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확인방법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단체 바로가기
전체메뉴 열기
퀵메뉴

계간 국립극장

  • 소식 · 참여
  • 계간 국립극장

2025년 6월호 Vol. 419

목차 열기

국립무용단 정길만

맺다 / 예술가의 초상
국립무용단 정길만

움직임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으로서

국립무용단 훈련장 정길만이 가장 관심을 갖는 건 사람의 내면이다. 

쉴 새 없이 춤을 추고 안무를 창작하는 가운데도, 그가 끊임없이 공부하는 이유다.






세종대학교에서 「국가브랜드 제고(提高)를 위한 국립무용단 작품보전과 전승방안 연구」로 무용학 박사(2013) 학위를 받은 정길만은 무용계의 구조·제도를 근본적으로 톺아보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인문의 정신을 항상 끌어안는다. 한때 운영한 무용 연구소 ‘프로그레스Progress·진전’의 간판에도 자신이 직접 그린 노송老松과 책 읽는 사람의 모습을 새겨 넣은 것처럼.


국립극장에서 만난 정길만은 “뭐든지 엉덩이로 버티는 게 힘”이라고 말했다. 전북 부안 출신인 그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중요시한 환경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북 대도시인 전주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하지만 정길만의 안에선 예술가의 기운이 꿈틀댔다. 미술을 좋아해 잠시 산업디자인 공부를 꿈꾸었다가, 영화 <시네마 천국>이나 <조일수의 FM 영화음악> 등에 빠지면서는 연극영화과를 지망하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 하숙집을 빼 그 돈으로 부친 몰래 상경한 그는 연기학원이 많던 KBS 별관 근처에 머물며 주말마다 유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오디션 연습 중이던 그는 특기로 발레를 내세운 여학생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곧장 전주에서 발레를 가르쳐 주는 곳을 찾았고, 한국무용 전공 원장이 다양한 춤을 가르치는 학원에 들어섰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풍 장기자랑을 대비해 하얀 장갑을 갖고 다니며 마이클 잭슨 춤을 추고 다닌 전력이 있던 정길만이었다. 원장은 고등학생 정길만에게 무용에 재능이 있다며 대학입시를 권했고, 그렇게 그는 시험 3개월을 앞두고 한국무용 전공으로 입시 준비에 돌입했다. 그러나 드라마틱한 승리 서사는 바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입시에서 똑 떨어진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정길만에게 군 입대가 변곡점이 됐다. 서양식 음악이 아닌 국악 쪽 유능한 인재들만 들어가는 국군 국악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것도 국악대 중 최고 명성의 국방부 국악대에 합격했다. 맨날 학교 연습실에서 춤추고 장구 두드리며 판소리를 연습한 것이 기반이 됐다. 군복무 중에도 매일 연습하며 대통령 미국 순방에도 함께하는 등 그렇게 견문을 넓혔다.

전역 이후 배움에 대한 열망이 더 끓기 시작했다. 한성대 무용학과에 편입했다. 동시에 엔니오 모리코네·공지영·윤이상·공옥진·박노해 등 장르와 영역을 불문하고 영감을 주는 예술가와 관련된 각종 책을 섭렵했다. 특히 책을 통해 가부장적 사회에서 억압받아 온 여성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그중에서도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공옥진의 삶에 감화돼 자신의 인생 본보기로 삼기도 했다.






정길만의 다채로운 삶은 국립무용단 입단의 무기가 됐다. 1998년 말 입단 오디션에서 상모 좌우치기를 한 뒤 정면을 딱 바라봤는데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다. 끝 장면에서 상모의 꽃이 이마 한가운데 놓여 있어야 하는데, 정길만의 열정으로 목에 피어나 있었던 것이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서 심사위원장을 들여다봤다. 사실 오디션에서 심사위원이 웃으면 그건 이미 결정된 것이다. 정길만은 긍정적 에너지를 갖고 국립무용단에 당당히 들어갔다.


국립무용단에 입단해서도 정길만의 열정은 더 불타올랐으니, 이번엔 택견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택견에는 현대적 움직임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서도 현대무용과 판소리를 접목한 무대 등 항상 실험에 앞장섰던 그다. “한국무용을 세계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한국무용은 유연하고 부드럽고 한이 있어 독창적이지만 속도감은 다소 부족하잖아요. 그런 다양한 특징에 대해 여러 생각을 했죠.”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전문사 입학도 특기할 지점이다. 김문환·오병남 같은 미학 거장 교수들의 책을 읽다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를 접하고 감탄한 그는 ‘내가 왜 무용을 하지’ 하는 근본적 물음을 품게 됐다. ‘무용예술’이란 무엇이냐는 거듭된 고민이 미학으로 수렴된 것이다. 이런 공부를 혼자 하지 말고 뜻 있게 하자는 생각에 학문의 길도 계속 정진했다. 정길만의 다양한 고민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물이 집적된 것이 논문 「국가브랜드 제고(提高)를 위한 국립무용단 작품보전과 전승방안 연구」였다. 한국춤의 글로벌 진출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었고, 이로 인해 ‘한국춤의 보편적 언어’에 대해 고심하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당시 정부에선 ‘국가 브랜드’를 강조하고 있었다.

“한국춤과 국가 브랜드를 매칭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수영 박태환, 피겨 김연아로 인해 그분들의 종목이 세계화될 때라서 예술계에도 브랜드 화두가 영향을 미쳤거든요. 한국 춤의 브랜드가치 제고에 국립무용단의 역할이 분명 있을 거라고 확신했죠. 국립무용단 자체가 오리지널리티이고, 이 자체가 브랜드니까 여기에 어울리는 예술 작품 브랜드라는 게 무엇이 있을까에 대해 연구한 결과물이에요.”

다른 나라 무용단의 선례도 살펴본 결과물이다. 예컨대 영국 로열 발레단,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경우 자신들만의 훈련 기법·시스템이 잘 짜여 있을 뿐 아니라 조직도 잘 편성돼 있다. 예술감독·부예술감독·안무가·훈련장과 분야별 티칭·정신상담·물리치료 등 다양한 수업 클래스가 있고, 특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유산을 잘 교육할 수 있는 아카데미가 있다. 그래서 정길만도 유소년들을 잘 가르치는 아카데미 같은 시스템을 국립무용단을 비롯한 한국무용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무용수, 안무가가 특히 고민해야 할 지점은 무엇인가. 정길만은 “세계 모든 이와 소통하기 위해선 결국 우리의 독창성이 무엇이냐를 따져 봐야 해요. 그 독창성을 어떻게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언어로 만들 것이냐가 화두고 주안점이라고 생각했거든요.”라고 짚었다. 그래서 내린 한국춤의 독창성은 이렇다. 슬픔이 희열로 치닫고, 그 카타르시스는 다시 한限으로 되돌아간다 - 죽음과 삶, 그리고 잉태로 이어지는 순환의 미학이다.

“슬픔의 난도가 높은데 그 안에 이야깃거리가 분명히 있어요. 그 안엔 치유의 상생이죠. 이런 점으로 세계의 모든 이와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정길만이 이끄는 라만무용단도 한국무용의 세계화를 위한 길닦음이자 그의 가치관을 함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용단의 이름 라만의 한자는 비단 라羅와 가득할 만滿을 쓴다. 동서양의 특산품뿐만 아니라 사상·문화·종교가 활발히 교류한 문명의 통로였던 실크로드, 즉 비단길에서 모티프를 따온 이름이다. 과거 비단길 같은 길을 만들어 가득 채우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비단이라는 건 우선 전통을 의미해요. 과거에 비단은 되게 귀한 거였고, 비단길을 통해서 문화를 교류하며 문명이 발달했단 말이에요. 그 실크로드가 우리나라까지 넘어온 거죠. 전 특히 비단에 방점을 찍고 있어요. 전통을 뜻하잖아요. 그 전통을 오늘날의 이야기로 재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현대적으로 풀더라도 거기엔 치유가 담겼죠.”

이처럼 공부에 가장 필요한 건 전통에 대한 존중과 자기 혁신이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존중하고 지킬 건 지키면서 스스로 움직임을 통해 가능성을 품고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공부하는 안무가의 미덕이다. 정길만은 그래서 계속 공부한다. 누군가 혹은 시대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글. 이재훈 『뉴시스』 문화부 기자
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