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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9월호 Vol.356

동물들이 바라본 바른 지도자의 덕목

삶과 노래 사이┃‘수궁가’의 상좌다툼 대목

 

‘수궁가’엔 여러 동물이 상좌를 두고 다투는 대목이 있다. 동물은 인간을 대신해 계급에 따라 자세를 달리하던 당시 사회를 풍자하고, 올바른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이야기한다.


판소리는 창자가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창(노래)과 아니리(말) 그리고 발림(몸짓)으로 구연하는 종합예술이다. 신분과 성별의 구분이 엄격하던 조선 시대에 양반과 평민이 함께 어울리는 대동의 판에서 연행됐다. 판소리 광대들은 궁궐에 불려가 공연하고 고종과 흥선대원군에게 벼슬을 하사받기도 했다. 이후 판소리는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됐고, 2013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문화적 보존 가치를 널리 인정받았다.
판소리는 열두 바탕 중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총 다섯 바탕만 전승되고 있다. 사설만 전승되는 ‘장끼타령’을 제외하면, 동물들이 등장해 인간 세상을 우의적으로 그린 작품으로는 ‘수궁가’가 유일하다. ‘수궁가’는 판소리 유파 중 서편제와 중고제에서 계승이 단절됐고, 동편제에서만 계승되고 있다. ‘수궁가’는 ‘토끼타령’ ‘별주부타령’ ‘토별가’로도 불려 주인공이 명실 공히 자라와 토끼다. 용왕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러 육지에 올라온 자라는 여러 동물이 설전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바로 날짐승과 길짐승이 상좌를 두고 다투는 장면이다. 윗자리에 누가 앉아야 하는지를 놓고 벌이는 동물들의 설전이 무척 흥미롭다.

 

 

인간과 신의 인연으로 왕을 뽑다
창본에 따라 상좌가 달리 정해지는 부분에서 판소리의 구비문학적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김연수·정광수·박봉술·정권진 창본에는 노루·너구리·멧돼지·토끼가 차례로 나오다 마지막에 호랑이가 등장해 상좌를 차지한다. 반면 임방울 창본에는 노루·너구리·멧돼지·토끼 순으로, 이선유 창본에는 너구리·돼지·토끼 순으로 등장해 토끼가 상좌에 앉는다. 이에 반해 박초월 창본에는 노루·너구리·토끼·멧돼지가 앞다퉈 자신을 뽐내는 장면이 있지만, 상좌를 정하지 않고 다음 대목으로 넘어간다.
동편제 ‘수궁가’의 계보는 송홍록·송광록·송우룡·유성준·김연수 등으로 이어진다. 김연수 창본에 따르면, 자라가 육지에 오르자 온갖 날짐승들이 서로 상좌에 앉겠다며 다툰다. 먼저 앵무새가 나서서 자신은 말을 할 수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 언사가 상통하니 상좌감이라 한다. 그러자 봉황새가 앵무새를 꾸짖으며 자신은 유학의 성인인 순임금·문왕·무왕·공자와 인연을 맺었으며, 아무리 굶주려도 좁쌀은 먹지 않는 기불탁속飢不啄粟에 오동나무에 앉아 소상오죽蕭湘烏竹 좋은 열매를 양식으로 삼았으니 자신이 어른이라 주장한다. 이에 까마귀도 지지 않고 나서며 자신은 왕희지가 벼루를 씻던 세연지洗硯池에 빠져 먹물이 들어 몸이 검게 됐고, 은하수가 생긴 뒤로 매년 다리를 놓아 견우직녀를 만나게 도와줬으며, 적벽강에서 삼국의 흥망을 의논했고, 자식이 커서 부모를 봉양하는 반포은反哺恩을 아는 효자라 주장한다. 그러자 부엉이가 나서 온몸이 검은 데다가 괴이한 음성으로 수절 과부를 유인하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오비이락烏飛梨落의 주인공이니 세상에 밉고 불길한 존재가 까마귀라며 비난한다.
상좌다툼에서 앵무새는 사람과의 소통을 장기로 내세운다. 봉황새는 유학자들이 오매불망하며 닮고자 했던 순임금·문왕 등과 같은 성인과의 인연을 상좌에 오를 이유로 든다. 그리고 까마귀는 서예의 명인으로 존경받는 왕희지, 신화의 주인공 견우직녀, 적벽대전의 절세 영웅인 조조·손권·유비와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열거한다. 당시 이상적 인물이나 지향해야 할 행위를 통해 자신이 상좌에 앉아야 하는 당위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길짐승들의 다툼을 살펴보자. 기린·코끼리·사자·곰·호랑이·사슴·노루·토끼·여우·다람쥐·원숭이·고라니·너구리·멧돼지·족제비·담비·승냥이·오소리 등이 모여 나이를 명분으로 상좌다툼을 한다. 먼저 사슴이 기린에게 상좌를 권하지만, 기린은 성인만 따라다니는 까닭에 세상에 있지 않으므로 상좌에 앉을 수 없다며 거절한다. 기린의 거절에 노루가 나서며 이태백과 연갑이라 하고, 너구리는 조맹덕과 연갑이라고 말한다. 멧돼지가 소중랑과 연갑이라며 으스대자, 토끼가 나서며 엄자릉과 연갑이라고 한다. 그러나 호랑이가 나타나자 “야들이 어찌 겁이 났든지 한편으로 우 몰리여 똥오줌을 질금질금 싸며 ‘아이고 장군님 어데 갔다 인제 오시요오.’”하며 모두 뒤로 물러선다. 마침내 호랑이가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 속 여신 여와와 동갑이라 밝히자 모든 동물이 그를 상좌에 모신다.
호랑이를 상좌로 모시는 대목에서 약육강식의 논리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 실제로 호랑이는 다른 동물들 앞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살집 존 놈 두어 놈 나오느라. 시장기나 좀 면허자”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세에 놀란 동물들이 추대해 상좌에 앉자마자 “네 거 아무거나 위선 한 입가심헐 것 하나 가져오느라”라고 하며 그 위세를 유감없이 펼친다. 힘으로써 집단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좌를 차지한 호랑이가 자라를 잡아먹으려다 도리어 자라에게 물려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여곡절 끝에 꽁지가 빠지게 압록강까지 도망친 호랑이의 말이 걸작이다. “내 용맹이나 됨개 여기까지 살어왔제 여간 놈 같었으면 하마 그 놈 뱃속에 들어가 똥됐이렸다.” 호랑이의 허세와 무능이 밝혀지며 실소를 자아낸다. 흡사 박지원의 ‘호질’에 등장하는, 도덕군자인 체하며 과부를 넘보던 위선적 양반 북곽선생을 보는 듯하다. 이는 약자에게 무자비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이들이 판치는 인간세계에 대한 통렬한 풍자다.

 

바른 마음가짐에 대한 노래
수궁가의 상좌다툼 대목은 지배층의 수탈과 억압이 횡행하는 사회를 풍자한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의미를 넘어 이면의 숨은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대목에서 이채로운 것은 동물들이 자신과 같은 연배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성격이다. 두보와 더불어 당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시선詩仙 이백(이태백), 위나라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난세의 영웅 조조(조맹덕), 흉노에 사신으로 간 후 고초를 이겨내며 절의를 지키다 19년 만에 한나라로 돌아온 충신 소무(소중랑), 한나라 광무제의 벗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숨어 산 은자 엄광(엄자릉), 복희와 더불어 인류의 시조로서 인간을 창조한 여신 여와가 거론되고 있다. 상좌다툼에 등장한 동물들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숭앙되던 인물들과 그들의 공적에 자신을 대비함으로써 상좌에 앉아야 하는 당위성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날짐승과 길짐승이 상좌다툼에서 내세운 논리는 자신이 당시 사회가 추구하던 최고의 가치이자 부동의 이념인 문과 무로 무장하고 있고, 충과 효를 고수하고 있으며, 성인과 신의 위업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민은 잘 모르던 중국의 고사와 인물, 자신의 삶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적어 평민에게 관심조차 없는 일이 장황하게 나열됐다. 이러한 양상은 판소리가 본래 평민의 예술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이 참여하는 예술로 변화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판소리 광대들은 공연 비용을 대던 양반들에게 집중해 그들의 취향과 기호에 맞게 판소리 사설을 개작해나갔다. 양반이 즐겨 읽던 소설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 장면을 기반으로 창작한 판소리 ‘적벽가’가 대표적인 방증이다. 결국 판소리 사설은 소리제와 유파, 바디와 더늠에 따라 일정 부분 변개되며 전승됐다.
‘수궁가’의 상좌다툼 대목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약육강식이라는 치열하고도 처절한 힘의 논리보다 동물들이 각기 내세우는 덕목들이다. 어떠한 덕목이 그들에게 자부심과 자긍심을 불어넣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그러한 덕목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알아가는 것이 이 대목의 또 다른 주안점이다. 여러 동물의 입을 통해 다양한 덕목을 나열함으로써 상좌에 앉을 만한 인물이 지녀야 할 자질을 환기시키고, 한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위 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동의 판에 참여한 이들의 심금을 울리던 ‘수궁가’의 사설이 오늘도 우리의 가슴속에 파고드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김문태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과정 교수

그림 날(nal)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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