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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8월호 Vol.367

정확히 보는 사물의 본질

경계를 넘는 예술 | 시대를 앞서간 화가, 에두아르 마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1863)


극적인 조명과 빛으로 관람자의 시선을 압도한 마네. 시대를 앞서간 그에게 쏟아진 건 편견 가득한 분노였다. 왜곡 없이 본질을 파악하는 것의 의미. 마네의 그림을 통해 읽어본다

1865년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는 프랑스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남성 부르주아 계급의 성매매 문화를 고발하는 그림이라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네의 또 다른 작품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여기서는 정장 차림의 두 남성 옆에 벌거벗은 여성이 앉아서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이 그림 속 여성의 모습은 누드일까, 아니면 벌거벗은 걸까? 동양 문화에서 누드와 벌거벗음은 큰 차이가 없지만, 서양에서 누드는 순수한 육체의 형상으로 예술의 대상이 된다.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 경에 따르면 누드는 자신이 옷을 벗었다는 자의식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 속 여성은 벌거벗은 것이 아니라 누드가 맞다. 여성이 우리를 바라보는 침착하고 당당한 얼굴을 보라. 더구나 이 그림의 구도는 1525년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을 모작한 동판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누드는 신화 속 인물의 특권이다.
그림 속 여성은 빅토린 뫼랑이라는 직업 모델로 ‘올랭피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 마네는 금기를 깨는 여성상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뫼랑은 ‘에스파다 옷을 입은 빅토린’에서 남성의 전유물인 투우사 복장으로 칼을 들고 서 있다. ‘담배를 문 집시 여인’은 역시 여성에게 금기였던 담배를 피우는 여성을 그린 것이다. 마네의 그림에 등장하는 문제의 누드는 자유분방한 여성에 대한 마네의 애정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1874년 나다르가 찍은 에두아르 마네의 초상


달을 가리킬 때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아야 한다
사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우선 마네는 평범한 여성의 누드를 야외로 가지고 나왔다. 쏟아지는 햇빛 아래에서 사물은 불연속적인 윤곽선을 가지며 강렬한 색조의 변화를 보인다. 당시 미술을 지배하던 아카데미즘에서는 연속적인 명암 변화로 입체감을 표현하도록 가르치고 있었다. 이것은 실내에서 그리는 그림에나 통하는 방식이다. 당시 주류 미술계가 마네에게 분노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미술의 기초도 모르는 풋내기의 그림처럼 색조가 급격히 변한다는 것이다. 이런 극적인 빛의 효과는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화풍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마네는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길 원했다. 인상파 화가들이 자신을 추앙할 때에도 그들과 거리를 두었는데, 아마 그들 대부분이 빈털터리이고 하층 계급에 속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따라서 마네가 일부러 도덕적 파문을 일으키려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법이다. 당시 사람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그의 의도는 보지 못하고 자신들 눈에 보이는 것에만 분노한 것이다.
편견 가득한 분노는 과학의 역사에도 흔하다. 지구가 돈다고 갈릴레오가 주장했을 때, 사람들은 신성모독이라고 분노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정의로운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윈이 생명의 진화를 주장했을 때, 사람들은 역시 분노했다. 그의 이론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역사를 설명하지만, 사람들은 단지 인간과 원숭이가 친척이라는 사실에만 흥분했다.
위대한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도 고단한 인생을 살았다. 폴란드에서는 여성이 대학에 갈 수 없었기에 퀴리는 프랑스로 이민을 간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최초로 박사, 교수, 노벨상 수상자가 되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퀴리가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동료 과학자와 불륜에 빠지자 프랑스 사회 전체가 분노로 폭발한다. 외국인 마녀가 건전한 프랑스 가정을 파괴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노벨상 위원회는 퀴리에게 상을 수여는 하겠지만, 스캔들로 시끄러우니 시상식에 오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퀴리는 이렇게 답하고 당당히 시상식에 참석한다. “노벨상은 내 사생활이 아니라 내 연구에 주는 것이다.” 달을 가리킬 때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아야 한다. 마네가 주는 교훈이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


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1881~1882)


의도된 그림, 그 안의 의미 찾기
철학자 미셸 푸코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전혀 다른 메시지를 읽어낸다.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명이 이상하다. 우선 그림 내부 왼쪽 위에서 내리쬐는 보통의 조명이 있다. 이 때문에 여성의 얼굴에 그림자가 생겨서 입체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진짜 조명은 관람자의 위치에서 여성의 몸을 향해 수직으로 쏘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의 누드는 눈부시게 빛난다. 대체 이 조명의 의도는 뭘까? 푸코는 이것이야말로 서구 회화의 전통이 숨기려고 한 캔버스의 속성을 드러내는 거라고 주장한다. 르네상스 이래 회화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림을 보지만 그림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네는 그림 자체를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이 조명을 봐. 그림을 감상하는 당신 머리 위의 전등이 만든 빛이야. 당신 눈앞에 있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그림이라고! 그림 속 오른쪽 남성은 손가락으로 두 곳을 지시하고 있다. 바로 빛이 오는 두 방향이다.
푸코는 관람자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드는 효과가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에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그림에서는 여성 바텐더가 중앙에서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다. 문제는 뒤에 있는 전면거울에 비친 상이다. 거울은 술집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데, 바텐더의 뒷모습이 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각도로 오른쪽에 있다. 휘어진 거울이 아니라면 이 그림에는 두 개의 시점이 있어야 한다.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걸까.
1986년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을 엑스선으로 조사하자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마네가 처음 그린 버전에서는 바텐더가 약간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뒷모습도 거울 위의 적절한 위치에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네는 이후 그림을 몇 차례 수정한다. 바텐더의 시선이 정면으로 바뀌고 거울에 비친 뒷모습이 여러 차례 이상한 방향으로 이동한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마네는 매독으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결국 다리를 절단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시기에 무의미한 수정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푸코가 옳다면 관람자의 시선을 둘로 만들려는 의도일 것이다. 바텐더의 고단한 삶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방법으로 굳이 뒷모습을 보여주려 한 걸까.
관람자의 시선에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보면 눈앞에 있는 게 실재가 아니라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에선 이분화한 공간을 통해 주인공이 응시하는 현실과 거울 속 환상을 한 작품에 담아냈음을 깨닫게 된다.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기 위해 사용한 마네만의 독특한 변주법. 화폭에 담긴 그의 의도가 들린다.

김상욱 경희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카이스트에서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상욱의 양자 공부’ ‘떨림과 울림’ ‘뉴턴의 아틀리에’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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