 이름 자체가 ‘붑-웁-어-두’ 같은 재즈 스캣Scat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엉이 가수에 대해서는, 희극인이자 뛰어난 가수였던 스타 엔터테이너 캐브 캘러웨이가 목소리 연기와 가창을 맡았다.
1950년대에는 <앨빈과 얼룩 다람쥐들Alvin and the Chipmunks>이 있다. 귀여운 다람쥐들의 한껏 들뜬 목소리는 녹음테이프를 빨리 돌리는 기법으로 만들어 냈다. 이후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여러 차례 리메이크돼 인기를 끌면서 저 ‘다람쥐 목소리’는 팝 음악계에서 모든 스페드 업Sped-up 보컬을 일컫는 세칭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이후에도 다양한 애니메이션 속 가수, 밴드, 중창단이 어린이는 물론이고 어른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아담과 류시아 이후, 21세기는 버추얼 가수의 기술적·상업적 성장이 폭발적으로 이뤄진 시대다. 2007년 일본에서 선보인 하쓰네 미쿠는 음성 신시사이저 시스템인 ‘보컬로이드’를 활용한 본격 버추얼 가수로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 가상 캐릭터는 물론이고 음성까지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 냈으며, 홀로그램 콘서트를 통해 글로벌 팬덤까지 이끈 것이다. 한편, 오아시스와 함께 브릿팝 시대를 리드했던 영국 밴드 ‘블러’의 리더인 데이먼 앨번은 2001년 ‘고릴라즈’라는 혁신적 버추얼 밴드를 세상에 내놓는다. 앨번이 유명 만화가 제이미 휼렛과 의기투합해 만들어 낸 만화적 밴드. 휼렛은 한때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실제 인물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던 아티스트다.
게임과 가상 가수의 결합은 새로운 물결도 낳았다. 2018년, 세계적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에 등장한 버추얼 K-팝그룹 ‘K/DA’다. 이들의 데뷔곡 ‘POP/STARS’의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서 4억 회 이상의 조회수를 올리며 선풍을 일으켰다. 실제 한국 걸그룹인 ‘아이들’의 소연과 미연이 멤버 뒤 멤버 역할을 맡아 가창을 소화했고, ‘리그 오브 레전드’ 오프라인 이벤트 무대에 실제로 출연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헌트릭스보다도 무려 7년 전에 이미 사이버 세계를 먼저 제패한 가상 걸그룹인 셈이다.




(좌)버추얼 K-팝 그룹 ‘K/DA’, (우)버추얼 인플루언서 로지(Rozy) (출처:인스타그램)



근 몇 년 새 급성장한 버추얼 그룹 ‘플레이브’, ‘이세계아이돌’의 기세는 대단하다. 고척스카이돔, 케이스포돔 같은 대한민국 대표 거대 공연장 무대에 선 이들은 20세기 대중문화가 일군 캐릭터 산업과 K-팝 팬덤 문화가 결합했을 때 어느 정도의 폭발력을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최근 JYP엔터테인먼트는 AI 아티스트 개발을 선언하고 관련 인력에 대한 공개 채용을 시작했다. AI와 만난 가상 캐릭터 가수는 컴퓨터그래픽, 보컬로이드, 멤버 뒤 인간 본체 등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젖힐 것이다. 그리하여 근미래에 우리에겐 ‘인간 가수 vs. 가상 가수’의 라그나뢰크(북유럽 신화 속 종말 전쟁)는 닥쳐오리니, ‘빨래를 빨래터에서 인간이 하던 시절도 있었지’처럼 ‘인간이 직접 노래하고 춤추던 시절도 있었지’ 하게 될 시대는 생각보다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시대를 기다리며 우리는 과연 바로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글. 임희윤 기자·평론가. 국악·대중음악·클래식·영화 음악을 두루 다룬다.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한국힙합어워즈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몸속에 꿈틀대는 바이킹과 도깨비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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