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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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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호 Vol.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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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고 싶은 순간, ‘한 번 더!’

맺다 / 괴짜의 역사를 찾아서

앙코르의 탄생

머물고 싶은 순간, ‘한 번 더!’

앙코르는 관객을 위한 것인가, 가수를 위한 것인가, 작품을 위한 것인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안 돼요. 끝나 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

모두가 그렇게 바라고 있다 해도

더 이상 날 비참하게 하지 말아요.

- 브로콜리너마저 ‘앵콜요청금지’ 중


10년도 더 된 얘기인 것 같다. 어느 여름날 화창한 낮, 야외 록 페스티벌 무대에 밴드 브로콜리너마저가 나왔다. 대표곡이 차례차례 연주될수록 객석의 열기는 더해 갔다. 아마추어처럼 풋풋했지만, 태도만은 열정적인 밴드의 모습에 관객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 갔다. 그리고 마지막 곡. 어느새 스테이지 앞부터 저 끝까지를 가득 메운 관객들은 “앵콜!” “앵콜!” “앵콜!”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아직 브로콜리너마저 최고의 히트곡 ‘앵콜요청금지’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밴드는 끝내 나오지 않았고, 저 위에 있는 가사는 관객들끼리 제창하다 제풀에 지쳐 결국 풀 죽은 모습으로 무대 앞에서 흩어졌다.

앵콜, 즉 앙코르는 연장된 환상이요, 환희의 자각몽이다. 라디오헤드에게 ‘Creep’을, 오아시스에게 ‘Don’t Look Back in Anger’를 원하는 게 그리 가혹한 일인가? 한두 시간 분위기를 달궈 놓고선 무대 뒤로 휙 사라진 이들을 애타게 찾는 구호, ‘앙코르!’ 이것은 피겨 링크 위로 쏟아지는 폭포 같은 헌화이자, 몇 걸음 돌아서다 끝내 다시 서로의 품에 안기는 연인들의 밤 인사이며, 어둑한 꿈의 무대를 등지고 현실의 양달로 나서기 못내 아쉬운 이들의 뜨거운 아우성인 것이다.

앙코르Encore는 프랑스어로 ‘다시Again’ 또는 ‘한 번 더’에 해당하는 단어다. 공연장에서 ‘한 번 더!’ 전통이 생겨난 것은 18세기 무렵이다. 음악 공연이 교회나 궁정의 전유물이 더는 아니게 된 시기, 공공 음악회 즉 근대적 의미의 콘서트가 생겨난 때다.(그전의 ‘앙코르!’는 설사 존재했더라도 관객의 청원보다는 윗분의 지시나 명령에 가까웠으리라….)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The Marriage of Figaro)> 초연 포스터, 1786



앙코르 태동기의 최고 명장면은 1786년 오스트리아 빈의 부르그테아터Burgtheater에서 열린 한 오페라의 초연이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다. ‘앙코르’가 쇄도한 나머지 공연 시간은 당초 기획한 것의 두 배가 돼 버렸다. 급기야 초연 며칠 뒤 국왕이 직접 나서 앙코르 횟수를 제한하는 제한령까지 내리게 된다. 16세기 맥주 순수령 이후에 가장 눈물 나는 ‘령’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 당시 관객들의 ‘앙코르’는 16세기 바이에른 맥주만큼이나 순수하고 뜨거웠다. 왜일까. 당시만 해도 음악은 재생再生·play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멜론도, CD플레이어도, 축음기도 없잖았나. 그럴 기기機器가 없잖았나. 평생에 콘서트에 갈 기회도 손에 꼽을 정도였을 관객들은 그 자리에서 당장 ‘다시’ 들려 달라고 생떼를 쓰거나 시위를 벌일 수밖에….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는 앙코르의 극성기였다. 프란츠 리스트처럼 무대매너와 연출에 신경 쓰는 아이돌형 연주자는 앙코르도 정밀히 세공해 관객들의 애간장을 태워 버렸고, 오페라마다 디바들의 비르투오소적 아리아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울려 퍼지게 마련이었다. 아티스트는 빠른 손놀림이나 높은 음역대를 자랑할 과시용 앙코르, 본공연 레퍼토리의 메인 테마를 가져와 재기를 뽐내는 즉흥 변주곡을 면밀하게 따로 준비하기도 했다. 작품만큼이나 ‘솔로이스트’가 주목받는 K-팝, 아니 ‘C(클래식)-아이돌’의 시대였다.

그러나 앙코르가 늘 풍년인 것은 아니었다. 객석의 애타는 요구는 자주 묵살되다 못해 금지도 됐다. 주체는 왕뿐 아니다. 1898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은 앙코르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정명훈 지휘자를 차기 음악감독으로 지목해 최근 화제인 바로 그 유서 깊은 라 스칼라 말이다. 이 금지령은, 당시 지휘자이자 음악감독이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침이었다. 오페라 전체의 완성도에 집중해야지, 가창자 개개인의 기량이나 인기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굳은 철학 때문이었다. 작곡가 중에도 ‘대쪽’이 몇몇 있었다. 하이든은 걸작 <천지창조> 초연 때 미리 앙코르를 금지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도 앙코르에 반대였다.



앙코르를 반대했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앙코르의 순수성만 놓고 보자면, 그때가 좋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19세기 말 그라모폰 레코드가 발명되고 20세기 들어 음반과 라디오가 대중화하면서 앙코르가 가진 애초의 애틋함은 약간 퇴색했다. 앙코르는 관객들이 애걸복걸 다시 듣자고 하는 특별한 아리아나 명곡을 ‘다시 한번’ 부르는 게 더는 아니게 됐다. 관객도, 아티스트도 서로 아는 무언의 약속이 됐다. 본식에 따라붙는 달콤한 디저트, 메인 프로그램에 응당 덧붙는 보너스 같은 것이 됐고, 적당히 밀고 당기다 못 이긴 척 나오는 커튼콜이 됐다.

지난해 9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이 해묵은 앙코르의 전통과 의미에 관한 생각에 다시 불을 붙이는 상징적 사건이 일어났다. 오페라 <토스카>를 공연하던 중 세계적 소프라노인 안젤라 게오르기우가 무대에 난입한 것이다. 상대역인 카라바도시 역의 테너 김재형의 앙코르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이건 독주회가 아니라 오페라다! 나를 존중하라!”



(좌)화려한 무대매너와 앙코르를 선보였던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우)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기우(Angela Gheorghiu)가 2024년 오페라 <토스카> 무대에서 앙코르에 항의한 일은 앙코르의 전통과 의미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치게 했다.



얼마 전, 지인 A가 아이유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유 노래를 평소에 좋아했는데 얼마 전에 처음 그의 콘서트엘 가 봤고, 감동을 받고 왔다는 것이다. “앵콜에 앵앵콜에 앵앵앵콜까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았어. 심지어 계속되는 앙코르에 지치거나 막차를 놓치기 싫은 관객들이 먼저 퇴장하는 그 등 뒤에 대고 계속 부르고 있더라니까!”

이쯤에서 완고한 표정의 토스카니니와 바그너가 손잡고 “안 돼요. 끝나 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모두가 그렇게 바라고 있다 해도~”를 제창하는 장면을 그만 상상해 버렸다. 어떤 곡이든 무한히 ‘재생’될 수 있는 시대, 이 시대에 걸맞은 진짜 앙코르의 의미는 무엇일까. 앞으로 어떤 무대 형식, 어떤 음악 소비 환경이 또 앙코르의 본질을 미묘하게 변화시킬까.


10여 년 전 어느 무덥고 푸르던 그날, 브로콜리너마저를 기다리는 관객에 섞여 있던 내가 보인다. 무엇이 그들의 앙코르를 막아섰던 걸까. 하릴없이 흥얼거릴 뿐이다. 그 옛 노래.

“더 이상 날 비참하게 하지 말아요. 잡는 척이라면은 여기까지가 좋을 것 같아요.”




글. 임희윤  
기자·평론가. 국악·대중음악·클래식·영화 음악을 두루 다룬다.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한국힙합어워즈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몸속에 꿈틀대는 바이킹과 도깨비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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