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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호 Vol. 419
목차 열기기존의 감각과 도덕을 교란하는 샤카의 몸이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공연 형식으로 구현되는 순간,
관객은 무엇을 보게 될까.
『헌치백』 저자 이치카와 사오
이치카와 사오의 소설 『헌치백』이 2023년 아쿠타가와상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많은 이들이 놀랐다. 아쿠타가와상은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으로 1935년에 제정된 이후 일본 문단에서 가장 보수적인 상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꼽은 『헌치백』의 수상이 파격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장애 여성의 성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묘사하면서 사회의 금기에 저항하는 줄거리를 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셜미디어의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온 듯한 가볍고 감각적인 문체,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방향과 속도로 전개되는 리듬이 이른바 ‘순문학’에서 흔히 인정받는 스타일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치카와 사오가 역대 아쿠타가와상 최초의 중증장애인 수상자라는 점도 화제가 되었다. 197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이치카와 사오는 선천성 근세관성 근병증이라는 질환을 가진 중증장애인으로서 열네 살부터 인공호흡기를 써 왔다. 와세다대학교 인간환경과학과를 졸업하면서 「장애인 표상과 현실 사회의 상호 영향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썼을 만큼 일찍이 장애인의 삶을 글로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소설을 써 온 경력도 짧지 않다. 신체 활동의 한계로 취업을 하지 못하자 20여 년 동안 집에서 라이트노벨을 써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이 단지 일시적 파격이나 충격적 해프닝으로 치부되기에 『헌치백』은 인간의 욕망, 문학의 순수성, 문명의 생산성에 이르는 거대한 질문을 가득 담고 있다. 그녀의 아쿠타가와상 수상 소감부터 이미 만만치 않은 질문거리다.
“어째서 2023년에 이르러서야 중증장애인이 최초로 수상하게 됐는지 모두가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치카와 사오의 자전적 이야기가 일부 반영된 『헌치백』의 주인공은 40대 장애인 여성 샤카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척추가 조금씩 휘기 시작했으며, 중학교 2학년 이후로 제 발로 걸어본 적이 없다. 전신 근육이 약화된 탓에 심폐 기능에도 문제가 생겨, 간병인과 호흡기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상황이다. 그러나 샤카가 흔히 재현되는 장애 여성의 전형적 캐릭터, 즉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약자 캐릭터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그녀는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다. 부모님의 재력을 물려받아 원룸 건물을 개조한 장애인 시설 ‘잉글사이드’를 운영하면서 간병인·케어매니저·방문의사·호흡기 렌털업자 등을 고용하는 돌봄 사업의 경영인이기도 한 것이다. 샤카는 웹 미디어 기사를 쓰는 프리라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주로 다루는 이야기는 남성의 시점으로 서술한 가상의 성매매 업소 체험담으로, 제법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 그녀가 남성들의 욕망이 되는 여성이 되고 싶다는, 그러니까 “다시 태어나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라는 소망을 종종 트위터에 올리는 것도 놀랍지 않은 일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환생할 수는 없으니, 샤카는 그보다는 현실적인 욕망을 품는다. 바로 임신을 해 보고 싶다는 것. 비장애인 여성에게 임신은 출산과 양육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생애주기의 한 단계일 뿐이지만, 출산과 양육이 불가능한 샤카에게는 그 자체만으로도 간절한 목적이다. 그러나 누구의 정자로 임신을 할 것인가? 샤카는 거액을 들여 비장애인 남성을 고용하기로 한다. 그리고 척추장애인의 몸으로 태아를 낳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중절을 해야만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임신 중절이 막다른 골목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하는 비극이지만, 샤카에게는 그저 강렬하고 짜릿한 욕망이다. 태아 살해 욕망이라고 할 법한 불온한 욕망은 인륜을 거스르는 부도덕한 행위처럼 보인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태아를 임신할 경우 중절해야 한다는, 그러니까 장애인을 낳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무참한 주장도 있지 않던가? 이 문제에 대한 샤카의 태도는 자못 냉소적이다.
“그렇다면 죽이기 위해 잉태하려고 하는 장애인이 있어도 괜찮은 거 아닌가? 그걸로 겨우 균형이 잡히잖아.”
샤카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장애 여성의 재현 문법을 근본적으로 묻게 만든다. 우리에게는 장애인을 성적 주체로 상상하지 못하는 오랜 관습이 있다. 흔히 장애인은 첫째, 순박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무성애자로 재현되거나, 둘째 유성애자더라도 정상성 규범에 순응하는 이성애자로 기대되며, 셋째 그 섹슈얼리티는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의 삽입 섹스를 중심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퀴어·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세 겹의 억압 아래 이성애자 남성의 변태적 욕망에 의한 수동적인 피해자 입장으로만 상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샤카는 그저 수동적 피해자도, 순수한 돌봄 대상자도 아니다. 그녀는 돌봄 하우스를 총괄하는 능숙한 관리자이자 성 구매자인 동시에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공동체의 규범 속에서 협상하는 글쓰기 노동자다. 여기에서 장애는 결핍과 무능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러한 결핍과 무능에서 배태된 욕망을 실천하기 위한 조건이다.
이 소설이 제기하는 더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 사회가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생산성’의 가치에 관한 것이다. 샤카는 앉아서 책을 들어 페이지를 넘길 수 있어야 한다는 건강을 전제로 한 종이책을 두고 “그 특권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책 애호가들의 무지한 오만함을 증오한다.”라고 말한다. 종이책은 누군가에게는 전자 서적에는 없는 냄새와 감촉을 체험하게 하는 아름다움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구부러진 등뼈를 압박해 폐를 짓누르는 고통이다. 실제로 누운 상태에서 태블릿PC에 엄지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이치카와 사와는 사회적 약자의 물리적 접근성을 향상하기 위한 ‘배리어프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여러 차례 드러낸 적이 있다. 출산이 아닌 중절을 하고 싶다는 샤카의 욕망은 생산성의 가치를 철저히 물화한다. 우리가 언제나 신성시해 오던 생명이 이른바 ‘정상적인’ 삶만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면, 그것을 과연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제 『헌치백』이 무대 위로 옮겨진다. 누구의 몸이 어떤 조건 아래에서 살 가치가 있는 삶으로 여겨지는지. 누가 낳을 수 있고, 누가 돌봐야 하며, 누가 쓸 수 있는지. 관객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상식이 한 겹씩 벗겨질 때, 무대는 단지 텍스트의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몸이 교차하는 장으로 확장될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 생산성과 무가치, 순수와 타락의 경계에서 이 여성의 불온한 욕망은 어떤 시선과 마주칠 것인가? 공연 〈헌치백〉은 이 불편한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제 무대는 샤카의 욕망이 아니라, 그 욕망을 바라보는 우리의 감각을 드러낼 것이다.
* 전혜은, 루인, 도균,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여이연, 201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