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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호 Vol.357

국립무용단 송설

VIEW┃예술가의 초상

오전 연습이 끝나자마자 달려왔다는 그는 땀으로 목욕을 한 상태였다. 옷이 다 젖어 있었지만 지친 기색도 없이 기분 좋게 수다를 시작했다.


 

송설이 흘린 엄청난 땀은 명절 기획 시리즈 ‘추석·만월’ 연습에서 나왔다. 김명곤 연출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아 초연과는 프로그램이 확 바뀌었고, 송설은 새로 들어간 무당춤 ‘기도’에서 역동적인 솔로를 맡았다. “오전에 한 후배가 형 죽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숨이 차서 입술이 까매질 정도였거든요. 배정혜 선생님의 ‘기도’를 재안무한 건데, 매우 역동적인 춤이에요. 그런데 ‘추석·만월’ 같은 전통춤 모둠 공연을 관객들이 좋아하세요. 추석 때 누가 공연을 보러 오나 싶었는데, 가족 단위로 많이들 오셔서 추임새도 넣어주시고요.”

 

 


송설은 지금 ‘극한 다이어트’ 중이라고 했다. 10월 초 공연되는 ‘회오리’를 위해서다. 공연의 막을 여는 샤먼 역으로 무음 상태의 조용한 무대에서 순백의 의상을 입고 온갖 조명을 홀로 받으며 독무를 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빨가벗고 혼자 선 느낌”이란다.
2014년 국립무용단 최초로 외국인 안무가를 기용해 초연 당시 엄청난 화제를 일으킨 ‘회오리’는 세계 무대에 진출해 호평받으며 수차례 공연된 대표 레퍼토리다. 하지만 공연마다 버전이 달라 늘 새로운 느낌이라고. 이번 공연을 위해서도 안무가 테로 사리넨이 다녀갔단다.
“해외 투어까지 치면 무대에 선 것만 10번이 넘는데, 매번 달라요. 테로가 늘 새로운 걸 요구하고, 제 스스로 원래 즉흥적인 면도 많죠. 특히 제 솔로는 순서 짜놓고 하는 건 절반도 안 돼요. 부채 모양 바지에 달린 마이크로 소리를 만드는 게 중요한데, 조건이 일정하지 않으니 즉흥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테로에게 초연과 최근 공연 영상의 순서가 완전 다르다고 하니, 이번에도 그냥 새로 하자고 하더군요.(웃음)”
‘회오리’에 대해 그는 “제일 힘들었고 제일 열심히 한 공연”이라고 기억했다. 외국인 현대무용가의 동작도 낯설고, 공연에 변수도 많아 처음엔 안무가와 “확 부딪칠 뻔했다”라는 것이다.
“의상의 한계 때문에 테로가 짜준 대로 동작이 잘 안 되는 거예요. 마이크 소리가 안 날 때도 있었고요. 그런데 테로 입장에선 왜 정해진 안무대로 안 하는지 궁금했나 봐요. 직접 의상 입고 한번 해보라며 고충을 털어놨죠. 다행히 테로는 저를 이해해줬고, 너를 믿으니 내가 원하는 에너지만 객석에 전달해달라며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동작이 중요한 게 아니라면서요. 이제 매번 동선과 동작을 조금씩 다르게 해야 뿌듯해요. 전날 하던 대로 하고 나오면 너무 찜찜하죠. 사람이 딴짓할 때 재밌잖아요.(웃음)”
‘회오리’ 이후 한국무용계는 눈에 띄게 변화하고 있다. 초연 당시 전통무용계로부터 “한국춤 맞느냐”라는 지적도 받았지만, 조명?영상?의상 등을 세련되게 활용한 한국무용 공연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초연 때 예비 장모님이 보러 오겠다고 하셔서 걱정했었죠. 연세가 있으시니깐 이런 이지적이고 심오한 작품을 재미없어하실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반응이더군요. 음악·무대·조명 모두 세련되고 정말 재밌었다고요. 아마도 이때부터 무용계에 변화가 오지 않았나 싶어요.”
그는 ‘뻔한 춤’으로 인식되는 한국무용이 사람들을 궁금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래야 ‘회오리’를 비롯해 프랑스 안무가 조세 몽탈보가 안무한 ‘시간의 나이’,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가 연출한 ‘묵향’ ‘향연’처럼, 국립극장을 찾지 않던 새로운 관객을 발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춘상’ 때는 제가 조안무였는데, 사람들이 궁금해하더군요. 도대체 가요에 맞춰 어떻게 한국춤을 추느냐고요. 그런데 이런 작업을 하면 할수록 유연하게 흡수하고 섞여야겠다고 느껴요. 무용만으로는 주목받기 쉽지 않잖아요. ‘묵향’이 끝나고는 20여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어요. 처음 보는 사람이 대기실에 찾아왔는데, 포항에서 같이 학교 다닌 친구더군요. 동국대학교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는데, 정구호 선생님이 연출한다길래 한 달 내내 이 공연만 기다렸다는 거예요. 바로 아래 동국대에 있으면서 한 번도 국립극장에 온 적이 없었다는데, 그때부터 저희 공연은 꼭 보러옵니다. 우리 공연을 보면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고, 의상 보는 재미에 온다고 해요. 정구호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그 친구가 한국무용을 봤겠나 싶어요.”

 

 

 

“사람은 딴짓할 때 재밌잖아요.”
송설은 엄청나게 유쾌한 캐릭터였다. 예술가 특유의 까칠한 느낌은 시쳇말로 ‘1’도 없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모난 데 없는 첫인상 그대로,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드는 좋은 기운만 뿜어댔다. 소싯적엔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무척 날씬했다니, 포항 영일만을 주름잡았다는 화려한 과거가 충분히 납득갔다. 그의 화려한 과거는 중학교 시절 친구 집 옥상에서 시작됐다. 당시 원조 아이돌 H.O.T.의 춤을 따라 추면서다.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애들이 카세트 틀어놓고 춤을 추고 있었어요. 구경하다가 따라 하게 된 거죠. 춤이 참 재밌었어요. 포항의 유명 댄스팀 ‘에이블’에 들어가 대회도 많이 나가고, 문화부장관상까지 받았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땐 제가 리더였는데, 그동안 ‘에이블’이 상을 너무 많이 타니까 이제 잘 안 주는 분위기라 ‘영일만친구들’이란 팀명으로 나갔더니 대상을 주더군요.(웃음)”
춤에 배신도 당했다. 현대무용을 전공하기 위해 다니던 무용 학원에서 받은 상처로 무용에 대한 반항심에 불타게 된 것이다. 그 상처를 치유해준 것이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한국무용가 신혜경이다.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학원비 4개월치가 밀렸었어요. 학원장이 병원에 계신 아버지한테 전화를 한 거죠. 아버지가 무척 속상해하시면서 무용을 그만두라셨어요. 그 후로 무용 쪽은 쳐다보지도 않겠다 결심하고 막 살았어요. 사고 치고, 경찰서 출입하고. 춤을 안 추니 살이 엄청 쪘죠. 그걸 보고 우리 스승님이 쟤 무용하던 애가 왜 저렇게 됐느냐고, 한 번만 데려오라고 하셨대요.(웃음)”
처음엔 한국무용을 하라기에 질색했지만, 동아무용콩쿠르 영상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한국무용은 승무 같은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요새 한국무용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라면서 비디오를 틀어주셨어요. 최진욱 선배를 비롯해서 너무 멋있더군요. 학원비 낼 돈이 없다고 하니 스승님 말이 ‘너한테 돈 달라고 안 했다’는 거예요. 놀던 거 딱 접고, 타이즈 입고 유치부 발레부터 시작했어요.”
스승이 학원을 수원으로 옮길 때 함께 올라왔다. 학원에서 원생들 등·하원 도우미를 하고 숙식을 해결하며 무용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인터뷰 내내 유쾌하던 송설이 신혜경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말하자 커다란 눈망울이 금세 촉촉해졌다.
“선생님이 저 따뜻하게 자라며 학원 바닥에 전기 장판도 깔아주셨어요. 이런 얘기하면 괜스레 눈물이 나요. 어제도 생신이라 전화드렸는데, 선생님 안 계셨으면 전 무용 못 했을 거예요. 제 공연은 그냥 좋다고만 하시고, 매번 힘이 돼주세요. 제자들 100명씩 데려와서 제 공연도 보여주시고요. 평생 은인이죠.”
2011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한 그는 지난 9년 동안의 공연 중 2013년에 무대에 올린 ‘춤, 춘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무용 공연에 대한 새로운 깨침이 있었다는 것이다.
“제가 2007년, 대학교 4학년 때 객원으로 ‘춤, 춘향’ 포졸 4번으로 왔었거든요. 그때 국립무용단에 대한 꿈을 꿨던 것 같아요. 이정윤·조재혁 선배가 이도령이고, 최진욱 선배가 사또였는데, 진짜 멋져 보였죠.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춤을 추나 싶고. 2013년 막상 제가 사또를 맡았는데, 그렇게 힘든 건 처음이었어요. 의상, 분장도 무거운데 동작도 많아서 나중엔 다리가 안 떨어질 정도가 됐죠. 열심히 했고 반응도 좋았는데, 안무가인 배정혜 선생님께서 첫 공연 커튼콜에 표정이 별로인 거예요. ‘2프로 부족했다’는 느낌?”
고민 끝에 전화를 걸어 어떤 면이 부족했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간결했다. “나도 관객이잖아~ 안 봤던 거 보게 해줘~.” 이 한마디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고.
“다음 날은 제 맘대로 했어요. 기생점고 장면에서는 막 누나들 치마를 걷으니까 누나들은 뜬금없는 상황에 난리가 났죠. 정작 커튼콜 때 배 선생님은 최고라며 박수 치면서 올라오시더군요. 동작 훈련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가 독특한 경험을 한 거죠. 배정혜 선생님을 좋아하는 이유예요. 정말 생각이 깨어 계시거든요. ‘나도 관객이잖아~’. 지금도 그 목소리가 기억나요.”
지난해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직접 안무한 작품 ‘민속무용’을 올리기도 한 그는 “쉬운 무용을 하고 싶다”라고 했다. 무용이 어렵다는 편견을 깨고 싶기에, 개인적으로는 재밌는 춤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작년에 2주 정도 짧게 준비해서 1시간짜리를 만들었는데, 객석이 가득 찼고, 심지어 관객 몇 명이 공연장에 못 들어왔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어요. 보러 오신 분들은 재밌었다고, 또 했으면 좋겠다고들 하셨죠. 제가 가르친 남자 무용수 7명만 데리고 창작한 작품인데, 외국인들도 기립 박수 치며 좋아하고, 평론가들도 재밌었다면서 평도 잘 써주시더군요. 무용이란 게 너무 어렵지 않았으면 해요. 진짜 좋은 춤을 보면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 되지 않나요.”
‘설명할 순 없지만 어느 순간 저절로 몸이 들썩이는 춤.’ 송설은 그런 춤의 정체를 알고 싶다고 했다. 춤의 순수한 본질이란 기분이 좋아지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어떤 춤이 기분을 좋게 만드느냐고? 한 시간 반 내내 유쾌한 그를 보니 답이 빤히 보였다. 좋은 사람이 즐겁게 만들어 추는 춤이 보는 사람의 어깨까지 들썩이게 하는 것 아닐까.

 
유주현 ‘중앙SUNDAY’ 공연 담당 기자.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진 공간 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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