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확인방법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단체 바로가기
전체메뉴 열기
퀵메뉴

계간 국립극장

  • 소식 · 참여
  • 계간 국립극장

2025년 10월호 Vol. 423

목차 열기

국립국악관현악단 서희선

맺다 / 예술가의 초상

국립국악관현악단 서희선


정말 어려운 건 연주를 하는 일이 아니라,
연주하지 않고 버티는 일이다.






가야금 연주자 서희선은 그렇게 열렬히 애정하는 국립국악관현악단 무대 위에 서는 대신, 무대 밖 삶에서 어쩔 수 없이 견디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칠삭둥이로 얼굴이 일부 함몰된 채 태어난 그는 성인이 된 뒤에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뼈가 단단해지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스물다섯 살에 국립국악관현악단에 입단한 뒤에도 그래서 수술을 병행해야 했다.

무더위가 조금씩 가시기 시작한 8월 말, 국립극장에서 만난 서희선은 19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단원으로 입단한 뒤 보낸 시절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병원을 다니느라 스물다섯 시절을 많이 즐기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서희선은 관현악단 스케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짬을 내 틈틈이 치료를 받았다. 전신 마취를 해야 하는 큰 수술이 거듭돼 무섭기도 했지만 “살아야 되니까요. 직장도 잘 다녀야 하니까”라는 마음이 더 컸다.
“너무 좋아서 시작한 가야금 연주인데… 이걸 그만두면 전 다른 재주도 없기도 해서 살아갈 방법이 없었어요.”
관현악단 동료, 선후배들에 대한 고마움이 항상 먼저다.
“‘함께 가자’고 얘기해 준 친구들이 있어서 용기를 얻었죠. 주변 분들이 없었으면, 견디지 못했을 것 같아요. 제가 연습할 시간도 부족하니, 연주 자세를 봐주기도 했습니다.”

서희선이 가야금을 처음 만난 건 우연이었으나, 그건 운명이 됐다. 안면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친구가 없던 그에게 선생님이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당시 스승이 아이가 집중할 수 있고 빠져들 수 있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땐 악보를 읽을 줄 알면, 실기 없이 음악 이론 필기시험 결과에 따라 해당 예술학교 진학이 가능했다. 그렇게 학교에 합격한 이후 대망의 오리엔테이션 자리.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한 축하 연주를 열었는데, 가야금을 목도한 서희선 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이전까지 들어 본 적 없는 소리였어요. 더구나 가야금를 연주하는 선배 언니가 너무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있어서 단숨에 매료됐죠. 당시 다른 악기들은 기억도 안 나요. 하하.”






가야금을 한 음, 한 음 뜯을 때의 울림이 서희선의 마음을 한 올, 한 올 울렸다. 다친 마음이 치유됐다. 가야금 연주 실력이 늘면서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붙었다.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서희선은 또래에 비해 늦게 가야금을 시작했지만, 고등학교 3년 내내 가야금에 매진한 덕분에 1년을 재수하고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에 입학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레슨은 꿈꿀 수 없었고, 학교 선생님의 지도에 의지해 시험을 치렀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혼자서만 공부하다, 다른 악기와 관현악을 하는 재미를 붙였다. 은사인 박범훈 전 중앙대학교 총장이 창단한 서울중앙국악관현악단에 몸담으면서는 아시아 오케스트라를 비롯하여 ‘마당놀이’, 불교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관현악의 세계를 경험했다.

그러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소식을 접했다. 바로 시험을 치렀고, 본인 말대로라면 “운이 좋게” 붙었다. 대학교 재학 시절에도 안면 수술을 받았지만, 완치는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을 받아 준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선 마음껏 연주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프로 단체니까 외부로 보여 줘야 할 순간이 많았고, 군데군데서 자신에 대한 맥락 없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 가운데엔 비수 같은 말도 있었다. 무엇보다 국가의 얼굴인 국립단체에 자신이 누가 될까 우려가 컸다. 하지만 관현악단 퇴단은 자신의 인생 포기와 동의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버텼어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다르잖아요. ‘내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자. 그러면 인정을 해주겠지’ 하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보이는 것 때문에 위축되지 말자’는 결심도 했습니다.”

동시에 치료도 열심히 받았다. 몇 번의 수술 끝에 다른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완치 상태에 이르렀다. 수술 후유증은 남았다. 얼굴 수술로 인해 입을 여닫는 것이 다소 불편해져, 오래 앉아서 악기 연주를 해야 할 때 호흡이 가빠졌다. 수술로 인해 체력도 약해졌는데, 이미 몸에 피로가 누적된 상태라 따로 운동해서 근력을 키우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자기만의 문제라고 생각해 내색하지 않았다. 동료, 선후배들은 그런 서희선을 모른 척해 주거나 알게 모르게 배려하며 직간접적으로 도왔다.

물리적 고통이나 아픔을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느냐는 물음은 자칫 폭력적일 수 있다. 하지만 서희선은 이렇게 답한다.
“공공극장에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어요. 소규모 실내악 공연을 했는데, 각자 방에서만 힘들게 생활하던 분들이 거실로 나와서 음악에 귀를 기울이시는 거예요. 걷지 못하는 분이 있었고, 눈이 잘 안 보이는 분도 있었고, 얼굴이 함몰된 분도 있었죠. 근데 연주를 듣고 표정이 환해지시더라고요. 저도 어려움을 버티고 이겨 내면서 이분들 앞에서 연주하게 됐다고 생각하니까, 음악으로 더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후 아마추어 강습, 외국인 강습 등 제가 할 수 있는 일, 제게 주어진 일이라면 더 노력하게 됐죠.”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낀 서희선은 그간 망설이던 협연에도 용기를 냈다. 2019년 5월 당시 국립국악관현악단이 가정의 달을 맞아 ‘엄마’를 주제로 하는 국악 브런치 콘서트 <정오의 음악회>를 선보였는데, 당시 협연자로 나서 ‘25현 가야금 협주곡 뱃노래’를 연주했다.
이 곡은 도입 부분에 조용히 바다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음영陰影으로 진행된다. 굿거리·자진모리 장단이 변주되면서 진행되고, 카덴차(독창자나 독주가가 연주하는, 기교적이며 화려한 부분)에선 소리만으로 물결치는 광경을 구현하는 서희선의 기교가 이어졌다. 순간 뱃사공이 뱃노래를 부르면서 바다로 나아가는 장면이 그려졌다. 방 안에만 갇혀 시야가 좁던 서희선이 가야금이라는 배를 타고 세상에 나온 것처럼.
“어릴 때 제 유일한 친구가 엄마였어요. 절 많이 보듬어 주셨고 항상 챙겨 주셨죠. 바다 같은 엄마의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 곡을 연주할 때 부모님이 객석에 앉아 계셨어요. ‘제가 이렇게 잘 컸습니다’ ‘이렇게 멋있게 있습니다’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이처럼 서희선이 정체성을 형성하게 해준 곳이다. 멋모르고 가야금을 시작한 그는 이곳에 입단하면서 배려심이 생겼고, 다른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명확히 알게 됐다고 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 또 생각하고 싶은 게 뭔지를 깨닫게 해줬어요. 이전까지는 그런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살았거든요. 동료, 선후배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죠. 너무나 고마운 곳입니다.”



글. 이재훈 『뉴시스』 문화부 기자
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