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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6월호 Vol.365

수묵담채 위에 홍매화로 핀 사랑가

다시보기 하나 | 국립창극단 ‘춘향’

 

소리의 이면이 명징하게 와닿은 음악과 수묵담채화를 떠올리게 하는 무대와 안무. 소리의 깊은 힘으로 이끌어간 ‘춘향’의 현대적 변주는 참 싱그러웠다

 

‘춘향전’은 창극사의 전기轉機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1902년 설립된 협률사에서 김창환을 중심으로 창극화된 것이 ‘춘향전’이었고, 1962년 국립국극단(국립창극단의 전신)의 창단 공연도 ‘춘향전’이었으며, 2002년의 국립창극단 창단 40주년 기념 작품도 ‘성춘향’이었다. 그리고 올해 국립극장 창설 7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 또한 ‘춘향’이다. 특별히 코로나19로 인해 지친 사람들에게 그래도 봄이 왔음을 전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의 극본까지 쓴 연출가 김명곤은 1998년 완판장막창극 ‘춘향전’의 대본을 쓰고 연출도 했다. ‘춘향’은 ‘창唱’ 중심의 창극이 되리라 일찌감치 공언한 터라 만정 김소희를 올곧게 사사한 유수정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의 작창과 소릿속을 가장 잘 아는 김명곤 연출의 대본이라면, ‘극劇’보다 ‘창唱’을 중시하는 관객은 보통 이상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조합이다.
그런데 달오름극장에 들어서기 전까지 나는 두 가지 걱정을 안고 있었다. 아니, 걱정보다는 의심에 가까웠다고 해야겠다. 서사를 단축하고 도창을 없앴다는 정보가 하나요, 춘향과 몽룡의 첫날밤을 과감하게 표현했다는 소문이 또 하나였다. 도창의 존재가 극적 흐름을 방해한다는 목소리가 예전부터 있기는 했으나 그가 없으면 판소리의 좋은 더늠(아리아)을 부를 수 없게 된다. 창극의 음악적 본질에 연결된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사랑가’ 대목을 과감하게 표현했다는 기사를 보고 국립창극단의 2005년 ‘춘향’이 퍼뜩 떠올랐다. 당시에도 무대에 설치한 그네와 ‘사랑가’의 파격적인 애정 장면이 화제였다. 그네는 그때도 지금도 좋은 볼거리지만 당시 ‘사랑가’ 장면은 과감하기로 했음에도 정녕 과감하지 못했고, 관객은 그 조심스러운 시도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런 상황이 되면 어쩌나 했지만, 두 걱정 모두 기우였다. 의심하며 덤비는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어려운 일을 ‘춘향’이 해낸다.


수묵담채로 그리는 소리
‘춘향’의 무대를 한 마디로 비유하자면 수묵담채화라 할 수 있겠다. 먹색의 묵직한 바탕을 기본으로 삼되 그 위에 과하지 않은 채색으로 멋을 내는 수묵담채화가 생동하듯 펼쳐진다. 기본적으로 어두운 공연장 자체가 먹색 바탕이라면 그 위에 구현된 무대·조명·영상·의상까지 모든 장치로 파스텔 색감을 덧입혔다. 전통 한복의 진한 색도 아니고 익숙해서 식상한 색도 아닌 그 담채색을 두고 누군가는 ‘마카롱색’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다만 오직 춘향의 치마가 홍매화 꽃잎처럼 선홍색으로 도드라지게 빛날 뿐이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인 젊은이의 진취적 사랑을 상징하면서 수묵담채화의 화폭 안에서 가장 분주하게 맛을 내는 것은 조명이었고, 바탕이 된 것은 슬라이딩 유닛으로만 간결하게 구성한 한지 질감의 무대와 하늘거리는 샤 재질 천으로 만든 여려 겹의 막이었다. 소박하지만 역동적인 무대는 배우들의 활동 공간을 넉넉히 확보해 줬고, 막은 천변만화하는 조명과 영상의 붓질에 따라 장면마다 근사한 배경을 만들어냈다. 공연 시작 전에는 그저 빛바랜 분홍색 천이었는데 말이다. 음악도 돋보인다. 모순된 말 같은데, 돋보이지 않으려 한 작곡이 소리와 움직임의 감정을 극대화해 줬으니, 이걸 돋보였다고 할까 아니라고 할까. 북 장단을 기본으로 삼고 그 위에 신시사이저와 건반을 특별한 선율 없이 얹기만 해도 소리의 이면이 명징하게 와닿았다.

 

 

소리를 잘하니 도창이 필요 없다
멀지 않은 과거에도 판소리 애호가들은 창극의 음악성을 종종 비판했다. 연기에 몰두하느라 창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었다. 정통 판소리에만 열중하는 소리꾼들을 응원하거나 옹호하는 의도의 평가이기도 했으나, 주로 원로 명창이 맡는 도창이나 주역 배우의 눈대목 소리를 제외하면 창극 소리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요즘은 다르다. 국립창극단에는 가장 실력 좋은 소리꾼이 모여 있다. ‘춘향’에서 과감하게 도창을 뺄 수 있었던 하나의 근거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도창이 불러야 할 더늠을 배우들이 소화할 기량을 갖춘 것이다. 예컨대 ‘사랑가’의 앞부분은 구경꾼들이 불렀지만 충분히 분위기가 조성됐고, 그 사이 춘향과 몽룡은 설레는 첫날밤 감정을 고조시킬 수 있었다. 관객은 귀로 소리를 듣고 눈으로 두 사람을 주시하면서 무대 중앙으로 나가는 연인의 움직임을 자연스레 따라가게 된다. 또한 ‘어사출두가’는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돼 있지만, 절정 부분을 당사자인 몽룡이 불렀어도 자연스러웠다. 몽룡 역 김준수의 장기 중 하나가 어사출두 대목이니, 여느 도창자보다 더 잘 살릴 수 있었다고 본다.
서사도 매우 빠르게 전개됐는데, 그 속도감의 주된 방향은 젊은이의 순수하고 거침없는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있다. 시작부터 이전과는 다르다. 몽룡이 남원 구경을 나왔다가 춘향을 발견하고 수작을 거는 기존의 흐름 대신, 한껏 들뜬 단오축제에서 그네 타는 춘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사의 압축 면에서 가장 과감하면서도 성공적인 것은 ‘십장가’ 대목이다. ‘춘향’에서는 춘향이 장을 다섯 대 맞을 때까지만 십장가를 부른다. 여섯 대부터는 연이어 맞고 곧장 혼절한다. 주목할 것은 그 참혹한 광경 뒤에 몽룡이 과거 시험을 보아 급제하는 과정이 함께 연출된다는 점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에 각자의 상황에 처해 있으나 관객은 각각의 장면을 한눈에 보면서 감정의 배가를 느낀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축약은 처절함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춘향의 고난을 최소한의 시간으로 줄여놓는다. 소식 없는 낭군을 오매불망 기다리기만 하는 춘향의 수동적 이미지도 한층 옅어진다. 몽룡이 써준 혼인 증서를 그 자리에서 박박 찢었으며, 군로사령이 잡으러 왔을 때도 실랑이 없이 당당하게 앞섰던 2020년의 춘향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을 부여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고 답답하다 여겼기 때문이리라. 원전을 훼손하지는 않되 춘향의 진취적 성격 형상화에 일조한 구성이라 하겠다.

 



오래도록 회자될 ‘사랑가’
가장 눈여겨볼 만한 장면은 단연 ‘사랑가’ 대목이다. 새롭게 잘 짠 소리뿐 아니라 무대·조명·영상·의상·음악, 거기에 안무까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조명은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인물의 감정 변화에 따라 색감을 달리하는데, 그 파스텔 톤의 은근한 빛이 무대 가득 쏟아지는 별빛 영상 안에서 두 사람의 두근대는 심장을 따라다닌다. 겉옷을 벗어 몸이 가벼워진 춘향과 몽룡은 다정한 춤으로 사랑을 확인한다. 열여섯 어린 연인의 발랄한 애정이 부담 없는 흐뭇함을 자아낸다.
사설 또한 알아듣기 어려운 ‘목난무변 수여천의 창해같이 깊은 사랑, 사모친 정 달 밝은 데 무산천봉 완월 사랑’이 아니라 ‘몽룡: 출렁이는 물결 위에 바다같이 깊은 사랑, 춘향: 사무친 정 달 밝은 데 태산같이 높은 사랑’으로 쉽게 바꾸어 화답하며 부른다. 그렇듯 한참 업고 놀다가 춘향이 ‘둥둥둥 내 사랑’으로 시작하는 기쁨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달빛 스포트라이트가 두 사람에게 쏟아진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별이 찾아오고 무대는 창백한 푸른 안개에 휩싸인다. 아무 장식도 없는 네모난 오리정 세트 위에서 부르는 춘향의 ‘이별가’ 또한 절창이다.
무대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조화를 잘 이루는 이 수묵담채화는 앞으로 많은 곳에서 참고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랑가’ 대목은 한 편의 아름다운 뮤직비디오처럼 ‘춘향’을 대표하는 콘텐츠로 회자될 것을 확신한다. 달오름극장에 들어서며 가졌던 나의 걱정과 의심, 돌이켜 보니 어느새 아예 잊고 있었더라.

 

이태화 일제강점기의 판소리 문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든 전통예술 공연장이 문전성시가 되는 날이 다시 오기를 기대하며 공부한다

 

국립창극단 ‘춘향’
2020년 5월 14~24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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