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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호 Vol.357

대자연과 무용, 화합의 무대

전통 예술 기행┃조지아의 전통춤

드높은 산맥과 광활한 풍광을 배경으로 견고히 토대를 다져온 춤과 음악. 자연과 함께 끝없는 상상과 풍부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최근 코카서스 3국으로 알려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조지아에 여행자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나라 중 코카서스의 장관을 직접 경험하고 싶다면 조지아 여행이 제격이다. 산을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히말라야가 있는 네팔이나 알프스가 있는 스위스뿐 아니라 조지아도 한 번쯤 가볼 만하다. 작년 여름, 나 역시 트레킹에 기대를 품고 조지아로 여행을 떠났다. 우리나라 관광객을 포함해 유럽·구소련 등 여러 나라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직항이 없어 러시아의 모스코바나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해서 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천에서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Tbilisi까지 15시간 이상, 경우에 따라 20시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큰맘을 먹고 가야 할 것 같지만 별생각 없이 떠나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멋진 대자연, 오래된 도시의 건축물, 친절한 사람, 저렴한 숙소와 음식, 게다가 독특한 춤이 기다리고 있으니.
조지아는 주변국의 지배를 받아온 작은 공국들이었다가 20세기 초 처음으로 공화국이 됐다. 그러나 곧바로 소련의 지배하에 놓였고 소련 해체 이후에야 독립 국가로 자리 잡았다. 이런 연유로 조지아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오래되지 않은 만큼, 조지아에 관한 상식은 ‘스탈린의 고향’ ‘와인의 발상지’ ‘코카서스 산맥을 끼고 있는 나라’ 정도가 대부분일 것이다.
조지아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야 우연히 알게 된 것 중 하나로, 발레 안무가 게오르게 발란친George Balanchine이 조지아 사람이라는 사실도 덧붙일 상식이 되겠다. 게오르게 발란친을 막연히 구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안무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뉴욕시티 발레를 세계적인 무용단으로 만든 그의 신고전주의 작품들의 배경에는 조지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조지아는 구소련 국가 중 음식이 가장 맛있는 곳이라고 한다. 식자재와 조리법이 다양해 식도락에 적격인 점은 인정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고수를 못 먹는 입맛을 가진 바람에 여행 내내 고수를 건져내느라 손이 바빴다. 조지아는 트빌리시를 제외하고 교통·편의시설 등이 미비한 편이나, 조금의 불편함보다는 소박하고 정겨운 조지아 사람들의 일상이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다.

 

 

트레킹 거점 도시 메스티아

 

자연과 더불어 만나는 폴리포니 가창
조지아의 여행지 곳곳에서는 배낭을 멘 여러 나라의 여행자를 만날 수 있다. 트레킹 코스가 다양해 텐트와 조리 도구를 챙겨 다니는 사람부터 숙소에 짐을 두고 가볍게 1일 코스로 산행하는 사람까지 가지각색이다. 이곳의 산은 대부분 해발 3,000미터 이상이며 크고 웅장해 산행이 만만치 않다. 땀에 젖어 힘겹게 오르는 산,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는 비록 “얼마만큼 더 가야 해?” “거의 다 왔어. 힘내자”와 같은 뻔한 것이지만 다들 따듯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 산을 오르는 내내 무척 행복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계속 이어진다. 그 높은 산 정상에서 소와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영화 같은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언젠가 들었던 “산에 가는 이유는 산이 거기 있어서”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 것만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계속 그 풍광이 아른거려 또다시 조지아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트레킹의 거점 도시가 몇 군데 있는데 그중 메스티아Mestia가 단연 인기다. 메스티아는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1,500미터의 작은 도시다. 이곳에서 여러 날 지내며 산행도 하고 카페에 앉아 조지아 와인을 마시며 그저 산과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자주 가던 식당에는 저녁마다 지역 예인들의 전통음악 공연이 열렸다. 독특한 선율, 다채로운 리듬 그리고 여러 사람이 만들어내는 화음이 놀라웠다. 게다가 무반주로 섬세하고 복잡한 화음을 완벽하게 노래했다. 조지아의 폴리포니 가창은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돼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폴리포니 가창의 영향인지 지역 민속음악에 이어 여행 중 들렀던 조지아 정교회 성당 아카펠라도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이 나라에는 이른바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메스티아의 식당에서 본 공연은 민속적인 색채가 강한 음색과 창법을 보여줬다. 기교 없이 내지르는 창법이어서 마치 산에서 저 멀리 누군가에게 외치는 소리 같았다. 그 느낌이 참 좋아서 트빌리시의 벼룩시장에서 조지아 전통음악 음반을 몇 장 사 왔는데, 집에 와서 들어보니 그때 들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구소련 연방국가였던 조지아 역시 적군 합창단Red Army Choir 같은 소련식 앙상블 공연을 보편화한 까닭인지 성악 발성으로 이뤄진 합창이었다. 산촌 아저씨들 특유의 합창을 듣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언젠가 또 가는 수밖에.

 

 

칼과 방패를 이용해 싸우는 모습을 표현한 춤 동작

 

온전한 힘으로 놀라운 기술을
트빌리시에서 운 좋게 조지아 전통춤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수키슈빌리 조지아 국립무용단Sukhishvili Georgian National Ballet의 야외 무료 공연이 여름 시즌 동안 도심의 한 공원에서 열렸다. 조지아 전통춤을 무대화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무용단이라고 한다. 야외 간이무대가 불편했을 텐데도 뛰어난 집중력으로 다채로운 레퍼토리의 무용을 선보였다.
조지아 전통춤은 기본적으로 매우 기교적이다. 웬만한 훈련으로는 흉내도 내지 못할 기교로 구성된 춤이 대부분이다. 특히 남성의 역동적이고 아슬아슬한 기교 과시가 대단하다. 반면 여성의 춤은 긴 치마를 입고 발뒤꿈치를 든 채 귀신처럼 미동 없이 이동하는 동시에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우며 우아한 선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남성 춤에 비해 가시적인 기교는 덜한 편이다. 남성 춤은 높은 도약, 빠른 회전, 크고 힘이 넘치는 선을 강조한다. 보면서도 차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고난도 기교였다. 무릎으로 뛰고 착지하는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저런 묘기를 딱 한 번 보여줄 거라 예상했는데, 연속으로 무릎으로 뛰고 돌며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무릎 보호대를 하더라도 상당한 충격이 갈 만한 동작이 계속되는데, 심한 감정이입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무릎을 주무르면서 봤다. 그뿐이랴, 발가락으로 서서 춤을 춘다. 짧은 시간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발레 토슈즈나 나막신처럼 특수한 신발을 신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발가락으로 지탱해 춤을 춘다. 마찬가지로 박자가 빨라지면 뱅뱅 돌고 뛰며 다양한 동작을 소화한다. 우아한 남녀의 춤 콩가Khonga, 기병들의 춤 므케드룰리Mkhedruli, 양치기의 춤 칸즐루리Khanjluri, 상인의 춤 킨토우리Kintouri 등에서 이 놀라운 기술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칼과 방패가 등장하는 레퍼토리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케브수룰리Khevsuruli와 파리카오바Parikaoba는 칼과 방패를 이용해 싸우는 모습을 형상화하는데, 그저 무술을 이용한 동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전쟁을 치르는 군인들처럼 온 힘을 다해 내려치고 막으며 대결을 이어간다. 속도감과 에너지가 엄청나다 보니 칼과 방패에서 불꽃이 일어난다.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해도 단 한 번만 동작과 박자를 놓친다면 사고가 날 만한 장면들이다. 얼마나 연습했을까, 상상도 되지 않는다.
공연을 보고 난 후 여러 생각이 들었다. 우선 어떤 방식으로 훈련하는지 궁금했고, 다음으로 무용수가 추구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남성 춤의 호전적인 대결 구도는 일반적으로 중세부터 오랫동안 지속된 외세의 침략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극한의 신체 기교로 상대방을 기선 제압하고자 했던 태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지아를 지배했던 러시아·터키·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등 주변국의 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하지만 높고 험준한 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이 자연을 극복하며, 또 자연과 닮아가며 사는 그 특별한 삶이 춤에 투영된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는 이곳 무용수들은 무대에 설 수 있는 기간이 길지 않을뿐더러, 쉽게 설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젊은 시절 동안 무대에서 모든 열정을 쏟는 이곳 무용수들에게 춤이란 그 자체로 화양연화가 돼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기술로 이런 과격한 춤을 추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웠다. 무릎과 발가락으로 점프를 하다니, 클래식 발레에 자주 등장하는 푸에테Fouette 32회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배워도 해내기 힘든 기술일 것이다. 아직 조지아의 전통춤이 폭넓게 소개되지 않아 나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해결할 자료가 많지는 않았다. 앞으로 더 자주, 자세히 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춤과 노래, 그리고 산이 궁금해서 아무래도 조지아 여행을 조만간 또 가게 될 것 같다.


허유미 안무가이자 춤 칼럼니스트. 저서로 세계 춤 기행 ‘춤추는 세계’가 있으며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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