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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6월호 Vol.365

국립창극단 조용수

예술가의 초상

 

“고수는 디딤돌이 돼야 해요. 소리하는 사람이 사뿐히 밟고 갈 수 있게 잘 받쳐주는 일이죠.” 명창에게 ‘득음’이 있다면 명고수의 경지엔 ‘배려’가 있단다. “고수는 배려할 줄 알아야 우뚝 설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국립창극단의 모든 공연에 빠지지 않는 얼굴이 있다. 주역을 도맡는 소리꾼은 바뀌어도 ‘고수鼓手 중의 고수高手’, 조용수 기악부장은 늘 공연 속에 있다. 안숙선 명창의 공연에도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는 얼굴이라 더 낯이 익다. 고모가 조소녀 명창인 데다, 조용안·조용복 두 사촌도 고수로 활동 중인 ‘판소리 패밀리’ 일원이란다. 날 때부터 북을 연주한 걸까. 웬걸, 처음 북채를 쥐게 된 사연이 엉뚱하다.
“초등학생 때 큰집 형들과 몰래 팝송을 들었거든요. 유독 드럼 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왔던 것 같아요. 어머니 화장품 통들을 나란히 세워놓고 연필로 두드리며 따라 하던 기억이 나네요.”
매일 학교를 다녀오면 엘피판에서 아버지가 좋아하던 창극 ‘이차돈’ 소리가 흘러나오는 집안에서 대중음악을 들을 기회가 귀했다. 반면 배 속에서부터 듣던 국악은 그저 생활이었다.
“고모님께 소리를 먼저 배웠어요. 그런데 변성기가 오니 고음 처리에서 목이 따라주지 않더군요. 내 갈 길은 리듬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본격적으로 북을 연주하기 시작했죠.”  
‘리듬의 길’은 외로운 길이다. ‘일고수 이명창’이란 말처럼 고수가 있어야 소리도 가능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늘 소리꾼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엔 소리꾼은 가마 타고 고수는 북 들고 걸어 다녔다고 하잖아요. 요즘엔 공부할 때도 예의범절이 기본이고, 고수가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지 다들 알아주긴 해요. 하지만 중요하면서도 베일에 가려지는 존재라서 허탈감이 있습니다. 공연 끝나면 다들 ‘소리 잘 들었다’고 칭찬하지, 우리 고수에게 와서 ‘북 진짜 좋았다’고 하지 않잖아요. 물론 전문가들은 ‘당신 때문에 소리가 살더라’는 얘기도 해주지만, 그 뒤로 옷 갈아입고 퇴장할 때의 외로움이란.  하지만 또 다른 창자와 무대에 서는 다음을 생각하며 외로움을 털어내곤 해요.”
주인공처럼 무대를 누빈 시절도 있었다. 부전공으로 설장구를 배우면서 모둠 북을 친 것이다.
“채향순의 서울가무악예술단에 들어가 꽹과리도 치고 징 춤도 추면서 드럼 못 친 한을 그때 풀었어요. 화려한 무용 의상을 걸치고 진하게 화장도 하고, 다양한 무용 장단도 많이 쳐보면서 배운 것도 많죠.”
화려한 생활에 젖어 살던 그를 흔들어 깨운 것은 박동진 명창이었다. 어느 해 전주대사습놀이 본선 대회에서 서울가무악예술단이 오프닝을 맡아 한바탕 즐기고 내려오는데,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박동진이 그를 알아본 것이다.
“박동진 선생님은 제가 판소리 집안 자손인 줄 알고 계셨으니까요.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다가 땀범벅이 돼서 내려오는 저를 부르시더니 욕을 퍼부으시는 거예요. ‘이놈아, 너 머리에 띠 매고 흔들면서 얼굴에 분칠하고 그럴 일이 아니다’라고요.(웃음) 가뜩이나 고수가 많이 없는데, 안타까우셨던 거죠. 판소리 집안에서 북으로 대를 이어나갈 놈이 한눈팔고 있다면서… 나중에 고모님 통해서도 엄청 혼이 났어요.”
‘리듬의 길’이란 외로울 뿐 아니라 어려운 길이기도 하다. “소년 명창은 있어도 소년 명고수는 없다”라는 말에도 심오한 뜻이 있다.
“고수는 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 여러 사람의 호흡을 다 아울러야 하죠. 매번 창자마다 호흡이나 특징, 스타일을 고수가 파악하지 못하면 공연이 매끄럽지 못하거든요. 단지 내가 북을 잘 연주하는 게 아니라 소리꾼을 얼마나 맞춰줄 수 있나 탐색하는 작업이 필요해요. 연습하면서 소리꾼이 ‘이 부분에 이런 가락이 들어갔으면’ 하고 원하면 그걸 다 맞춰줘야 하니까요. 항상 개발하고 연구해야 하는 입장인 거죠.”

 

 

소리에 ‘득음’ 있다면 북에는 ‘배려’

전주를 기반으로 정읍시립국악단·전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 등에서 활동하던 그가 2000년 국립창극단에 둥지를 튼 것은 안숙선 명창의 영향이 컸다. 전주에 공연하러 왔다가 우연히 그의 공연을 본 안숙선 명창이 전라도에서 활동하던 고수를 중앙 무대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는 “안숙선 선생님을 어머니처럼 생각한다”라고 했다.


“전라도에 안주해 있던 저를 선생님이 여러 차례 권유해서 창극단으로 불러주셨어요. 올라와서도 선생님이 진행하시던 KTV ‘안숙선의 소리마당’에 고정으로 활동하게 해주셨고, 수많은 경험을 선생님 덕에 할 수 있었죠. 지인들이 ‘텔레비전 틀면 나온다’면서 저더러 출세했다고 하더군요. 거의 재방송인데….(웃음)”
20여 년간 안숙선 명창의 그림자처럼 해외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돌면서 장단을 맞추다 보니 이제 두 사람은 리허설도 필요 없는 명콤비가 됐다. 
“언제부턴가 공연장에 가면 저랑 한번 맞춰보지도 않고 음향 튜닝만 되면 바로 무대에 서시더군요. 처음엔 불안했죠. ‘나를 어떻게 믿지?’ 싶고. 이젠 제가 미리 다 준비해 갑니다. 선생님 패턴을 다 파악하고 있으니까요. 선생님도 사람인지라 가끔 컨디션에 따라 사설을 건너뛰기도 하시는데, 그 생략하시는 패턴까지 알고 있으니 좀 피곤해 보이시면 제가 앞서서 끌어드리기도 하고요.”
창극단 생활이 처음부터 수월하진 않았다. 판소리와 창극은 장단이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처음엔 힘들었어요. 판소리 장단만 칠 줄 알았지 생전 처음 창극을 하게 됐으니까요. 창극은 우리 소리를 토대로 한 뮤지컬 같은 거잖아요. 소리와 극의 흐름에 맞춰 장단을 치는 게 잘 적응이 안 되더군요. 사실 국립창극단이 그동안 실험 차원에서 다양한 창작 작품을 많이 해왔는데, 기악부로서는 좀 거부반응이 있기도 했죠. 저희는 민속악을 한 사람들이라 정형화된 악보로 짜인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오늘 음악이 다르고 내일 음악이 다른 즉흥 음악 집단이거든요. 그런 사람들에게 창작 악보를 나눠주니 어색하죠. 지금요? 배우가 눈만 끔쩍 해도 알지요.(웃음) 바람이 있다면 예전처럼 기악부가 삼현육각으로 다 채워졌으면 해요. 전에는 기악부 발표회도 따로 있었는데, 그게 부활하는 게 소망이랄까요.”
판소리는 곧잘 ‘1인극’으로 정의되지만, 완창 판소리를 듣다 보면 하이라이트 대목에서 화려한 리듬 퍼포먼스와 함께 고수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게 바로 소리꾼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한 고수의 역할”이라고 했다.
“고수에겐 소리꾼의 컨디션 파악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뒤처져 따라가는 게 아니라 미리 알고 앞서 가주는 게 바로 고수임을 입증하는 겁니다. 두 발 앞서 파악하고 장단을 쳐줘야 소리꾼이 편하게 의지하고 가거든요. 우린 소리하는 사람의 디딤돌이에요. 무대에서 소리꾼이 의지할 수 있는 건 북 하나잖아요. 혹시 가사를 까먹으면 추임새로 받쳐주고, 재담 던지면서 긴장도 풀어줘야 하죠. 소리꾼이 사뿐히 밟고 갈 수 있게 디딤돌을 잘 깔아놓는 일이에요.”
그래서 명창에게 ‘득음’이 있다면 명고수의 경지엔 ‘배려’가 있단다. “고수는 배려할 줄 알아야 우뚝 설 수 있다”라는 것이다.
“‘춘향가’ 장단은 다 알지만 소리꾼마다 개성과 호흡이 다르거든요. ‘나도 문화재 이수자’라는 자존심은 내려놓고, 창자의 호흡을 파악해 맞추는 배려와 겸손이 가장 중요해요. 완벽의 경지요? 천만의 말씀이죠. 소리꾼은 ‘이만큼이면 명창’이란 게 있을지 몰라도 끊임없이 누군가의 호흡을 따라가야 하는 우리는 완성이 없는 셈입니다. 예컨대 어떤 명창의 북을 연주하고 박수를 받아도, 그다음에는 잘 안될 때가 있거든요. 그를 제대로 탐색 못 한 내 책임인 거죠.”
누군가의 호흡에 맞춰 누군가에게 발판을 놓아주는 일. ‘리듬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수십 년 세월에도 매일매일이 도전인 이유다. 어디 고수만 그럴까. 저마다 일상의 리듬을 타며 살아가는 우리의 길도 언제나 ‘ing’. 삶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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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유주현 ‘중앙SUNDAY’ 공연 담당 기자.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 황필주 Studio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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