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빠른예매 바로가기 사이트 지도 바로가기
월간미르 상세

2019년 10월호 Vol.357

춤이 쌓이는 순간, 그 생생한 기록

SPECIALㅣ 연습 현장 스케치

 

“무대 위 회오리를 만들려면, 스스로 회오리가 돼야죠.” 무용수들의 열정에 연습실이 뜨겁게 소용돌이친다. 미리 엿본 여섯 번째 ‘회오리’ 탄생 현장이다.

 

“휘오오오, ~파. 푸카타타, 떼우, 나바~ 후아아.”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라는 영화 속 대사를 떠올리게 할만큼 정체 모를 소리가 연습실을 뒤덮는다. 이 정체불명의 음향은 분명 안무가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맞다. 하지만 듣는 이에 따라 무술 기합 소리처럼, 때론 평원에 휘몰아치는 거대한 바람소리처럼,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꿈틀대는 소리처럼 들린다. 안무가의 입에서 나온 거친 호흡은 무용수의 손끝에서 발끝까지 들어갔다 흘러나오며 점차 큰 회오리가 된다.
아직 더위가 채 꺾이지 않은 지난 8월 30일, 국립극장 뜰아래 연습장. 국립무용단 대표 레퍼토리 ‘회오리’의 공연을 약 한 달 앞두고, 안무가와 단원들이 온몸으로 회오리를 ‘체화體化’하는 훈련 중이었다. 말 그대로 회오리를 전신으로 구현하는 작업. 강도 높은 군무와 개별 안무 훈련 후 잠시 쉬는 시간이면 무용수들은 탈진하듯 하나둘씩 연습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우려도 잠시. 흥건한 땀을 닦고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면 그만. 이들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방금 연습한 동작을 반복해서 미세한 춤선까지 가다듬었다. 한쪽에서는 언더스터디를 맡은 단원들이 분주하게 선배의 동작을 따라 하며 연습실을 하나의 뜨거운 소용돌이로 만들었다. ‘회오리’에 몰입한 단원들의 기운이 하나로 뭉쳐 세차게 솟아올랐다. 거친 날숨과 함께 이따금 무용수들의 입에서 “아, 힘들어 죽을 것 같다”라는 탄식도 튀어나왔다.

 

 

 

 

 

따로, 또 같이 하나의 회오리로 거듭나기
연습은 좌중을 압도하는 1장 ‘조류’의 군무 장면으로 시작됐다. 올해로 6년 차. 이제 ‘완숙 단계’에 접어든 만큼, 연습이 무용수 간 합을 맞춰보는 수준일 거란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한마디로 고된 작업의 연속이었다. 샤먼 역의 송설 독무가 펼쳐진 뒤 김미애를 중심으로 무용수들이한 명씩 무리에 합류했다. 회오리의 에너지를 키워가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군무의 묵직한 호흡과 격정적 안무가 포인트. 흔히 떠올리는 한국무용과는 달라 보였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동작을 이어가는 모습은 묘하게 한국무용과 닮아 있었다. 특별히 핀란드 출신의 안무가 테로 사리넨이 직접 연습실을 찾아 평소 보다 고강도 연습을 이끌었다. 새로운 장면이나 안무가 추가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는 단원들과 끝없이 동작을 논의하며 교정했다. “무용은 항상 처음처럼 신선해야 한다”라는 것이 그의 철학인 만큼 새로운 회오리를 구현하기 위해 주문하는 바도 많았다. “이곳의 에너지가 온몸을 거쳐 저곳으로 전해진다는 생각으로!” “몸이 ‘휘오오오’ 바람에 휩쓸리듯 더 자연스럽게!” “지금부터 천년이 지났다고 상상해봐요. 새로운 세계에 마치 첫발을 내딛는 느낌으로!”
때로는 그의 지도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그는 직접 생각한 바를 연습실 중앙으로 나서 몸소 보여주는 무용수 출신의 안무 가다. 이어지는 2장 ‘전파’의 4인무 연습에서 테로에게 가장 많은 지도를 받은 송지영·박혜지 무용수는 “그는 ‘무용수로서의 영혼’이 아직 살아 있다고 느껴질 만큼 몸으로 직접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안무가예요. 동작을 보여주면서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로 지시하는 게 아니라 저희에게 더 다양하고 새로운 표현 방식을 요구하는 점이 좋아요”라고 입을 모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회오리의 역동성을 고스란히 객석까지 전하려면 이들은 몇 배로 크게 에너지를 써야 할 터. 연습 중 테로는 “그래 좋아, 좋아, 바로 그거야!”라고 반복해 외치면서 무용수로부터 더 큰 움직임을 끌어내기 위해 목청을 높였다. 무대 위 꿈틀대는 생명력이 늘 휘몰아치기만 하는 건 아니다. 정적인 순간에 잠시 숨을 고를 때도 있다. 4인무에서 다양한 고난도 동작을 선보여야 하는 송지영·박혜지 두 무용수는 오히려 역동적 군무가 휘몰 아친 다음, 2장 ‘전파’에서 상대 무용수에게 훨씬 더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력 소모가 크다고 했다. 이어 “정적인 장면이 보기에 쉬워 보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아요. 예를 들어, 남자 무용수에게 매달려 있는 장면은 그들이 저희를 들어 올리는 것만큼이나 에너지가 소비되죠”라며 웃었다. 4인이 하나가 돼 무대를 둥글게 돌면서 온몸으로 바닥을 쓸어 올리는 듯한 장면은 부상이 우려될 만큼 격정적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시 해보자”라며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근육이 터질 듯 힘을 쓰는 남자 무용 수들은 틈틈이 팔굽혀펴기를 하며 몸을 단련했다. 숱한 무대를 거쳤지만, 유독 ‘회오리’를 무대에 올리려면 더 많은 체력이 필요하다. 박혜지는 “‘회오리’처럼 동서양의 움직임을 결합한 공연 에서는 일반적인 한국춤 공연보다 몸을 쓰는 범위가 더 넓다”라며 “일단 체력을 길러내는 게 모두에게 큰 과제”라고 했다. 

 

 

 

깊은 유대에서 비롯한 단단함
힘든 연습도 단원들은 단단한 팀워크로 이겨내고 있다. 무용수들이 따로 움직이면서도 하나의 회오리 ‘뭉텅이’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팀워크에 공연의 성패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지영은 “‘회오리’에 참여하는 인원이 전부 ‘열성 단원’이라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연습에 최선을 다해요. 함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팀원을 꾸려준 테로가 고마워요”라고 했다. 이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연습 시작 전에 먼저 나와 단원들이 몸을 풀고 있을 만큼 모두가 스스로 긴장 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2014년 초연부터 빠짐없이 공연에 참여한 박혜지에게 이번 공연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는 ‘회오리’가 “표현력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했다. 2017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회오리’ 무대에 서는 송지영은 “춤·사람·감정의 공존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준 작품”이 라며 “철학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관객에게 쉽고 직관적으로 와닿을 매력이 있다”라고 했다. 연습실에서 두 사람을 눈여겨본 테로의 ‘폭풍 칭찬’도 이어졌다. 그는 2014년 박혜지를 주역 무용수로 발탁했을 때를 떠올렸다.
“새로운 세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나가는 젊은 느낌을 강조하고 싶었 는데 당시 인턴이던 박혜지 무용수가 눈에 띄었어요. 2장 ‘전파’의 내용 처럼 다음 세대로 뭔가 전달하는 과정을 표현하고 싶었죠. 에너지가 강하고 성숙한 그녀는 지금도 새로움을 표현하는 데 최고의 기량을 보여 주고 있어요.”
그는 송지영 무용수를 ‘아름다움·권위·카리스마’라는 단어로 묘사하며 그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새로운 영감을 위해 도전하고 싶었어요. 김미애 무용수가 맡고 있던 ‘블랙’은 힘들면서 무겁고 중요한 역할입니다. 다른 무용수가 결코 표현하기 쉽지 않은 역할인데 성숙함·역사성·우아함을 동시에 가진 송지영을 발견했죠. 카리스마 넘치는 무용수로서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작업하고 있어요.”
무용수들과 대화할 때는 장난기 많은 소년 같았던 테로는 작품을 설명할 때만큼은 진지한 눈빛의 안무가로 돌변했다. 무대에 펼쳐지는 무용 장면 너머 그가 원하는 이상향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우리 삶도, 무용도 나무의 나이테처럼 쌓일수록 새로워지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무용의 정신과 제 안무가 만나 새로운 ‘회오리’ 를 만들고 있어요. 때론 새로움을 위해 모든 게 죽고 파괴돼야 할 때도 있겠죠. 결말이 어떻든 우리 삶에 새로운 걸 창조하고 있다는 점이 기쁩니다. 나아가 모두가 이런 자연, 인간의 모습에 집중하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거라 믿어요.”
그가 웃으면서 덧붙인 한 마디에서 그의 완벽주의적 면모가 느껴졌다.
“그런데 항상 새로운 걸 발견하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지 않나요? 그러니 매 순간 최선을 다할 수밖에요.”

 

김기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개인전보다는 팀전이, 독주보다는 협주가 더 큰 울림을 준다고 믿으며, 수많은 이가 함께 만드는 공연 현장의 울림을 전하겠다는 의지로 글을 쓴다.

사이트 지도

사이트 지도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