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짧아서 더 좋은 것들이 있다. 혹시 국악 관현악은 어렵고 지루할 거란 생각이 든다면, 여기 국악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무대가 있다. ‘3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국악을 제대로 짜임새 있게 들어볼 기회다.
국악관현악단은 작품이라는 공공재를 생산하는 공장과도 같은 기능을 한다. 그리고 하나의 광장(무대)을 통해 작곡가와 관객을 이어준다. 이러한 생산 작업은 악단이 작곡가에게 ‘위촉’이라는 신호를 보내며 시작한다. 위촉이 작품의 창작·연주·감상·비평이라는 행위를 낳게 하는 씨앗인 것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도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씨앗 삼아 위촉의 씨를 뿌려왔다. 창단 20주년을 맞은 2015년 공연된 ‘2015 리컴포즈: 경계의 확장’에선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씨앗을 받은 작곡가 김택수와 김성국이 각각 의미 있는 열매를 내놓았다. 한국음악을 양 갈래로 나누는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장르성’ 자체가 위촉의 콘텐츠가 된 것이다. 2016년 ‘2016 마스터피스’ 공연에서는 국악 관현악 역사에서 고전이 된 여섯 작곡가의 ‘예술관’을 위촉의 내용물로 삼았다. 김기수·김희조·이강덕·이성천·백대웅·이상규는 현존하는 여섯 작곡가를 통해 관객과 소통했다. 이렇듯 위촉은 작품의 밑그림이 되고, 보이지 않는 디자이너 역할을 한다. ‘3분 관현악’은 짧은 분량이지만 개성 강한 곡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다른 시작점이라면 위촉의 ‘스타일링’이었다.
창작 이전의 위촉부터 스타일링
젊은 작곡가 열 명에게 위촉의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는 내용·주제·표제가 아니라 ‘3분’이라는 시간이었다. 기존 국악 관현악 작품의 분량이 대개 10분 이상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3분’은 토막에 불과하다. 짧고도 적으며, 심지어 모자라게도 다가온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토막에 기승전결이 담기는 시대다. ‘짧다’가 ‘깊이 없다’라는 뜻으로 통용되던 시대는 지났다. 단편으로 출간한 소설 들을 하나로 엮어 장편화하는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더 짧은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한다. 긴 영화를 리뷰하는 유튜브 크리에이터에게 ‘창조’란 ‘무’에서 ‘유’로의 생산이라기보다 ‘압축’과 ‘요약’이라는 행 위를 뜻한다. 즉 시간과의 싸움인 것이다. 생산의 지형도가 이렇게 되니, 대중의 감상 방식도 이와 닮아가고 있다. ‘짧은 분량’ 자체가 일종의 콘텐츠가 된 것이다. 그래서 ‘짤방’이라는 말은 은어를 벗어나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용어가 됐다. 심지어 ‘3분 소설’ ‘3분 공연’을 내세운 콘텐츠도 접할 수 있다.
‘3분 관현악’은 국악 관현악 작품 위촉을 3분으로 디자인한 결과다. 처음에 작곡가들은 ‘작은 그릇’에 소리를 담아달라는 주문을 듣고 당황 했던 게 사실이다.
다양성 살리기 위한, 분량 절약
위촉은 열 명의 작곡가를 행복하게 했지만, ‘3분’은 차도의 과속 방지 턱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그 시간 앞에서 속도를 스스로 늦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위촉 당시 그 심정에 대해 이고운은 “한 가지에 집중해 야겠다. 정말로 딱 한 가지에”, 정수연은 “관현악이라는 큰 덩치를 ‘3분’에 어떻게 담을 것인가? 덜어내고 또 덜어내야겠다”라고 고백했다.
이에 대해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김성진과, 이번 공연의 프로그램 디렉터로 참여한 필자는 ‘3분 충분설’을 내세웠다.
첫째, 작품 발표를 위한 기회의 확장이다. 20~40대 젊은 작곡가들은 ‘창작’보다는 ‘편곡’이라는 재생산 행위를 통해 관현악단과 호흡하는 추세다. 젊은 작곡가들이 본업보다 아르바이트가 주가 되는, 즉 ‘아프 니까 청춘이다’가 아닌 ‘편곡하니 청춘’인 셈. 그런 그들에게 자신의 소리와 언어를 적확히 담아보라는 정당한 기회를 제공했다. 게다가 각 ‘3 분’이라는 전제가 있으니, 더 많은 이들이 함께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 됐다. 각 10~15분 분량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무대였다.
새로운 감상 방식과 작품 창작 노선
둘째, 시대적 문화상의 반영이다. 상기한 바와 같이 문화 소비자(관객) 는 짧고 굵은 콘텐츠에 걸맞은 감상 방식을 갖고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국악 관현악의 역사는 이러한 진화의 길과 같은 궤도를 걷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에게 3분에 맞춰 세공된 관현악 작품은 어떻게 느껴질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짧고 굵게, 진하고 강하게 맛보고 빠질 수 있다는 안도감’을 제공해 국악 관현악 감상에 대한 부담감을 낮추고 싶었다.
셋째, 작품 생산을 위한 새로운 전초가 될 것이다. 서울시오페라단이 선보여온 ‘세종 카메라타’가 이에 대해 좋은 선례다. 한국 창작 오페라를 생산하기 위한 이 프로젝트는 위촉과 생산 과정을 다분多分화했다.
여러 작곡가와 작가들이 각각 짝을 지어 만든 3~4종류의 작품이 나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리딩 공연’이다. 리딩 공연은 말 그대로 무대장 치나 소품·의상 없이 낭독 형태로만 이뤄지는 공연이다. 그렇게 작품의 골자를 본 후, 검토-수정-확장이라는 절차를 걸쳐 한 편의 제대로된 오페라 공연을 선보인다. 관객은 작품의 씨앗 단계부터 열매가 열리는 과정의 중요한 목격자가 된다. 그들의 취향과 선택도 적극 반영된 다. 위촉-작곡-연습-발표로 이어지던 오페라 창작의 투박한 과정과는 확연히 다르다.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 국립극장에 소속된 국립무용단의 ‘넥스트 스텝’ 시리즈도 이와 비슷하다.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인 이 시리즈는 안무가 2~3명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안무가는 주어진 분량 안에서 밀도 있게 작품을 다지고, 관객은 이를 통해 더 큰 공연장에서 만날 미래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3분 관현악’을 통해 뿌려진 열 개의 씨앗 속에서 관객은 국립국악관현악단 스타일과 잘 맞는 차기작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열 명의 작곡가가 ‘3분’ 음악을 요리해 들고나오는 이번 무대에서 서곡·협주곡·모음곡·합주곡이 발표된다. 미리 말하면 ‘3분’이란 관객에게 ‘짧다’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붙인 호칭이다. 실제로 공연에서 연주 되는 곡들은 3~4분의 분량이다.
최덕렬의 3분 서곡
최덕렬은 그룹 불세출에서 기타와 타악기, 작곡과 구성을 맡고 있다. 여덟 명의 멤버로 구성된 불세출은 관현악단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소리의 색채가 다양한 이 그룹은 국립무용단 컬렉션 ‘팜므파탈’에서 음악을 맡아 무용의 춤사위에 입체감을 더했다. 이들과 함께해온 최덕 렬은 그만큼 각 악기를 잘 이해하고 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실내악 공연 ‘별미 別美 콘서트’에서 발표한 ‘시르실 VII’도 악기의 존재감과 색채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작품 순서를 정하던 중 그가 서곡을 맡게 되자, 즉석에서 아이디어를 냈다. 하나, 막을 여는 것이니 축제의 분위기를 살리겠다는 것. 둘, 국악 관현악단을 이루는 각 파트별 악기를 드러내겠다는 것. 그래서 거문고·피리와 대피리·해금·타악기 등이 파트별로 짧은 시간 동안 관객에게 인사를 건넨다. 관현악단은 여러 개의 악기는 물론 여러 중주단과 실내 악단으로 구성된 음향 공동체이기도 하다. ‘조율’은 그 묘미를 느낄 수있는 곡이다.
장민석·김현섭·김영상의 12분 협주곡
‘3분 관현악’을 위한 첫 회의 끝에, 20대인 세 작곡가는 마지막까지 남아 아이디어를 모았다. 3분이라는 시간에 막막해하면서도 예술감독 김성진과 필자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그 결과 각자의 ‘3분’을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기로 했다. 이른바 공동 창작 노선을 택한 것.
장민석은 2018년 ARKO 한국창작음악제(이하 아창제)에서 가야금 협주곡을 발표한 바 있고, 김현섭은 2017년 아창제 공연과 개인 작곡 발표회를 가졌다. 김영상은 KBS 국악관현악단·서울가야금앙상블 등을 통해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발표했다. 각자의 3분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대제목으로 모인다. 1악장 생황 협주곡 ‘신기루와 폐허’(장민석), 2악장 거문고 협주곡 ‘그 안의 불꽃’(김현섭), 3악장 해금 협주곡 ‘끝없이 하늘 끝으로’(김영상), 4악장 생황·거문고·해금 3중 협주곡 ‘정화’(장민석·김현섭·김영상) 순이다. 4악장의 관현악 부분은 김영상이, 타악은 장민석이, 세 악기의 협주 부분은 김현섭이 맡았다.
위대한 예술가의 이면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한 젊은 예술가가 구도의 길을 떠나는 1악장. 2악장의 거문고는 그 안에 일어나는 창작의 강한 불꽃을 지속해서 표현하고 상징한다. 갈등과 좌절의 여정 속에서 끊임 없이 지상과 속세를 벗어나는 승화를 꿈꾸는 3악장, 그리고 4악장에선 그러한 이상향에 도달한다는 내용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들을 보며 음악사에 간헐적으로 나타났던 작곡가 동인이 떠오르기도 했다. ‘제3세대’는 1981년에 작곡가 이건용·황성호·유병은·허영한·진규영 등이 만든 작곡 동인이다. 함께 모여서 더 큰 울림을 준 작곡가 동인 ‘제3세대’처럼 이들도 각자의 특색을 갖고 어우러져 하나의 음악을 완성한 것이다. 김현섭은 “공동 창작과 그룹 결성에 이번 ‘3분 관현악’이 지렛대 역할을 했다”라고 했다.
장석진의 9분 모음곡
장석진은 영국에서 오랜 시간 서양음악을 공부하며 작곡가로서 체력을 키웠다. KBS 교향악단 신진 작곡가 선정, 오페라 ‘소서노’ 창작 등을 통해 자신만의 관현악 문법을 적용·실험하던 그는 근래에 들어 국악 관현악 작업을 통해 제2의 길을 모색하고 확장하고 있다. “국악 경력으로 따지면 제가 가장 짧을 겁니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그는 서울시국악관현악단과 전자 음향이 함께한 ‘천지회귀단일점’을 발표한 바 있으며, 아창제에서 ‘어느 날’을 선보이기도 했다. 2018년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관현악시리즈 II ‘다시 만난 아리랑’에선 북한 작곡가 리한우의 단소 협주곡 ‘긴 아리랑’의 재작곡을 맡았는데,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음악적 목소리를 곳곳에 잘 심어놓았다. 국립극장이 위치한 남산의 옛 이름인 ‘목멱산’을 제목으로 한 그의 작품은 ‘3분’씩 3곡을 엮어달라는 위촉으로 탄생했다. 1악장 ‘구름정원’, 2악장 ‘산에 오르다’, 3악장 ‘목멱산’ 구성으로, 남산의 자연을 그린 3분의 풍경음화音畵이자 3곡을 엮은 소리 병풍이다. “역사적인 이야기보다는 오랜 시간 서울의 중심을 지켜온 남산의 존재와 향기를 담아보려 했다. 각 악장은 독립돼도 좋을 만큼 밀도와 완성도를 갖추고, 모음곡으로서의 전체적인 윤곽도 갖게 했다.”
최지운·양승환·정수연·이고운·김창환의 15분 합주곡
이 합주곡은 다섯 작곡가의 ‘3분’이 모여 만든 ‘15분’짜리 음악이다. 다섯 작품은 어떤 묘사나 서술·서사를 공유하지 않았다. 공통점이 있다면 ‘3분’이라는 시간과 ‘국악 관현악’이라는 음향 매체뿐이다. 그렇지만 이번 공연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3분’이라는 시간 앞에서 각자가 떠올린 소재나 생각의 자유로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타령, 부드러움의 힘’을 발표하는 최지운은 작곡가 열 명 중 최연소이지만 아창제를 통해 관현악 작품을 발표한 작곡가이다. 3분이라고 했을 때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올랐느냐는 질문에 헤밍웨이의 에피소드를 떠올렸다고.
“여섯 단어로 가장 슬픈 문장을 지어보라는 부탁을 받은 헤밍웨이는 이렇게 적었다고 해요.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단 한 번도 신지 않은 아기 신발을 팝니다)’.”
그는 이번 기회를 계기로 ‘짧고 강한 인상’을 염두에 두며 영산회상 중 ‘타령’을 3분 동안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양승환은 이번에 함께하는 작곡가 중 국악 관현악 작·편곡 경력이 가장 많다. 신진 음악가들의 등용문인 21세기 한국음악프로젝트의 감독으로 활동한 그는 하이브리드적인 유연성을 통해 한국음악과 여러 예술 장르와의 접합과 실험을 도모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판타스마Fantasma’는 환상(환영), 귀신(유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3분동안 “신비롭고 몽환적인 상태로 접어드는 짧은 순간의 내면 심리”를 표현한다.
양승환과 정수연은 현실을 떠나는 ‘3분’이라는 점에서 살짝 닮았다. 정수연의 국악 관현악으로 꾸는 ‘백일몽’은 쪽잠과도 같은 달콤한 낮잠 시간을 그린 곡이다. 하지만 ‘백일몽’에서 깨어난 자에게 현실의 풍경과 부조리는 더 날카롭게 다가온다. 짧은 시간이지만, A-B-A 구조를 활용해 백일몽(B)의 시간을 관객에게 뚜렷이 보여준다. 정수연은 작곡가동인 K-CMC의 멤버이자, 2017년부터 작곡 발표회 ‘쾌미&케미, 絲중주’ ‘흔적’ ‘흔적 II’를 꾸준히 선보여왔다.
“딱 한 가지에만 에너지를 집중 투여하겠다”라고 말한 이고운의 ‘마지막 3분, 무당의 춤’은 강렬한 곡이다. 음악을 이미지로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그녀는 ‘3분’ 동안 환상 속의 무당을 춤추게 한다. 게다가 ‘3분’이기에, 그 마지막 춤은 더 진하고 강렬하다. 작곡 발표회 ‘맞닿음’을 가졌고, 작곡가들이 악단에 상주작곡가로 선정돼 진행하는 오작교 프로젝트를 통해 관현악의 기초 체력을 키웠다.
김창환은 에스닉 팝그룹 락RAAK에서 작곡을 담당하며 국악과 대중 사이에 교량을 놓아온 작곡가이다. 위촉을 받고 “3분 동안 대중과 함께 하는 축제 같은 분위기”를 단번에 떠올렸다는 그가 발표할 곡은 ‘취吹하고 타打하다’다. 취타吹打의 흥겨운 장단을 뼈대 삼아,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선율로 살을 붙였다.
3분 관현악 활용법
작곡가 열 명이 뿌리는 ‘3분’의 씨앗에는 그들의 스타일은 물론 미래의 열매가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3분 관현악’은 국악 관현악 작품의 창작 기회를 좀처럼 잡을 수 없었던 젊은 작곡가들이 만든 동시대 음악의 본보기와도 같다.
서양 관현악의 경우, 짧은 분량이지만 강한 메시지와 분위기를 담고 있는 서곡이 많다. ‘모음곡’ ‘조곡’이라 불리는 작품의 일부를 이루는 토막 명작 또한 많다. ‘3분 관현악’을 통해 태어난 ‘3분 음악’들이 전국으로 퍼지길 바란다. 그래서 여러 국악관현악단이 선보이는 무대에서 곡과 곡 사이에 배치돼 음악적 흐름과 분위기를 바꿔주는 작은 조각이 되길 기대한다. 또한 이번에 발표된 작품 열 곡은 분해되고 재배치돼 또 하나의 ‘모음곡’이 되길 바란다.
글 송현민 음악평론가. 급변하는 음악 생태계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하고 있다. ‘3분 관현악’의 프로그램 디렉터를 맡아 10명의 작곡가와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 I ‘3분 관현악’
날짜 2019년 10월 24~25일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관람료 R석 5만 원, S석 3만 원
문의 국립극장 02-2280-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