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빠른예매 바로가기 사이트 지도 바로가기
월간미르 상세

2020년 08월호 Vol.367

무구한 아름다움

내일의 전통 | 플로리스트 무구의 꽃꽂이

1

꽃집도 많아지고 플로리스트도 많아진 요즘이다. 오랫동안 잡지 기자로 살아온 덕분에 그 예쁜 꽃꽂이를 많이 봐왔는데 그녀의 꽃꽂이는 달랐다. 구도, 비율, 꽃과 가지가 그려내는 선의 형태마저 특별했다

그녀의 작품을 접한 통로는 인스타그램이었다. 사진이건 지면이건 3­초만 눈길을 붙들어 매도 대단한 창작물이라고 하는데, 그녀의 꽃꽂이는 5초 넘게 가만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옥잠화·도라지꽃·달개비·인동초 같은 한국의 자생식물이 둥그런 접시 위에서, 아담한 사각 바구니 안에서 환하고 아름답게 어우러진 모습. 어떤 작품에서는 꽃대가 호방하게 난을 치듯 허공 위로 기세 좋게 올라가고, 또 어떤 작품에서는 하늘하늘한 가지와 넝쿨이 접시 너머가 흙이라도 되는 듯 길게 뻗어나간다. 모든 창작물은 프레임의 영향을 받는다. 사진은 액자, 그림은 화폭, 건축은 땅. 무구의 꽃꽂이는 그 프레임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프레임 바깥으로 자연스럽게 영역의 확장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색. 건강한 초록 잎과 넝쿨 사이로 환한 얼굴을 내민 각양각색의 꽃과 열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답다. 손길이 더해졌으니 당연히 인공적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꽃잔치’가 아닌 것처럼 화사하고 깊은 숲속이나 계곡, 이끼 그늘에서 발견됨직한 자연미도 함께 갖고 있다. 꽃의 가장 즐거운 한때를 꽃꽂이로 구현한 것 같다. 
그렇게 그녀의 작품을 유심히 보던 차에 제철 식자재로 만든 음식을 절기마다 나누고 싶어 기획한 행사 ‘시절안부’에 그녀가 신청해 처음 얼굴을 봤다. 젊었다. 제법 공력이 오래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청춘’이었다. 그러고 보면 공력이라는 건 때로 나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공력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감각이 남다른 사람들이 있다. 
더 많은 작품을 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파주 헤이리에서 가까운 그녀의 작업실을 찾았다. 대청소를 한 듯 깨끗한 작업실. 창가에는 사진 촬영을 위한 장비도 말끔하게 준비돼 있었다. 수업을 위해 만든 꽃꽂이도 곳곳에 꽂혀 있었다. 다른 질문도 많았지만 나는 그녀가 어떤 미감을 추구하는지,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영감이 되고, 아이디어가 된 것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녀는 모든 질문에 또박또박, 정확한 어휘와 문장으로 말했다. 
“한국에서 꽃꽂이를 배운 후 런던 플라워 스쿨에서 비즈니스 과정을 들었어요. 그다음에는 런던에 있는 플로리스트가 진행하는 일대일 워크숍이나 단체 수업을 수강했고요. 그곳에서 하는 수업들은 이론에 강해요. 개화 시기부터 관리법을 포함해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이런 꽃꽂이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누구인지 그 배경까지 자세하게 알려줘요. 그러면서도 자유로운 꽃꽂이를 추구해 선생님과 똑같은 형태를 강요하지 않아요. 브라질과 홍콩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는데 국가 색도 은근히 투영되더라고요. ‘눈을 깨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새로운 형태와 색을 보고,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죠.”     

2


나의 눈을 깨운 신사임당의 ‘초충도’
눈을 깨우는 건 많이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공부도 뒷받침돼야 한다. 
“한국 전통 꽃꽂이는 실체가 없어요. 도자기는 물건으로 내려오지만 꽃꽂이는 그렇지 않잖아요. 남아 있는 문헌이나 그림을 참조할 수밖에 없어요. 6.25전쟁 후 1세대 플로리스트들이 중심이 돼 한국 전통 꽃꽂이의 특징을 정립했는데, 우선 세 가지 형태가 있어요. 꽃이 위로 올라가는 직립형, 휘어지는 경사형, 아래쪽으로 흘러내리는 하수형. 세 가지에는 중요한 가지, 즉 주지도 들어가는데 이는 각각 천天·지地·인人을 뜻해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조화를 추구하는 동양철학과도 맞닿은 부분이죠. 이런 사상은 일본의 전통 꽃꽂이 이케바나도 똑같아요. 이케바나는 꽃으로 하는 분재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여기에서 45도, 저기에서 60도 하는 식으로 저마다 정해진 각도가 있고 그런 규율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 목표예요. 반면 한국 꽃꽂이는 나름의 규율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융통성이 있어요. 한국 미술사 전체를 논할 때도 자주 언급하는 ‘무계획의 계획’ ‘무기교의 기교’가 꽃꽂이에도 적용되지요. 그런 자연스러움이 싫지 않았어요.”
조선 전기의 문신 강희안이 꽃과 나무의 재배와 이용에 관해 서술한 농업서 ‘양화소록’, 조선 시대 선비 유박이 쓴 ‘화암수록’도 정독했다. 이런 책들을 보면 한국의 꽃꽂이에도 규칙이 있었다. 몇 개의 줄기로 끝내야 한다거나 꽃이 아름다워 보이는 높이는 화병의 높이에 비례해 가늠해야 한다는 부분도 있었다. ‘화암수록’에는 꽃의 등급까지 나온다. 
“‘화암수록’은 등수마다 꽃을 다섯 종류씩 배치 했는데, 1등은 매화·국화·연꽃·대나무·소나무고 2등은 모란·작약·해류·파초·왜철쭉으로 하였다….” 
그녀가 보여주는 자료를 살펴보니 내가 좋아하는 장미와 수양버들은 5­등이었고, 백일홍은 6등, 목련과 단풍은 7등이었다.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는 찬찬히 고이던 지식과 미감에 큰 물길을 틔워줬다. 16세기 초, 8폭 병풍에 그린 일상의 자연. 꽃에도 등급을 매겼던 여느 선비들과 달리 그녀의 그림에는 수박과 들쥐도 나온다. 
“우리 주변의 작고 보잘것없는 들꽃과 풀꽃에까지 눈길을 준 유일한 ‘화가’가 신사임당이었어요. 초충도에는 달개비·여뀌·나팔꽃·도라지꽃·토종패랭이가 나와요. 수세미도 있고 맨드라미, 나비도 있어요. 그런 꽃과 곤충을 자세히 보면 도감 못지않게 특징이 잘 표현돼 있어요.” 
그녀가 이름 없는 들풀까지 꽃꽂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자생식물을 사용하며, 어쩔 수 없이 인공적이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초충도를 좋아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적 미감은 뭘까? 고민을 오랫동안 했어요. 지금도요.” 
그렇게 그녀가 찾은 확신 중 하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글쓰기가 이뤄지는 옛 시대의 족자와 병풍, 거기에 어울리는 꽃꽂이가 한국의 미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허공으로 가지와 꽃대가 높이 올라가고 접시와 바구니를 넘어 넝쿨이 옆으로 길게 흘러가는 형태도 이런 생각에서 가지를 친 것이다. 
“한국의 꽃꽂이는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전개된 것 같아요. 하나는 선과 여백을 살리는 쪽으로, 다른 하나는 양감 위주로 빽빽하게. 후자는 주로 불교 문화에서 볼 수 있는데 불단에 올리는 꽃은 헌화의 개념이 강하니 풍성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발전한 것 같아요. 조선 시대에는 그렇게 빽빽한 꽃꽂이는 멋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그때는 선비 위주로, 남자들도 꽃꽂이를 많이 했는데 정신 수양하듯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요.”

3


비밀의 숲, 꽃의 향연
그녀가 추구하는 미감이 ‘야생’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수하고 담백한 자연스러움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도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만이 중요했다면 침대 옆에 도구를 두고 새벽부터 오후 3시까지 꽃꽂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고의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해 사진을 200~300장 반복해서 찍는 일도. 단순하게 규정하기 힘들지만 그녀가 추구하는 미감은 ‘환상적 자연스러움’이 아닐까 싶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비밀의 숲’에 있을 법한 꽃의 향연. 그곳도 자연이니 자연스러운 형태와 얼굴이겠지만 그 빛깔과 균형, 비례와 조화가 신비로운 오라를 발산하는 어떤 것. 
“무구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텅 비고 무한한 느낌이 들었어요. 순진무구한 표정, 순진무구한 얼굴 같은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았어요. 듣기에 따라 이상할 수도 있는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꽃꽂이, 그걸 마침내 해내고 나면 내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꽃꽂이에 대한 환상이 있어요.”
그림책을 전문으로 내는 출판사에 다니던 세월. 출판사가 파주출판도시에 있어 건물 옆으로 텃밭이 있었고 그곳에서 ‘밭일’을 하고 들꽃을 잘라 집에 하나둘 꽂으면서 시작된 지금의 직업. 그림책을 만들기 전에는 도감 편집자로 꽃과 식물을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고, 산으로 들로 들꽃을 채집하러 다녔는데 그 마디마디가 모여 지금의 무구 스타일이 됐다. 뱀딸기도 기꺼이 활용하고, 마른 연잎 줄기도 넣고, 칡넝쿨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여름의 백일홍, 겨울의 동백과 크리스마스 로즈같이 그 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꽃들로 생기 넘치는 꽃무리를 구현하는. 
인터뷰가 끝난 후 물을 담은 작은 페트병과 가위를 들고 그녀와 작업실 바깥의 시골길로 나가 잠시 채집의 시간을 가졌다. 
“그건 메꽃이에요. 이건 금계국. 그건 사철쑥이네요. 방금 자르신 건 냉이. 아까 건 개망초와 강아지풀” 
모르는 꽃도,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꽃도 없었다. 

1 작약·한련화·산딸나무꽃·양귀비·코스모스·수레국화·고수꽃의 조화. 흑유 그릇에 침봉을 사용해 고정했다
2 두 가지 색의 제비꽃·민들레·토끼풀·무스카리가 주인공. 볏짚을 헐겁게 묶고, 볏짚 사이사이 줄기를 끼우듯 완성했다
3 백일홍·오이초·클레마티스·블루베리, 그리고 민트잎 소재의 잎사귀를 떼어내지 않고 줄기째 모아 잡은 여름 부케. 이 손의 주인공이 무구다

정성갑 월간지 ‘럭셔리’와 네이버 디자인프레스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한 점 갤러리이자 콘텐츠 제작·기획사인 ‘클립clip’을 운영한다  
사진 제공 무구


사이트 지도

사이트 지도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