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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호 Vol.359

공력 있는 소리로 지새우는 송년의 밤

국립극장 송년판소리 안숙선의 수궁가-정광수제

 

2019년의 끝자락, 안숙선 판소리의 정수가 스민 토끼와 별주부의 기략 다툼을 들으며 귀를 밝혀본다.

 

 


이 시대 제일가는 명창을 꼽으라면 누구나 안숙선을 떠올릴 것이다. 대중적 인기에서도 그렇지만 그이가 쌓아온 소리 길의 진정성 때문에 이 같은 평가는 자연스러워졌다. 안숙선은 맑으면서도 곰삭은 성음, 명료한 발음, 한국적 몸짓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해내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명창으로 상징된다. 질러내는 소리는 가슴이 아릴 정도로 호소력 있으며, 적당히 쉰 목소리는 그이의 판소리 공력을 짐작하게 한다. 부채를 펼친 자태도 기품이 있고, 우아한 발림도 아름다워서 작은 체구로 온 무대를 휘어잡는다.
안숙선 명창은 남원 출신이다. 전통음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전통예술을 가까이했고, 판소리와도 익숙했다. 안 명창은 ‘흥부가’의 대가 강도근 명창에게 배우며 소리에 입문했다. 그리고 50대가 돼 또다시 강도근 선생을 찾아, 어린 시절 배운 그 ‘흥부가’를 공부했다.
20대 초반 서울에 온 안숙선에게 가야금과 판소리를 가르친 이는 박귀희 명창이다. 안숙선은 박귀희 선생을 회고하면서, “내게 공기 같은 존재셨다. 예술에 대한 열정과 국악인에 대한 사랑이 넘쳐났고, 항상 편안하게 대해준 스승이다”라고 말했다. 국악계에는 한번 맺은 사제 관계는 평생 지속된다는 암묵적 질서가 있다. 박귀희 명창은 안 명창이 판소리 재목임을 알아채고, 소리 연마를 위해 김소희 명창에게 보냈다. 안 명창은 김소희 명창에게서 만정제 ‘춘향가’와 ‘흥부가’를 배웠다. 김소희 명창은 단정하면서도 엄격한 분으로,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 안 명창이 가진 우아하고 기품 있는 소리의 토대가 됐다. 안숙선은 박봉술 명창을 찾아 동편제 ‘적벽가’도 배웠다. 당시만 해도 ‘적벽가’의 텍스트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전쟁과 영웅들의 세계를 한문투로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여류 명창들이 배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박봉술 명창이 펼쳐 보이는 동편제 특유의 웅장함에 매료돼 특히 애착을 가지고 배웠으며, 성우향 명창에게서는 ‘심청가’를 배우며 자신의 소리 세계를 확장하며 완성해왔다.
‘수궁가’는 1990년대 말, 정광수 명창에게서 배웠다. 필자는 민속음악 연구의 개척자인 이보형 선생을 따라 굴레방다리 아래에 있는 4층 건물의 정광수 명창 학원으로 면담 조사를 간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정광수 명창에게 ‘수궁가’를 배우고 있던 안숙선의 모습을 보았는데, 막 50대에 들어선 안 명창이 일흔을 훌쩍 넘긴 노대가 정광수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는 장면은 아직도 내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수궁가’ 예능 보유자 정광수 명창은 소리 경력은 물론 판소리 사설에 대한 이론이 해박한 것으로 유명했다. 소리에 관한 이론이 정연했고, 이면의 표현에 엄격했다. 우아한 발림도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학원 벽에는 큼지막한 서예 작품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욕심을 털어버리고 예술에만 정진하라.” 정광수 명창이 지어 걸어놓은 한시였다.
정광수제 ‘수궁가’의 본바탕은 유성준제다. 동편제를 고집한 유성준 명창에게서 1920년부터 ‘수궁가’를 배운 이들로는 김연수·임방울·정광수 명창 등이 있다. 정광수는 유성준제 ‘수궁가’를 가장 동편제답게 전승한 명창이다. 한학에 밝고 유식해 기왕의 판소리 사설 가운데 잘못 전승된 것은 고치고, 표현도 격식 있게 다듬었다. ‘수궁가’는 조선 후기의 정치 현실을 우화적으로 풍자한 작품이다. 힘은 없으나 살아가는 지혜를 갖춘 토끼로 대변되는 민중과, 탐욕적이고 부도덕한 용왕 및 별주부로 대표되는 지배층 사이의 갈등이 우의적으로 잘 그려져 있다. 통쾌한 정치 풍자가 일품이어서 특히 남성 판소리 애호가들에게 인기였다.
송년판소리 ‘안숙선의 수궁가-정광수제’에서 안 명창은 세 명의 제자 이선희·남상일·서정민과 함께 한 바탕을 완성한다. 먼저 안 명창이 수궁가의 ‘초압’부터 선의도사가 용왕의 병을 진단하는 ‘약성가’까지 부른다. ‘약성가’는 가장 까다로우면서도 ‘수궁가’의 매력을 오롯이 담고 있는 노래다. 소리꾼 이선희가 수궁의 ‘어전회의’ 대목을 중심으로 소리를 이어가는데, ‘토끼화상’과 별주부가 맞이하는 육지 세상의 경이로움을 그려내는 노래, ‘고고천변’ 대목을 집중해 들어보자. 남상일은 육지 짐승들이 벌이는 ‘상좌다툼’ 대목부터 별주부가 겁 많은 토끼를 업고 수궁으로 떠나는 장면까지 노래한다. ‘녹수청산’과 별주부가 토끼의 신세를 직설하는 장면은 그의 기량을 확인할 좋은 대목이다. 서정민은 ‘범피중류’부터 ‘토끼가 수궁을 탈출하는’ 대목까지 부른다. ‘좌우나졸’과 ‘토끼 배 가르려는 장면’이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안숙선 명창이 이어받아 정광수제 ‘수궁가’를 완결한다. 토끼는 수궁을 탈출해 육지로 살아 돌아오지만, 육지 세상에는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덫에 걸린 토끼는 초동들의 손아귀를 재치로 벗어나나, 까불다가 다시 독수리를 만나 죽을 지경을 맞는다. 토끼에게 닥친 위기와 극복의 과정을 재담과 소리에 담아서 흥미롭게 이어가는 후일담 대목은 ‘수궁가’를 듣는 또 다른 재미라고 할 수 있다.
북 반주는 김청만·조용수·조용복 명고수 세 분이 맡는다. 김청만 명고는 소리북의 예능 보유자로서, 소리꾼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화려한 기교가 특히 주목되는 분이다. 조용수 명고는 국립창극단에서, 조용복 명고는 국립국악원에서 타악기 연주자로 활약하고 있다. 안 명창은 지난 2010년 이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2월 말, 완창판소리를 진행해왔는데, 이는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애초에 12월 31일 밤 9시에 시작해 공연을 마치면 새해가 되는 제야판소리로 시작했다면, 이제는 한 해를 보내는 송년판소리로 자리 잡았다. 완창판소리를 듣는 귀한 시간으로 한 해를 정리하며 마무리하는 뜻깊은 무대가 될 것이다.


유영대 고려대학교 교수.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지냈으며, 현재 무형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립극장 송년판소리 ‘안숙선의 수궁가-정광수제’
날짜 2019년 12월 28일
장소 국립극장 하늘극장
관람료 전석 3만 원
문의 국립극장 02-228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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