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은 지난 2021년 젊은 소리꾼의 참신한 소리판을 표방한 새로운 프로젝트 공연 <절창絶唱>을 시작했다. 소리꾼 두 명이 약 100분간 판소리의 눈대목 중심으로 이야기를 축약하고 재구성하는 한편 다양한 악기와 연출적 요소를 더한 <절창>은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을 얻으며 매년 선보이게 됐다. 또한 국립창극단 단원만이 아니라 외부의 소리꾼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면서 한층 확장성을 가지게 됐다.지난 4월 25~26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린 <절창V>의 주인공은 국립창극단 단원인 왕윤정, 국악그룹 ‘우리소리 바라지’의 소리꾼인 김율희의 무대였다. 김율희는 <절창III>에 참여했던 국악 기반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이날치’의 보컬인 안이호에 이어 국립창극단 비단원으로 <절창> 시리즈에 참여했다.
<절창V>가 판소리 ‘흥보가’를 선택한 것은 앞선 <절창> 시리즈에서 한 번도 다루지 않은 데다 두 소리꾼과 인연이 깊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흥보가’에 대한 두 사람의 과거 경험이 이번 공연을 풀어 나가는 뼈대가 됐다. <절창V>는 현대를 살아가는 두 30대 여성 소리꾼의 관점에서 재구성됐다.왕윤정은 2020년 입단한 국립창극단 막내 단원 중 한 명이다. 창극 <리어>(2022년 초연)에서 리어왕의 둘째 딸 리건 역과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창극 <정년이>(2023년)에서 엘리트 연구생 허영서 역을 맡아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사실 왕윤정은 어릴 때부터 국악계는 물론 판소리 팬에겐 꽤 알려진 인물이다. 왕기철 명창의 딸인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국립창극단에서 데뷔한 후 어린이 창극 배우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판소리에 입문한 그가 아버지에게 처음 배운 작품이 바로 박록주제 ‘흥보가’다. 유아 시절부터 아버지와 삼촌 왕기석 명창의 ‘흥보가’를 듣고 자랐던 만큼 그에겐 뿌리 같은 작품이다.반면 김율희는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인 동시에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재즈와 레게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독특한 소리꾼이다. 또 <괴물> 등 여러 창작 창극에서 작창과 주역을 맡을 정도로 다재다능함을 인정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등 완창판소리에 꾸준히 도전하며 소리꾼의 중심을 다잡고 있다. ‘흥보가’의 경우 한승석 중앙대 교수에게 배운 강도근제로 27세인 2016년 첫 완창에 도전한 이후 두 차례 더 무대에 섰다. 게다가 흥보 아내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창극 <흥보 마누라 이혼소송 사건>(최용석 작·연출)의 작창과 주역을 맡는 등 매우 친숙하다.
<절창V>는 두 사람이 ‘흥보가’에 대한 자신의 추억과 생각을 털어놓는 것으로 시작했다. 왕윤정에게 ‘흥보가’는 오랫동안 판타지 가득한 동화였다.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주는가 하면, 그 박에서 금은보화가 나오는 장면이 어린 시절 강렬하게 각인돼서다. 반면 나이를 먹고 ‘흥보가’를 배운 김율희에겐 권선 징악의 교훈만큼이나 가부장적 가치관이 불편하게 다가오기는 했으나, 판소리는 해학과 풍자가 있는 예술이다 보니 이야기 속 인물인 놀보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자 연습을 했다. 왕윤정 역시 나이가 들며 어릴 때 인지하지 못했던 가부장적 요소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됐음은 물론이다.현대 관객이 불편할 수 있는 부분을 짚고 넘어가는 두 소리꾼의 서두는 <절창V>의 방향성을 알려 주는 동시에 ‘흥보가’의 음악(소리)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절창> 시리즈에서 두 소리꾼이 무대를 이끌어 가는 방식은 매번 달랐지만, <절창V>는 유독 서두부터 두 소리꾼의 만담 같은 대화가 많았다. 이는 판소리 다섯 바탕 가운데 소리꾼이 익살과 재치를 부리며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재담才談이 많아 ‘재담소리’로 불리는 ‘흥보가’의 특징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오늘날 ‘흥보가’의 전승은 동편제인 박봉술제·강도근제·박록주제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김연수제(동초제)·김소희제(만정제)·박동진제 등도 불리고 있다. 전통 소리판에서 양립하기 어려운 두 소리제가 동시에 섞이는 것이야말로 <절창> 시리즈의 특별함이다. 이번엔 왕윤정이 부른 박록주제와 김율희가 부른 강도근제는 동편제 소리의 시조인 송흥록 명창으로부터 송광록-송우룡-송만갑-김정문으로 이어지다가 나뉜 만큼 장단과 창조가 유사한 편이다. ‘놀보 제비 후리러가는 대목’에서 끝나는 것도 같다. 다만 소리의 질감을 볼 때 박록주제가 기품 있으면서 점잖다면, 강도근제는 밀도 있고 견고한 편이다.‘흥보가’가 다섯 바탕 가운데 가장 짧기 때문에 <절창V>는 중요한 눈대목을 거의 포함했다. ‘떴다 보아라’부터 ‘제비 후리는 대목’까지 13개 대목을 부른 왕윤정과 김율희는 재담의 묘미를 살린 다양한 입체창과 역할극을 시도했다. 흥보와 놀보를 번갈아 가며 ‘흥보 쫓겨나는 대목’ ‘흥보 매품 파는 대목’ ‘흥보, 놀보에게 매 맞고 쫓겨나는 대목’ 등을 부르는가 하면 이중창으로 ‘중타령’ ‘제비노정기’ 등을 선보였다. 맑고 청아한 음색의 왕윤정과 거친 듯 시원한 음색의 김율희의 소릿결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절창> 시리즈는 그동안 판소리와 창극의 교집합에서 보이는 장점을 살릴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학을 보여 주었다. 여기에는 소리꾼의 재능 외에 음악·구성·연출의 역할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원래 판소리는 고수 한 명이 소리꾼과 함께 호흡을 맞추지만 <절창> 시리즈는 기악 앙상블의 사운드를 통해 콘서트 같으면서도 이야기 속 다채로운 공간을 만들어 낸다. 판소리 창작 집단 ‘입과손스튜디오’의 대표인 이향하가 음악감독을 맡은 <절창V> 역시 고수의 소리북 외에 거문고·가야금·타악, 전자사운드와 베이스를 더해 흥부와 놀부 등 인물들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리듬감을 한층 살린 음악도 <절창V>에서 돋보인 부분이었다. ‘흥보가’ 특유의 해학적인 재담과 말맛을 살리기 위해 발현악기와 여러 타악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리듬 위주의 편곡이 빛을 발했다. 또한 <절창> 시리즈는 원작에 현대적 관점을 담아 동시대 관객과의 공감대를 만들어 왔다. <절창V> 역시 권선징악과 판타지 외에 ‘흥보가’ 곳곳에 담겨 있는 가부장적 가치관에 질문을 던지고 등장인물을 재조명했다. 이 때문에 <절창> 시리즈에서는 드라마투르기의 역할이 중요한데, <절창V>에서는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를 이끌어 온 민준호가 연출·구성, 같은 극단에서 배우와 연출로 다년간 활동하며 호흡을 맞춰 온 우상욱이 공동연출을 맡아 ‘흥보가’를 새롭게 사유하도록 만들었다.

판소리는 17~19세기 우리나라 전통음악으로 정착한 뒤 20세기 들어 창극을 탄생시켰다. 이와 함께 판소리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20세기 중반 완창이 등장했다. 소리꾼이 고수와 함께 짧게는 세 시간, 길게는 여덟아홉 시간까지 소리를 하는 완창은 판소리를 뛰어난 전통예술로 인식시켰다. 하지만 골수 애호가라면 몰라도 완창은 일반 관객에겐 판소리에 대한 접근성을 낮춘다. 21세기 들어 창극 르네상스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절창>은 현대 관객에게 걸맞은 독창적 소리판으로서 빠르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