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확인방법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단체 바로가기
전체메뉴 열기
퀵메뉴

계간 국립극장

  • 소식 · 참여
  • 계간 국립극장

2025년 6월호 Vol. 419

목차 열기

순하고 부드럽게 함께 사는 세상의 꿈

달다 / 미리보기 1

국립창극단 <베니스의 상인들>

순하고 부드럽게

함께 사는 세상의 꿈


2023년 5월, 객석 수가 1,200석이 넘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공연이 개막을 20여 일 앞두고 일찌감치 전 회차 전석 매진됐다.

그해 6월 공연한 국립창극단 <베니스의 상인들>은 막을 올리기도 전부터 관람 열기가 뜨거웠다.






<썬샤인의 전사들> <빵야>를 쓴 김은성의 극본에, 우리 창극의 기둥과 같은 작창가 한승석이 소리를 짓고, 정통 국악 연주자에서 전위적 인디 록 밴드를 거쳐 이제는 컨템퍼러리 월드뮤직을 넘나드는 작곡가 원일이 음악을 만들었다. 한국 대표 무대디자이너 이태섭이 광활한 해오름극장 무대에 펼친 베니스의 공간 안에,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지낸 이성열 연출자가 지금 세계를 닮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국내 최고 창작진이 뭉쳐 셰익스피어의 대표 희극을 우리 소리 창극으로 재해석하겠다는 야심만만한 시도. <베니스의 상인들>이 2년여 만에 해오름극장으로 돌아온다.



우리 소리, 희극과도 통하다


말로 드러낼 수 있는 감정 너머의 정한情恨을 표현하는 것이 우리 소리. 그 판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창극은 단종을 섬긴 마지막 신하의 절절한 부성애와 충심을 담은 <아비.방연> 같은 비극에 강했다. 그간 창극으로 재해석된 고전을 살펴봐도 비극의 우세는 뚜렷하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리어왕』을 옮긴 <리어>,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비극을 옮긴 <트로이의 여인들>, 항우와 우미인의 이별 이야기가 담긴 경극을 그릇으로 빌린 <패왕별희> 같은 작품이 가슴 아픈 비극이었다. 하지만 <베니스의 상인들>은 다르다. 대극장 무대를 꽉 채운 거대한 범선 돛대 위에서 배우들이 관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을 거는 베니스 항구의 오프닝부터 활기가 넘친다. 시민들은 어딘지 모르게 한복을 닮은 옷을 입고, 강강술래처럼 원을 그리며 춤춘다.


“해적 만나 탈탈 털려, 양털 목화 개털 될까”

“박박 긁어 영끌투자, 깡통 쪽박 폭망할까”


요즘 세태를 우리말 말맛과 운율을 살린 언어유희로 풀어낸 대사에도 관객들은 폭소로 반응했다. 이런 언어유희는 우리 소리의 리듬감과 어우러져 바사니오가 청혼자 시험을 통과할 때 포샤가 올바른 답을 고르도록 힌트를 주는 장면 등 여러 곳에서 활약했다. 포샤 역의 창극단 소리꾼 배우 민은경은 초연 제작 발표회에서 “창극이 판소리 다섯 바탕 외에도 <리어> <트로이의 여인들> <메디아> 등 고전 비극을 많이 하며 한恨의 정서가 비극과 잘 어울린다고 했지만, 희극 <베니스의 상인들>도 판소리와 잘 어울리더라.”라고 했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처럼 전통 해학을 담은 원전이 아닌 서양 고전 희극도 우리 창극의 그릇에 담아 객석의 웃음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 것이다.



능동적 여성, 발랄해진 로맨스


창극 <베니스의 상인들>의 드라마투르기 조만수 충북대학교 교수는 초연 때 “마지막 재판의 반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상 코미디로서 이 작품의 진면목은 ‘사랑에 빠진 행복한 젊은이의 모습’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 <한여름 밤의 꿈>과 유사한 작품일 수 있다.”라고 했다. 창극은 바사니오의 정혼자 포샤가 사는 환상의 섬 벨몬트를 중세라는 원작의 시대 배경에 얽매이지 않고 원작보다 더욱 판타지적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무대미술가 이태섭의 손길로 태어난 벨몬트의 공간 속에서 바사니오와 포샤의 로맨스도 현대적으로 탈바꿈한다.

특히 포샤는 법정에서 지혜를 발휘해 안토니오를 위기에서 구해 내기까지 자신이 얼마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인지 스스로 보여 준다. 청혼자 시험 장면이 대표적. 원작에서 바사니오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포샤가 복종을 말하는 것과 달리, 창극에서 바사니오는 청혼자 시험에서 진주 상자를 선택하며 포샤를 “눈물이 단단하게 굳어진 진주처럼 여리면서도 강한 여자”라 하고, 포샤 역시 “아픔을 함께 나누며 오래 견디는 것이 진주와 사랑의 가치”라고 노래한다. 여성은 더는 수동적 지배의 대상이 아니며, 사랑은 일방적 복종일 수 없고 결혼은 함께 아픔을 견디며 역경을 헤쳐 나가는 일이 된다.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을 쓴 것으로 추정되는 1596~1598년은 베니스(베네치아)가 해양 무역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 어림잡아도 400년 넘는 긴 세월에, 동양과 서양의 지리적 간극도 있다.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가운데서도 정의·복수·자비·편견 등 복합적 주제를 지닌 작품이다. 이를 창극으로 재창조하는 시도는 전통극이 동시대 관객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도전이기도 하다.

김은성 작가는 원작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베니스의 상업적 전성기를 주도하는 무역 대기업 회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유대인 샤일록을 비난하고 멸시하던 안토니오는 베니스의 소상인들이 만든 상인조합의 지도자가 됐다. 자연히 제목 역시 안토니오를 지칭하던 ‘베니스의 상인’에서 상인조합의 상인 모두를 가리키는 ‘베니스의 상인들’로 바뀌었다. 창극에서는 무역에 엄두를 낼 수 없던 베니스의 가난한 상인들이 조합 덕분에 적은 돈으로 투자해 모두가 주주이자 주인이 되어 있다.

샤일록이 가슴살 1파운드를 도려내서라도 죽이고 싶도록 안토니오를 미워한 이유도 자연스레 달라졌다. 원작에서 샤일록의 증오에는 유대인을 악마화하던 당시 유럽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모멸감, 고통에 대한 반발과 복수심이 녹아 있다. “유대인은 눈이 없더란 말이냐Hath not a Jew eyes?”로 시작하는 샤일록의 긴 대사는 그 자체로 억압당한 소수자의 논리로 설득력이 있다.



선명해진 대립 구도, 명확한 동인

 


반면 창극에서 샤일록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돈이다. 그는 “독점 횡포와 정경유착”을 따지고 들던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 줄 테니 상인조합 운영권을 담보로 잡으라”라고 요구한다. 이에 격분한 안토니오가 “서민들의 희망인 상인조합을 내주느니 차라리 내 살덩어리를 떼어 가라”라고 받아치자, 샤일록은 기다렸다는 듯 “가슴살 1파운드”를 대신 담보로 요구하는 것이다.

독점과 고리대금업으로 폭리를 취해 온 샤일록은 천연덕스럽게 소상인들에게 “우린 베니스의 번성이라는 한배를 탔다”더니 “누구 덕분에 이만큼 먹고사는 줄 아느냐”라고 쏘아붙인다. 정치도 행정기관도 판사들도 모두 돈의 힘으로 내 편으로 만든 샤일록은 “가난하고 불손한 자들이 모여 만든 패거리” 상인조합이 무역선을 인도 너머 먼바다로 보낼 만큼 힘을 키운 것이 두렵고, 더 자라기 전에 싹을 밟아야겠다는 일념뿐이다.

이런 서사와 캐릭터의 변형에 대한 호오好惡는 다를 수 있겠으나, 대립 구도와 욕망의 동인動因이 좀 더 현대적으로 명확하고 간결해진 것은 분명하다.






전성기 창극이 도달한 또 하나의 성취

 

초연 개막 전 제작 발표회에서 대본을 맡은 김은성 작가는 “국립창극단이라는 단체가, 창극이라는 장르가 지금 전성기구나 싶을 만큼 배우들도 아름답고 건강하고, 작품도 하나같이 완성도 높아 늘 부러웠습니다. 집필 제안을 받았을 때 너무 좋은 나머지 덜컥 수락해 버렸어요.”라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창극은 지금이 전성기이고, <베니스의 상인들>은 그 전성기의 창극이 이룬 또 하나의 성취다. 게다가 타고난 넉살로 미성과 탁성을 넘나들며 극을 이끄는 ‘안토니오’ 유태평양, 악역을 맡아도 맵시·소리·연기 모두 섬세하고 유려한 천생 주인공 ‘샤일록’ 김준수, 날카로운 통찰과 단단한 소리로 판의 흐름을 주도하는 ‘포샤’ 민은경, 어리숙한 척 무장 해제시켜 놓고 어느새 자신을 관객 마음에 새겨 넣을 줄 아는 ‘바사니오’ 김수인을 비롯해, 우리 창극단의 보물 같은 소리꾼 배우들이 모두 이 안에 있다.

언제부턴가 날카롭고 매운맛에 익숙해졌다. 혀가 얼얼한 마라탕은 어느새 국민 음식. 떡볶이도 엽기적으로 매워야 팔리고, 대만에서 건너온 밀크티 공차도 한국에서만 쫀득한 알갱이를 맵고 뜨겁게 볶은 펄볶이 메뉴를 내놨다고 한다. 영화도 드라마도 갈수록 더 많은 피와 살이 튀고 뼈가 꺾이는 매운맛 천지다.

<베니스의 상인들>은 셰익스피어의 고전 희극에 동시대성을 부여해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다시 읽어 낸 영리한 창극이다. 얼얼하게 매운맛이 아닌 부드럽게 순한 맛으로도 얼마든지 시대와 소통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앞뒤 재지 않고 웃고, 따뜻한 마음으로 미소 지으며, 마지막엔 통쾌하게 큰 소리로 웃어 젖혀도 좋을 작품이다. 그건 이 창극 안에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선함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세상은 조금씩 나아져 가리라는 희망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 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종교·미술·영화 등을 담당했고, 어느새 그중 공연을 보고 기사를 쓴 기간이 가장 길어졌다.


국립창극단 <베니스의 상인들>

일정 2025-06-07 ~ 2025-06-14 | 시간 화·수·목·금 19:30, 토·일 15:00 | 장소 해오름극장

관람권 VIP석 8만 원, R석 6만 원, S석 4만 원, A석 2만 원 | 문의 02-2280-4114

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