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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호 Vol. 419
목차 열기코스④ 남산도서관에서 충무로역까지
(남산도서관→소생물권 서식지→국립극장 해오름극장→충무로역)
사색과 생명, 예술을 잇는 초여름의 길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서 시작해 작은 생명의 숨결과 예술의 장場 국립극장을 지나 다시금 도심에 닿는 길.
초여름의 녹음이 우거진 남산 위, 느리게 걷는 걸음마다 사색과 감성이 스며든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잠시 도시의 소음을 잊고 자연과 예술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남산도서관의 주말 아침 풍경
예상과 달리 남산도서관의 주말 아침은 고요하지만은 않다. 책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사색에 잠긴 이들, 싱그러운 아침 공기를 가르며 산책하는 이들, 계절의 변화를 담쟁이넝쿨 앞에서 기록하는 이들이 모여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오래된 도서관 건물을 감싸 안은 담쟁이는 하루가 다르게 초록빛을 더해 가고, 잔디밭 너머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도심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이곳은 마치 시간을 붙잡아 느리게 가게 하는 마법을 부리는 듯하다.
도서관 앞 계단을 내려서면,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 동상이 묵묵히 서 있다. 도서관의 오랜 문지기처럼 그 길을 오르내리는 사람을 말없이 내려다본다. 책 속의 지혜가 현실의 길목에서 길을 묻는 듯, 그들의 시선은 길 위의 우리에게 향해 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마음속으로 짧은 물음을 던져 본다. ‘나는 어떤 길을 가고 싶은가?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계단을 내려와 왼쪽으로 돌자 ‘남산공원 1번 입구’가 보인다. 문득 ‘남산에는 얼마나 많은 길이 숨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안내판을 살펴보니, 회현역·명동역·동국대·이태원·삼각지 등 서울 곳곳에서 시작되는 길의 15개 입구가 거미줄처럼 남산을 가로지르고 있다. 어느 길을 택하든 남산에 닿을 수 있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이라면 더없이 로맨틱했을 이 벚꽃길. 지금은 화려함이 지나간 자리에 생명의 푸른 기운이 가득하다. 벚꽃의 아련한 기억 위로 짙어진 녹음은 오히려 다시 걷고 싶은 마음을 부추긴다. 입구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문門이다. 조심스럽게 남산으로 들어선다.


작은 생명들의 속삭임, 소생물권 서식지
벚꽃이 지고 없는 벚꽃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다 좁은 오솔길로 접어들면 풍경이 사뭇 달라진다. 이곳은 잘 가꿔진 공원을 넘어, 도시가 애써 지켜 낸 마지막 야생의 조각이자 하나의 온전한 공간임을 직감하게 된다. 사람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사는 여러 생명의 존재감이 고요하게 드러나는 곳. 그 주인공은 크고 화려한 동식물이 아닌, 작고 연약하기에 더욱 소중한 존재들이다.
‘소생물권 서식지’, 이름마저 조심스러운 이곳은 화려함 대신 작고 여린 생명들이 주인공인 무대다. 이곳은 도심 속에서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이동할 수 있게 만든 장소로, 북방산개구리와 반딧불이, 도롱뇽 등이 살고 있다. 발걸음을 늦추고 물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맑고 투명한 젤리처럼 뭉쳐진 도롱뇽 알 주머니를 발견할 수 있다. 곧 깨어날 작은 생명이 깃든 그곳은 마치 우주를 품은 듯 신비롭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풀잎 하나조차 섬세하고 더없이 고요하게 느껴진다. 도심 한가운데에 이토록 연약한 생명의 요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 아래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 쉬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한다.
여름밤이 깊어지면, 이곳은 반딧불이의 비밀스러운 세상이 된다. 한때 도시의 불빛에 밀려 자취를 감췄던 그 작은 빛들이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다림과 보살핌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사람의 간섭을 줄이고, 빛 공해를 막고, 물과 흙의 건강한 균형을 되찾으려 애쓴 시간의 흔적이 이곳 공기 속에 배어 있다. 이 길을 걷는 것은 단순히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자연의 경이로운 시간을 함께 느끼는 일이다.
발걸음은 저절로 조심스러워지고 말소리도 소곤거리게 된다. 대신 눈과 귀는 더욱 활짝 열린다. 처음에는 괴이한 모습에 흠칫 놀랐지만 어느새 ‘혹시 꿈틀거리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가만히 들여다본다. ‘소생물’이라 불리는 이 작은 생명들이 도시 한복판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생명 하나하나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이 길 위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을, 나아가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오늘의 산책을 마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갈 때,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마음은 조금 더 차분해진 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립극장을 지나 도심 한가운데로
어느새 길은 다시 넓어져 남산의 성곽길과 만난다. 간밤에 내린 비 덕분에 흙냄새가 더욱 짙게 배어 있다. 저 멀리 서울 도심의 빌딩 숲이 정갈한 실루엣으로 펼쳐진다. 오래된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조선의 시간과 21세기 서울의 시간이 중첩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마치 오래된 리듬에 발을 맞추듯, 사람들은 자연스레 말수를 줄이고 고요한 사색에 잠겨 든다.
성곽길 끝자락에서 익숙하고도 반가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남산 자락에 위엄 있게 자리 잡은 국립극장이다. 수많은 이야기와 음악, 춤과 노래가 뜨겁게 피어나는 저 무대처럼, 남산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무대를 품고 우리를 기다린다. 극장 옆을 스쳐 지나는 이 짧은 순간, 숲의 고요함과 무대 위 열정이 묘하게 교차하는 듯하다.
국립극장을 뒤로하고 충무로역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은 부드럽고 완만하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초여름 햇살이 춤추듯 발등 위로 내려앉는다. 숲에서 묻혀 온 흙 내음과 싱그러운 풀 향기가 아직 옷깃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도시의 소음이 조금씩 다시 가까워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급해지지 않는다. 남산에서 보낸 느린 시간의 여운이 발걸음마다 남아 있기 때문일까. 책과 자연, 그리고 예술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충무로역 입구가 시야에 들어오면서 자동차 경적, 현란한 간판 불빛,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신호등이 익숙한 현실을 환기시킨다. 도시는 여전히 숨 가쁘게 돌아가겠지만, 그 안에서 나만의 속도로 다시 걸어갈 수 있다는 작은 확신. 결국 남산을 걷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