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8월호 Vol.3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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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실험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극 문화를 일구려던 노력. 국내의 소극장 운동은 비록 미약했으나 오늘날 연극계를 풍성하게 만든 토대가 됐다 소극장 운동은 쉽게 말해 기존 연극을 혁신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다.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앙드레 앙투안이 상업주의 연극에 반발해 테아트르 리브르Theatre Libre를 설립하며 시작됐다. 이는 곧 유럽 및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1920년경 한국에 상륙해 1930년대에 일정 성과를 이뤘다. 한국 연극의 시발점으로 평가되는 극예술협회(1920)나 극예술연구회(1931)가 바로 소극장 운동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단체들이다. 다만 격동의 시간이었던 근대에 연극계 역시 파란을 피할 수 없었기에, 소극장 운동은 점멸하는 단체들과 함께 근근이 맥을 이어갈 뿐 성숙기에 이르지 못했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앙투안이 개시한 소극장 운동은 이른바 대중적 상업극을 비판하며 리얼리즘 연극을 추구했으나, 195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리얼리즘 일변도에 반발하는 소극장 운동이 전개됐다. 엄밀히 말하면 리얼리즘조차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 시기 실험극장, 제작극회 등은 서구에서 들여온 소위 반연극 계통의 실험극을 시도한 것이다. 특히 제작극장이 올린 존 오즈번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는 연극계뿐만 아니라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세간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위의 극단들이 겨우 거점으로 삼았던 원각사가 2년 만에 화재로 소실되면서 발전의 동력은 다시 잦아들고 말았다. 자유극장과 함께 다시 시작된 소극장 운동 이러한 난관 속에서 자유극장이 등장하며 소극장 운동은 전기를 맞았다. ‘참된 현대극 창조’를 기치로 삼아 이병옥·김정옥이 주도적으로 설립한 이 단체는 1969년 명동에 카페 떼아뜨르를 건립함으로써 안정적인 공연 공간을 마련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프로시니엄 무대가 아닌 살롱 극장을 운영하며 공연장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으며, 작품 역시 서구의 신작에만 치우치지 않고 꼭두각시극이나 판소리 같은 전통극을 포괄하고, 신인 극작가 양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비록 카페 떼아뜨르는 공연 규제 등으로 7년 만에 문을 닫지만 이후 생겨난 창고극장·에저또·실험소극장 등 소극장 연극이 훨씬 다양해지고 풍부해지는 밑거름이 됐다. 공연예술박물관 상설전시실의 소극장 운동 코너는 이 같은 한국 연극사의 중요 구간을 축약해서 보여준다. 제작극회의 낱장 프로그램부터 민중극장이 실제 사용한 대본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공연의 기록을 한눈에 훑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자유극장의 경우에는 관람권과 기념주화, 프로그램북이 나란히 놓여 카페 떼아뜨르의 독특했던 분위기를 전한다. 관람권에는 ‘차茶권’이라고 적혀 살롱 극장의 특성을 보여주며, 이오네스코의 대표작 ‘대머리 여가수’의 공연 프로그램북은 프랑스어를 활용한 디자인이 부조리극의 성격을 세련되게 드러낸다. 회원권과 기념주화도 독특한 홍보물로서 디자이너 이병옥을 위시한 자유극장의 현대적 감각을 자랑한다. 민중극장이 공연한 부조리극 ‘국물있사옵니다’와 ‘카덴자’도 한국 소극장 운동에서 기념할 만한 작품이다. 사회 부조리를 풍자한 이근삼의 대표작 ‘국물있사옵니다’와 점차 잔혹극으로 거듭나는 ‘카덴자’의 초연 당시 자료가 전시돼 있는데, 특히 ‘카덴자’의 관람권과 프로그램북은 인상적인 가면 그림을 검은 객석 중앙에 배치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부수는 내용을 불온한 색채로 암시한다. 부조리극이라면 독일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의 ‘보이체크’도 빼놓을 수 없다. 전시된 대본은 동랑레퍼토리극단이 1975년 5월에 ‘보이첵크’의 한국 초연 직후 재공연 시 사용한 것으로, ‘보이첵크’라는 단어를 표지에 빼곡히 늘어놓아 주인공이 보이는 강박적 행동을 짐작게 한다. 더욱이 해당 대본은 모노드라마로 이름을 날린 추송웅이 친필로 주요 대사를 적어 넣어, 당시의 치열했던 연구를 실감케 해준다. 마지막으로 진열장 공중에 매달려 강렬한 존재감을 풍기는 소품은 실험극장의 ‘에쿠우스’에서 사용된 말 가면이다. 1973년 영국 국립극장에서 초연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희곡은 2년 후 실험극장이 한국에서 초연하며 연극계에 많은 변화를 초래했다. 폭발적인 인기로 좌석 예약제가 도입됐고, 주연 배우 강태기를 일약 스타덤에 올렸으며 연극계 너머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선정성을 빌미로 공연 금지를 당하기도 했으나, 이후에도 실험극장을 비롯한 많은 소극단이 ‘에쿠우스’에 도전하며 많은 배우와 연출가를 배출했다. 이처럼 한국의 소극장 운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끈질기게 이어지며 1970~80년대에 꽃을 피웠다. 비록 실험성보다는 상업화됐다는 측면도 있으나, 오늘날 연극계를 풍성하게 만들고 한층 다양한 작품이 제작·수용될 수 있는 근간을 이룩했음은 분명하다. 공연예술박물관의 자그마한 상설전시실은 그 거대한 족적을 담고 있다. 참고문헌 국립중앙극장 공연예술박물관 편, ‘공연예술, 시대와 함께 숨쉬다’, 국립중앙극장, 2010 유민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이트, 1995 서연호·이상우 공저, ‘우리연극 100년’, 현암사, 2000 공연예술박물관 공연예술박물관은 약 28만 점의 공연예술 자료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공연예술 디지털아카이브 홈페이지(archive.ntok.go.kr)에서 누구나 쉽게 자료 검색과 열람이 가능하며 박물관을 직접 방문하면 더 많은 자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공연예술을 전시하다’에서는 공연예술박물관 상설전시실 중 일부 공간을 골라 지면에 차례로 소개합니다. 문의 공연예술자료실(방문 이용) 02-2280-5834 공연예술디지털아카이브(온라인 이용) 02-2280-5805 글 이주현 공연예술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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